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방을 닮은 튤립과 플루트의 잔

목이 좁고 긴 샴페인 글라스 플루트

南台祐 교수의 특별기고

세상에서 가장 에로틱한 수밀도형 술잔 이야기⓳

유방을 닮은 튤립과 플루트의 잔

 

샴페인 글라스는 보통 길쭉한 튤립(Tulip) 모양이나 플루트(flute) 모양이 많이 사용된다. 가끔은 넓고 키 작은 글라스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긴 튤립 모양의 글라스가 위쪽이 좁아서 글라스를 입에 댈 때 거품을 조절할 수 있다. 샴페인(스파클링 와인 포함)은 여성적인 와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가볍고 톡 쏘는 거품의 맛이 때로 종잡기 어려운 여성의 마음처럼 느껴지기 때문일까? 아무튼 ‘플루트’라고 불리는 날씬하고 긴 샴페인 잔의 모양부터 매우 여성적인 데다, 그 잔을 들고 담소하는 여인들의 모습이 우아하게 보이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한 샴페인은 알코올 도수가 12% 이하로 낮기 때문에 쉽게 취하지 않는 것도 여성들이 선호하는 이유가 될 수 있다.

퐁파두르, 샴페인은 마신 후에도 여인의 아름다움을 지켜주는 유일한 술

샴페인 글라스의 모양에 관해서도 여성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전해진다. 그리스 신화로 거슬러 올라가면 첫 번째 와인 잔인 쿠페(coupe)는 아름다운 헬레네의 젖가슴 모양을 따라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리스 사람들은 와인을 마시는 일을 매우 육감적인 경험으로 여겼기 때문에 가장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닮은 잔에 따라 마셔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당시의 와인 잔은 헬레네의 젖가슴처럼 매우 넓고 얕은 모양을 하고 있다. 당시 그리스 사람들은 와인 마시는 것을 관능적인 경험으로 생각했고, 또 글라스는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 이 모형을 만드는데 관여하여 꼭 맞는 것이라야 생각했다.

18세기에 이르러 프랑스의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가 새로운 샴페인 글라스를 만들어내는데 그녀의 유방이 공헌했는데, 그녀 역시 자신의 젖가슴 모양을 따라 샴페인 잔을 빚어냈다. 그런데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의 젖가슴이 헬레네의 것보다 훨씬 좁고 통통했는지 샴페인 잔도 훨씬 둥글고 길어진 것을 볼 수 있다.

사실 수백 년 전 샴페인이 처음 선보였을 때 그 가치를 알아보고 이를 국제적으로 선전하여 대중화시킨 사람들은 여성이었다. 특별히 왕궁에 있던 여인들이 샴페인의 매력에 흠뻑 취해 즐겨 마셨는데, 그 중 루이 XV세의 애첩 마담 드 퐁파두르(Madame de Pompadour)는 그녀가 샴페인에 대해 남긴 명언은 아직까지도 사교계에서 자주 인용된다.

“샴페인은 마신 후에도 여인의 아름다움을 지켜주는 유일한 술이다(Champagns is the only wine that leaves a woman beautiful after drink it).”라고 칭찬해마지 않았다.

왕의 여자 마담 퐁파두르! 그녀는 마치 샴페인 같은 여자다. 우아하며, 화사하되, 야하지 않는, 그리고 절도가 있는…, 그러나 퐁파두르를 보면 왠지 샴페인 거품처럼 금방 사라져 버릴 것 같은 허망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Madame de Pompadour, by Francois Boucher, 1757. Jeanne Antoinette Poisson, Marquise de Pompadour

퐁파두르는 매년 200병씩 샴페인을 특별 주문했다고 한다. 그녀가 샴페인을 얼마나 좋아했던지, 샴페인 잔을 잡으면 바닥에 놓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퐁파두르 샴페인 잔’이 등장하였는데, 그녀의 가슴을 모델로 만든 그 잔은 바닥의 받침대가 없어 탁자에 세울 수가 없으며 손으로 들고 있어야 한다.

