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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천만칸 집을 지을꼬(1)

차동영의 唐詩 시리즈 ② 詩聖 杜甫

언제나 천만칸 을 지을꼬(1)

詩聖 두보와 唐詩

◈ 두보(杜甫)

두보(杜甫, 병음 Dù Fǔ 712~770)는 중국 당나라 때의 시인이다. 자는 자미(子美) 호는 소릉야로(少陵野老). 출생지는 중국 허난성(河南省) 궁현(鞏縣)이다. 중국 고대 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시성(詩聖)이라 부르며, 그의 작 품은 시사(詩史)라 부른다. 이백과 함께 이두(李杜)라고도 일컬으며, 그 당시 정의가 없는 경제구조로 고통 받는 민중들의 고단한 삶을 시로 묘사한 민중 시인이다.

◇대표작《北征》《秋興》《三吏三別》《兵車行》《麗人行》등이 있다. 그 밖에 북송(北宋) 왕수(王洙)의《杜工部集》20권과 1,400여 편의 시, 그리고 소수의 산문이 전해진다. 주석서(註釋書) 중에서는 송의 곽지달(郭知達)의《九家集註》는 훈고(訓詁)에 뛰어났으며, 청(淸)의전겸익(錢謙益)의《杜詩箋注》는 사실(史實)에 상세하며, 구조오(仇兆鰲)의《杜詩 詳註》는 집대성으로서 편찬하였다.

◇ 인생 두예의 13대손으로 소릉에 거주했고, 조부는 두심언(杜審言)이다. 과거 급제 직후 공부원 외랑이 되었기 때문에 ‘두소릉’, ‘두공부’라고도 불린다. 중산 관리 계급의 아들로 허난 성의 공의(巩義, Gǒngyì) 필가산 아래 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본래 유가(儒家)로서 정치에 몸담고자 했으나 여러 가지 요인으로 말미암아 결국 시인의 길을 가게 되었다. 두보가 처한 시대는 당나라가 찬란한 번영을 구가하다가 안사의 난을 맞아 제국의 붕괴위기를 맞았던 때였다. 그의 생애는 크게 보아 755년에 발발한 안사의 난을 중심으로 전 후반으로 양분된다. 안사의 난 이전, 그는 당대의 다른 시인들처럼 독서와 유람으로 견문을 쌓아 착실히 벼슬에 나아갈 준비를 하였다.

735년 진사시험의 낙제는 그에게 그다지 큰 영향을 주지 않았다. 24세 때 진사시험에 낙방한 후 곤주사마였던 부친을 따라 산둥에 가서 이백, 고적(高適) 등과 함께 자연을 즐기고 시를 읊으며 친교를 돈독히 했다.

746년 이후 두보는 거처를 장안(長安)으로 옮겨와 고위 관리에게 벼슬을 구하는 간알시(干謁詩)를 써서 보내며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고자 애썼다. 이러한 생활이 10년간 지속되면서 두보는 점차 경제적으로 열악한 상황에 놓였고 당시 귀족들의 사치와 민중들의 궁핍한 삶을 절감하기 시작했다.

751년,《삼대예부》를 조정에 바쳐 인정을 받아, 755년 10월에 우위솔부 주조참군의 벼슬에 올랐다. 그는 10년간 벼슬에 오르기 위해 노력한 결과로, 무기의 출납을 관리하는 우위솔부주조참군(右衛率府冑曹參軍)이라는 미미한 벼슬을 받고 스스로 낭패감에 휩싸였다.

이로부터 한 달 뒤인 11월, 당 왕조를 거의 멸망시킬 만큼 파급력이 대단했던 안사의 난이 발발한다. 이때 당의 현종이 양귀비와의 사랑에 빠져 정치를 게을리 하여 국운이 쇠퇴했는데, 이런 나라의 형편을 읊은 장편 시《영회》는 걸작으로 유명하다. 안녹산의 난이 일어나자, 현종은 촉으로 피하고 숙종이 즉위하였다. 두보는 잠시 장안 근처 부주(鄜州)에 맡겨 둔 가족을 만나러 갔다가 어린 아들이 먹지 못해 요절한 사실을 알고 참담한 마음으로 장편 시 <장안에서 봉선으로 가며 회포를 읊어(自京赴奉 先縣詠懷五百字)>를 남겼다. 벼슬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자신을 돌아보고 당시 귀족들의 사치와 민중들의 궁핍한 처지를 그렸으며 총체적인 사회의 부패상을 고발했다.

