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그때가 됐네

권녕하 칼럼

시인, 문화평론가 <한강문학> 발행인

또 그때가 됐네

 

빙하기의 뼈저린 공포를 이겨내고 생존에 성공한 古인류는 그 공포를 DNA에 깊게 각인해 놨겠다. 그 후손들 즉 초기 신석기인들은 사냥을 하거나 따뜻한 계절이 돌아오면, 민물에서 물고기를 잡고, 산과 들에서는 먹어도 괜찮은 열매를 채취하며 살아갔겠다. 그렇게 수천 년을 살아가는 동안 조, 수수, 콩, 밀 등을 발견했고, 그 씨를 태양이 따뜻한 때를 택해 땅에 심고 재배하고 하면서 농경을 익혔겠다. 그렇게 자연에서의 생존방법을 익히며 살다 어느 날 갑자기! 만물의 영장으로 껑충 성장해버린 것을 알게 된 인간들, 사람으로 태어나서 자신의 가치와 실체를 비로소 새롭게 발견하게 된다. 이때가 인간비극이 시작된 때이다.

진시황은 통치기간 중 민심을 어지럽히는 술사(儒生이 아니다!) 수백 명을 생매장하고, 분서[(焚書:종이가 아니라 죽간(竹簡)이다)]를 통하여 문자와 도량형을 일통(一統:통일이 아니다)시키고, 백성을 검수(黔首)로 호칭하는 등 땅 위의 모든 것을 개혁해 나간다. 더욱이 시간(時間)까지 지배하려했는지, 한 해의 시작을 10월로 정한다. 북방민족의 경우 10월은 겨울이 시작되는 달(月)로써, 인간 생존을 위한 자연과의 투쟁과 개척 등 아주 몹쓸 기억이 되살아나는 때이다. 진나라는 본래 대륙의 서북쪽에서 시작한 나라이다.

진(秦)나라의 첫 번째 황제, 즉 진시황(始皇帝)은 자신의 당대(當代)에 이룩한 천하일통(天下一統)을 확인할 겸 제국의 안정화 작업의 일환으로 순행을 다닌다. 여섯 번째 마지막 순행 중 병사(病死)하는 것으로 순행을 끝내지만, 이 때 매우 중요한 사건이 일어난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단순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동방(함양, 진나라 수도, 서안)의, 지금의 산둥 반도 인근에 터를 잡고 있던 술사 서복(徐福)이 황제의 지원을 받아 동해(황해) 멀리 있다는 삼신산에 가서 불로초를 구해온다 하고 출발한다. 그것도 두 번째 떠날 때는 동남동녀를 수백 명 선발하여(안돌아올 생각으로) 배에 태우고 떠난다.

또 하나, 이 당시 장강(양자강) 남쪽(越國)은 사람 살기가 힘들 정도로 기후가 고온다습했다고 하는데, 이 지역을 개척하기 위해서 진나라는 유형수, 적국의 포로 등을 대거 투입했다. 동쪽 포로는 서쪽으로 북쪽 포로는 남쪽으로 뿔뿔이 흩어놓는다. 대규모의 인간비극이 일어난 것이다.

한강문화권역에서(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최초의 재배에 성공한 단립벼(쌀)가 요동반도, 산둥 반도로 전파되었는데(《한국민족의 기원과 형성》, 신용하), 이렇게 황하 유역에 선진농경문명을 전파해준 사람들이, 한족(漢族)과의 투쟁에서 밀려나고 전쟁에서 지는 바람에 대거 장강 이남으로 강제 이주(《사기》, 사마천) 당할 때 이들이 볍씨만 가져갔겠는가. 문명과 문화, 관습과 종교까지 함께 따라갔겠다. 이걸 영화 ‘동방불패’와 오버랩하면 재미와 아울러 한층 이해(?)가 빨라진다.

우리나라의 전북 삼례에는 ‘진씨(秦氏)’가 살고 있다. 남방의 장례습속인 옹관묘가 전남지역 특히 나주에서 발견됐다. 경북 주왕산 인근에는 ‘진나라의 폭정을 피해 온’ 사람들이라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제주도에는 서귀포(西歸浦)가 지명으로 남아있는가 하면, 일본 열도에서는 흙과 돌을 만지작거리던 사람들이 갑자기 선진문명(청동기, 철기) 시대로 휙 넘어간다.

불로초는 당연히 못 찾았지만, 그대로 돌아갔다가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을 뻔히 알고 있는 서복은 아예 중원(中原:황하유역)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동경로에 따라 동북아 구석구석까지 선진문화를 전파한 선구자로써 기록되어야 마땅하다.

얼마 전 패망한 월남에서 보트피플 사태가 일어났었다. 이들은 서복처럼 사전준비가 전혀 돼있지 않았던 사람들이다. 인간들이 빚어내는 비극의 형태가 참으로 다양하고 번잡(?)스럽다. 이후 19세기에 와서 구소련에 의해 고려인들이 연해주에서 부터 강제이주 당한다. 죽지 않고 살아남는 게 기적일 정도로 벌레취급을 받으며 혹사당한다. 그런데! 꼭 그 때처럼 그 때도 볍씨를 간직했고 그 땅에서 살아남아 고려인의 전통과 문화를 이어나갔다. 그나마 그때는 대륙이 열려있었을 때이다. 또 그 짓을 되풀이해야 된다면 이제 남은 방향은 해로(海路) 뿐인데, 보트를 한척 준비해놔야 할까? 아니면 잠수복이라도 챙겨놔야 할까? 체온 유지를 위해, 술도 쫌 준비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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