철없는 아내

권녕하 칼럼

철없는 아내

 

“낯 설은 남남 간에/ 너와 내가 만난 것은/ 서러워도 믿고 살자/ 마음하나 믿었는데”(하략)로 시작되는 차도균의 노래〈철없는 아내〉가 발표되었을 때, 시중에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까닭은 가사 내용이 파격(?)이었기 때문인데, 참! 철딱서니 없는 아내가, 무슨 연유인지(암묵적으로 다 알고 있지만) 집을 나가는 바람에, 그 아내가 돌아오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남편이, 집으로 돌아오기만 한다면 모든 것을 용서하겠다는 순애보(殉愛譜)적인 심경을 드러낸 내용이었다.

그러했으니 “사람들이 다 듣는 라디오에서, 세상에 망조든 이런 노래가 흘러나오면 어떡하냐!”며, 그 당시의 가부장적(?) 사회상을 대변한 반응이 재빠르게 나왔다. 한편 “대중가요인데 뭘 어때?” 하는 반론도 비등했다. 그런가하면, 뻑 하면 고발(?) 잘하는 부류(?)에서 나온 반응이 꽤나 의외였다. ‘사전 심의과정(?)을 다 통과했기에 발표된 것 아니겠느냐?’며 의외로 파문을 진정시키는 역할을 해주었다. 그래서 그랬는지〈철없는 아내〉는 슬금슬금 라디오 전파를 타기 시작했고 히트곡 반열에까지 올라섰다.

▴이성재(1967) 작사, 이봉조 작곡, 차도균이 노래한〈철없는 아내〉이야기를 재구성해 본 것은, 참! 딱한 사람들이 남자여자 구별 없이, 2019년 현재, 참! 딱하게도 살고 있는데, 참! 딱한 짓을 저지르면서도, 참! 딱하게도 자신의 잘잘못을 못 느끼고, 지네들끼리 떼를 지어, 참! 딱한 일들을 천연덕스럽게 저지르고 있는데, 그 개개인을 하나의 인격체로 떼어놓고 애정어린 눈으로 살펴보면, 때때로 착하고 순진한 면도 있어 보여, 참! 정말 딱하게 보일 때도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모든 것을 용서하겠으니, 과거는 불문에 붙이겠으니, 돌아오기만 해달라는 순애보적인 노래를 또 불러주면, ‘과거를 묻지 말라!’며 정말 돌아 와주기라도 한다는 것인가.

상황이 이렇게 진전되면, 누가 누굴 포용하고 누굴 누가 용서해줘야 하는지, 그저 꾹 참고 사는 게 맞는 건지 틀린 것인지 조차 헷갈릴 지경이 돼버린 오늘날, 결국 이 노래를 또 불러야 할 때가 왔다는 말인가! 그렇게 정신 나간 멀탱이처럼 정말 자신이 사랑한다고 믿고 믿는다면, 진짜 무슨 잘못이든지 다 용서해주고 용납해줘야 한단 말인가. 그 정도로 그렇게도 ‘철딱서니 없는 아내’를 정말 받아들이겠다는 말인가! 또 나가면, 그 때 가서는 또 어떻게 할 건가? 집이 어디 들락날락 하는 새집인가?

∙중국을 최초로 통일하고 황제(皇帝) 칭호를 처음으로 쓰기 시작한 진(秦)나라의 왕(王), 정(政, 嬴政, 趙政)은, 사후에 최초, 처음[始] 황제라는 의미로(다음 황제와 구별하기 위하여) 시황제(始皇帝)라 역사에서 칭하게 된다. 시황제는 역사에 폭군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 대표적 이유는 분서갱유(焚書坑儒) 때문이었다. 살아생전, 자신을 죽이러 온 자객조차 감복시키기도 했던 황제, 최초로 중국을 통일하여 분란을 종식시켰던 황제가, 후세의 사가들의 붓끝에서 폭군으로, 사정없이 난도질을 당하고 만다.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200여년 뒤에 태어난 사마천(司馬遷)이다. 그가 쓴《史記》가 워낙 유명해서, 그 위세에 눌려 지적 질을 못하고 있는지, 모화사상(慕華思想)혹에 맹종했는지, 오류가 심심찮게 많은데도 불구하고, 이 ‘사기’를, 100% 전범(典範)으로 삼는 일부 학자들의 편향된 태도를 보면, 꼭 좀비영화를 보는 것 같아 참! 정말! 또! 딱하다.