마담 드 파라베르는 “샴페인은 얼굴이 붉어지지 않고도 눈에 광채를 주는 유일한 와인”이라고 예찬론을 폈다. 아름다운 금발과 독특한 성적 매력으로 20세기를 뒤흔든 마릴린 먼로도 샴페인의 매력에 사로잡혔던 샴페인 애호가로 꼽힌다. 샴페인과 함께 유명해진 그녀의 일화는 바로 샴페인 목욕이다. 그녀는 샴페인 350병을 부어 넣은 욕조에서 목욕을 즐겼으며, 그녀의 전기를 쓴 조지 배리스(George Barris)는 먼로가 샴페인을 마치 산소처럼 마시고 호흡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녀는 미모의 비결을 묻자 “나는 샤넬 N0.5를 뿌린 후 잠자리에 들고, 샴페인 한 잔으로 아침을 시작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런던의 한 기자가 프랑스의 유명한 샴페인 제조사 사장인 마담 릴리 볼린저(Mm. Lilly Bollinger)에게 언제 샴페인을 마시느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나는 행복할 때 마시고 슬플 때 마십니다. 때로 혼자 있을 때도 마시죠.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당연히 의무적으로 마셔요. 배가 고프지 않을 때는 홀짝거리고, 배가 고플 때는 원 샷으로 마십니다. 그렇지 않고는 목마르지 않는 한 마시지 않지요.”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항상 샴페인을 마신다는 이야기를 장황하게 표현하고 있다.

샴페인을 취하기 위해 마시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샴페인은 샴페인만의 매혹적인 분위기가 있다. 여러 사람이 모여 함께 축하해야 할 기쁜 일이나, 연인끼리 속삭이는 은밀한 자리에서, 기쁨과 즐거움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사랑과 화합의 술이다. 샴페인을 화난 얼굴이나 고뇌에 찬 표정으로 마시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샴페인에는 영혼의 기쁨을 축하하고, 일상생활의 억압에서 벗어난 자유와 환희를 담고 있으며, 불행을 치료하는 ‘신비의 영약’이란 뜻도 지니고 있다. 샴페인이야 말로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존재하는 술이라고 할 수 있다.

루이 15세의 애첩 퐁파두르는 다섯 살 때 마차를 타고 지나가는 열여섯의 루이 15세를 보고 사랑을 느꼈다고 한다. 어릴 때 한 번 보고 느꼈던 사랑의 감정은 그녀가 사촌인 샤를과 결혼한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마침내 루이 15세의 무도회에 참석할 기회를 얻었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왕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클레오파트라의 미모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퐁파두르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그녀에 관한 수많은 그림과 또한 기록이 보여주는 것과 같이 그녀는 분명 아름다웠으며, 또한 우아하였다.

그녀는 미모와 교양을 무기로 루이 15세에게 접근하여 1745년, 마침내 스물넷의 나이로 그의 정식 정인이 되었다. 루이 15세는 단아한 용모의 그녀에게 끌리었고, 이미 유부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데려다가 베르사유 궁에 정착시키며, 실질적인 후궁으로 만들었다. 왕은 그녀에게 정식으로 퐁파두르 후작 부인이라는 칭호를 하사했다.

마담 퐁파두르는 로코코 시대를 대표하는 클레오파트라를 능가하는 미인으로 파리의 금융업자의 딸로 태어났다. 본명은 잔 푸아송(Jeanne-Antoinette Poisson)이었으며 평민이었지만 어릴 때부터 음악, 문학 등을 개인 교습 받아 상당한 지식과 교양을 겸비하였다. 1741년에 그녀는 아버지의 조카, 즉 자신의 사촌인 샤를 기욤 르 노르망 데티올과 결혼하여 잔느 앙트와 네트 데티올로 이름을 바꾸고 딸 알렉상드린을 낳았다.