이후 두보의 삶은 이전과는 크게 달라진다. 당시 전란의 와중에 현종(玄宗)은 사천으로 피난 가고 숙종(肅宗)이 영무(靈武)에서 임시로 즉위한 사실을 알고 이를 경하하기 위해 영무로 가던 중 반군에 붙잡혀 장안으로 호송 되어 얼마간 억류되었다. 이때 우리에게 잘 알려진 <봄의 전망(春望)>을 썼다. 757년 2월, 숙종이 행재소를 봉상(鳳翔)으로 옮겼을 때 두보는 위험을 무릅쓰고 장안을 탈출하여 숙종을 배알하여 그 공으로 좌습유(左拾遺) 벼슬을 받았다.

그러나 곧 반군 토벌에 실패한 방관(房琯)을 변호하다 숙종 의 미움을 사게 되고 그것은 곧이어 파직으로 이어졌다. 화주사공참군(華州司功參軍)으로 좌천된 두보는 벼슬에 적응하지 못하고, 마침내 관직을 버리고 진주(秦州)행을 감행한다. 두보의 대표적 민중의 시로 알려진 이른바 <삼리(三吏)>와 <삼별(三別)>이 이즈음에 지어졌다.

그 후 그의 시는 비장함을 더하는 변화를 보였다. 황제의 피난지에 있다가 집으로 돌아갈 때 지은 장편 시《북정》은 그의 최고 걸작이다. 759년 두보는 진주에서부터 여러 지역을 전전하여 청두(成都)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두보는 친구들의 도움으로 초당에 거처를 마련하고 나 중에는 엄무(嚴武)의 추천으로 막부(幕府)에서 검교공부원외랑(檢校工部員外郞)이란 벼슬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여기에도 잘 적응하지 못했으며, 엄무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두보는 성도를 떠나 운안(雲安)을 거쳐 기주(夔州)에 이르게 되었다. 기주는 성도에 비해서도 더욱 낯선 곳이었지만 비교적 물산이 풍부했던 이곳에서 두보는 어느 정도 심신의 안정을 찾고 시가 창작에서도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이때의 대표작으로 <가을날의 흥취(秋興八首)>를 꼽을 수 있다. 파란만장했던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풍요로웠던 과거와 일순간에 일어난 전란을 지극히 미려한 언어로 수를 놓듯이 새긴 이 시는 율시(律詩)가 이룩한 미감의 정점을 보여준다. 그러나 두보는 기주 생활에 결코 안주하지 못했다.

중앙 정부에서 벼슬하리라는 희망을 끝내 놓을 수 없었기에, 768년에 협곡을 빠져나가 강릉(江陵)을 거쳐 악양(岳陽)에 이르렀다. 이후 그의 생활은 주로 선상에서 이루어졌고 건강이 악화되고 경제적으로 궁핍한 가운데, 악양과 담주潭州 사이를 전전하다 뱃길에서 770년 58세로 일생을 마쳤다.

◇ 작품 특성과 후세의 영향

그의 고시에는 현실을 심각하게 묘사한《병거행》등 작품이 적지 않은데, 시로 엮은 역사라는 뜻에서 ‘시사’라 일컫는다. 그는 율시를 완성하고 종래 문학 전통의 집대성이라는 형식으로 서정시·서사시를 창조하였다.

그의 시 작품과 시풍이 한국에 미친 영향은 크다. 고려 시대에 이제현(李齊賢)·이색(李穡)이 크게 영향을 받았고, 중국인 채몽필(蔡夢弼)의 저작인《두 공부초당시전(杜工部草堂詩箋》, 황학(黃鶴) 보주(補註)의《두공부시보유(杜工部詩補遺)》등이 복간(複刊)되었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 그의 작품이 특히 높이 평가되었는데,《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가 5차례나 간행되었고, 성종(成宗) 때는 유윤겸(柳允謙) 등이 왕명을 받아 그의 시를 한글로 번역한전역서(全譯書)《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杜詩諺解)》를간행하였으며, 또 이식(李植)의 저서《찬주두시택풍당비해(纂註杜詩澤風堂批解)》 26권은 두시(杜詩)가 한국에 들어온 이 후 유일한 전서(專書)이다. 현대의 것으로는 이병주(李丙疇)의《두시언해비주(杜詩諺解批註)》1958, 양상경(梁相卿)의《두시선(杜詩選)》1973 등이 알려져 있다.

<다음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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