갱유(坑儒)! 갱(坑) 당한 사람들은 유학자가 아니라 전국(戰國)을 어지럽게 흔들던 잡술(雜術), 도술(道術)인 들이다. 그들 중에서도 통일 이후에도 사회기강을 어지럽히고 분란을 충동질하던 부류가 갱(坑) 당한 것이다. 분서(焚書) 또한 죽간(竹簡)에 문자를 그렸는지 썼는지, 동서남북 지역마다 서로 통하지 않는 문자를 통일하느라, 문자를 정비하고 과거의 대쪽들을 정리하여 없앤 것인데, 그것도 종이도 없던 시절에 대나무쪽 일부를 없앤 수준인데, 그걸 ‘분서’라고 공자맹자를 불태운 것처럼 역사왜곡이다. 승자의 역사왜곡과 분탕질에 편승한, 학자(?)라는 자들의 부역(附逆) 행위는 참! 딱할 지경을 넘어, 미래에까지 해악을 끼치는 참담한 짓이다. 참고로 진짜 분서갱유한 권력은 모택동의 홍위병이다.

▴2019년, 자칭타칭 언론용어인 ‘헬조선’에서 태어난 ‘흙수저’들의 앞에 펼쳐진 이 세상에서, 취직은 해야 되는데 시험만 보면 자꾸 과락(科落)으로 떨어진다. 과거의 ‘민정당’에 ‘민주’가 없었듯이, 공산국가 독재국가들의 나라 이름에 ‘민주’라는 용어가 당당하게 들어가 있는 것을 보면, ‘민주’는 공산, 독재와 내재적으로 ‘동의어’라고 국어사전에 실려 있어야 교육과정에 혼돈이 없을 것 아니겠는가. 또 있다. 친일파, 친일부역자들이 땅 찾겠다고 소송 건 것을 ‘법적으로 친절하게 판결해주는 것’을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보면, 독립군이 ‘누굴 위하여 죽었는지’ 헷갈린다. 사지선다 문제에도 답이 없다. 연필을 굴려도 소용없다. 이럴 바에야 몽땅 내다버리던지 확 다 망해버리던지, 어차피 폭망 할 것 같으면, 사상이 밥 먹여줄 것도 아니고, 피아 구분 없이 무차별 목격이나 요청하는 게 낫겠다. 그렇게라도 되면, 운수 탓으로 돌리면 되니까.

▴이런 억하심정이 든 것은《무기여 잘있거라》,《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노인과 바다》를 쓴 대문호 헤밍웨이가 왜, 갑자기 자살로 생을 마감했는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물빛이 너무 파래서” 죽어버렸을까? “다 소용 없는 짓”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을까. 1차, 2차 대전의 참상과 스페인 내전을 겪고 난 후 귀국한 다음, 말년에 귀농(?)하듯 바닷가 펜션에서 잘 먹고 잘 살던 헤밍웨이. 그곳에서 그는 ‘세상은 결국 인간 적자생존의 현장’이고, ‘자연의 섭리는 한 치도 용서가 없다’는 것과 인간의 신념이나 그 잘난 사상이나, 천국이나 팔아먹는 종교보다 더욱 엄숙한 자연의 섭리를 깨달은 순간! ‘그동안 헛살았구나!’ 하고 자살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알파고’에 ‘핵, 신념, 종교, 민주, 사상, 원자력발전소, 미세먼지, 청와대, 평양, 중국, 일본’ 등을 데이터에 넣고 물어보니 “빨리 죽을수록 행복하다.”라고 대답한다. 이런! ‘개똥같은 세상에서’(한 시대 전 文시인의 詩語) 살면서, 그래서 오늘 밤! 달(Moon)을 쳐다보며 ‘식스펜스!’(런던 뒷골목의 생맥주 한 잔 값)를 새삼 부르짖어본다. ‘엉터리술집’에서의 외상술, 먹물들인 군복바지 입은, 가난했지만 희망이 꿈틀거리던 그 시절을 그리워하며….

권녕하 (시인, 문학평론가, <한강문학>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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