1744년에는 가끔 수렵을 하러오던 루이 15세에게 우연히 그 미모가 눈에 띄어 내연 관계를 맺게 되었다. 루이 15세의 젊은 정부인 샤토루 공작부인이 갑자기 죽자 그녀는 곧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고 그녀는 남편과 법적인 이혼절차를 밟은 뒤 그녀에게는 곧 후작 부인의 칭호가 주어져 귀족으로 신분이 격상되었으며, 남편과 이혼하여 1745년 9월 14일, 그녀의 나이 24세 때 정식으로 왕의 정부(情婦)로서 인정되어 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게 되었다.

마담 퐁파두르(Marquise de Pompadour)는 로코코 시대를 대표하는 클레오파트라를 능가하는 미인으로 파리의 금융업자의 딸로 태어났다. 본명은 ‘잔 푸아송 (Jeanne-Antoinette Poisson)’이었으며 평민이었지만, 어릴 때부터 음악, 문학 등을 개인 교습 받아 상당한 지식과 교양을 겸비하였다. 1741년에 그녀는 아버지의 조카, 즉 자신의 사촌인 샤를 기욤 르 노르망 데티올과 결혼하여 잔느 앙트와네트 데티올로 이름을 바꾸고 딸 알렉상드린을 낳았다.

부끄럼 많고 내성적인 루이 15세는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퐁파두르는 그의 개인 비서 역할을 하면서 명령을 내리기도 했으나 결정은 국왕이 했다. 그녀는 베르사유 궁전에서 조심스럽게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왕비인 마리 레슈친스카(Marie Leszczynska, 1703~1768)는 멋있고 예술적이며 세련되고 쾌락을 추구하는 국왕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아내였다. 그녀는 국왕보다 8살 연상으로 아버지(폴란드의 망명국왕)의 안녕과 자식양육, 신앙에만 몰두했다. 왕세자를 비롯한 8~9명의 자녀를 낳은 뒤 국왕에게 성적인 접촉의사가 없음을 밝혔다.

부인과 대립할 수밖에 없는 왕비의 측근조차 “퐁파두르 부인은 내가 본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의 하나”라고 토로할 만큼 외모가 뛰어났지만, 그러한 그녀의 외모보다 그녀의 사려 깊은 마음씨와 교양, 사고의 깊이가 왕의 총애를 받는 요인이었다. 프랑스 국왕의 공식 애첩이 된 퐁파두르 후작 부인은 죽을 때까지 20년 동안 루이 15세를 매혹시키고 그에게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녀는 돈을 물 쓰듯이 사용하고, 여기저기에 저택과 성곽 등을 건설하였으며(프랑스 대통령의 관저인 엘리제 궁전은 그녀의 저택 중의 하나다), 이윽고 정치에도 참견하게 되어 약 15년간 권세를 누리게 된다. 한마디로 퐁파두르 후작 부인은 침대에서 프랑스의 정치를 좌지우지한 그림자의 실력자라고 할 수 있다. 이때 퐁파두르 후작 부인은 “나의 시대가 왔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우아한 부인은 당대의 모든 미술에 영향을 미쳤다고 묘사한 당시 기록에서 엿볼 수 있듯이, 퐁파두르 후작 부인은 아름다운 외모를 갖고 있었을 뿐만이 아니라 매우 지성적이었고, 예술 전반에 걸쳐 높은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 학예 보호에 힘쓴 그녀의 살롱에는 볼테르와 몽테스키외 등의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그녀의 다양한 예술적 취미는 프랑스의 문예를 진흥시키는 데 큰 힘이 되었으니, 극장이나 소극장의 건립은 물론 당대의 예술가들도 모두 퐁파두르 후작 부인의 후원을 받았다. 그녀는 가구나 도자기, 그릇, 의상, 보석, 그림, 책 등 많은 수집품을 모았는데, 그녀가 갑작스레 죽은 뒤 그녀의 유품을 정리하는 데에만 1년이나 걸렸을 정도였다고 한다.

<다음호 계속>

남태우 교수

남태우 교수:중앙대학교(교수)▸중앙대학교 대학원 문헌정보학과 박사▸2011.07~2013.07 한국도서관협회 회장 ▸2009.07 한국도서관협회 부회장▸2007.06~2009.06 대통령소속 도서관정보정책위원회 위원 ▸2004.01~2006.12 한국정보관리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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