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의 음주문화와 알코올정책(上)

멕시코의 음주문화와 알코올정책(上)

 

조성기 경제학박사 (趙聖基, Surnggie Cho, PhD. of Economics.

                         MPH. 한국대학생알코올 문제예방협회, 회장)

 

멕시코의 음주문화 이야기는 ‘코로나’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코로나 바이러스와는 무관하지만 이름이 같은 바이러스 때문에 금년 4월 이후에 코로나는 생산중단 상태다.

멕시코의 주류사 구루뽀모델로가 코로나를 생산한다. 주 제품인 ‘코로나 엑스트라’는 미국시장의 수입맥주 중 판매량 1위다. 멕시코에서 최대 맥주인 것은 물론이다. 세계 150여 개국에서 판매되는 유명한 맥주다.

멕시코 음주문화의 전체상을 알기 위해 세계보건기구의 음주소비 데이터부터 찾게 된다.

음주자와 규제정책, 역사

1960년대 이후 멕시코의 음주량은 1인당 순수 알코올 3ℓ 내외에서 7ℓ 가깝도록 꾸준히 증가했다. 적지 않은 양이다.

우리나라는 현재 1인당 9ℓ 내외인데 오랜 기간, 즉 40여년 정도 비슷한 수준에 머물고 있다. 꾸준히 순알코올 음주량이 유지되는 나라와 그 양이 증가하는 나라는 다르다. 늘어날 때 자연 알코올문제가 늘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2010년에 1인당 알코올 소비량 6.7ℓ로 적지 않은 양이다. 하지만 미주 지역 전체의 평균 8.2ℓ에 못 미치고 있어 숫자로 볼 때 총량이 아주 많은 나라에 속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음주자를 기준으로 측정한 ‘순알코올 음주량’은 남성이 19.7ℓ, 여성은 7.1ℓ, 양성을 모두 합칠 때 15.3ℓ다. 적은 량이 아니다. 남성의 56.4%, 여성의 29.4%가 지난 1년간 음주자다. 적어도 42.7%의 멕시코 인구가 술을 마시고 있고, 그 음주량이 많다. 또한 여성의 음주자가 그렇게 늘어난 것은 과거의 멕시코와 비교할 때 아주 큰일이고 변화다.

그 결과로 조사된 15세 이상 음주자 기준 과음자는 남성이 54.2%, 여성아 20.8%다. 역시 상당한 수준이다. 15-19세의 청소년들의 경우는 더 많다. 남성 청소년 과음자가 59.8%, 여성은 24.2%다. 만만치 않은 수의 청소년들이 과음내지는 폭음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왜 이런 결과가 나타났을까?

그 이유는 멕시코의 역시 오랜 음주문화에서 찾아야 한다. 즉 멕시코인들은 술에 대단히 친화적인 음주문화를 가지고 왔다. 지금도 그 경향성은 불변이다. 그 때문에 멕시코는 알코올규제정책이 그다지 강력하지 않다고 보면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나라와 비슷하다. 음주 금지연령은 다른 나라들처럼 18세다. 그렇지만 광고나 스폰서십 규제가 있는 정도이고 판촉에 대한 규제는 없다. 경고표시 문구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치료보다 지역사회에서의 예방활동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는 상황이다. 그 점은 우리보다 낫다고 보아야 한다. 우린 예방에 거의 신경을 쓰고 있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 아니던가.

그 차이를 이해하자면 멕시코시티에 있는 ‘기억과 관용의 박물관(Museo Memoria y Tolorancia)’에 가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와 멕시코는 차원이 다르다. 넓고 싶다. 그들은 문제를 예방하기 위한 정보를 글로벌 차원에서 근본적으로 다룬다. 미국의 불법체류자 문제가 되고 마약으로 유명한 멕시코 인이 그 같은 문화의 깊이를 보인다는 것을 이해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멕시코시티 외곽에 있는 인터스텔라 도서관도 마찬가지다. 나이 인종 국적을 넘어서는 열린 도서관이 멕시코에 있다면 과연 그들이 추구해 온 가치가 그렇게 간단치는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멕시코의 음주문화에서 매그웨이(용설란)나 아가베를 빼놓을 수 없다. 멕시코의 역사와 함께 중요한 역할을 해 왔기 때문이다. 용설란으로 발효주를 만들었다. 알코올 농도 5-6도짜리인 뿔케(Pulque)가 가장 오랜 전통 음료다.

마셔보면 걸쭉하게 막걸리보다 점성이 있지만 순하게 느껴진다. 여러 가지 과실을 섞어서 식당에서 제공된다. 그렇지만 멕시코시티의 어떤 식당에서나 쉽게 마실 수 있는 술은 이제 아니다. 뿔케는 꿀물 ‘아구아미엘’로 만든다. 매그웨이의 속에서 추출한 설탕물이 아구아미엘이다. 아구아밍엘을 발효한 것이다.

뿔케는 단백질과 비타민이 풍부한 불투명한 우유색 술로 알려졌다. 망자의 날에 마시는 술로도 유명하다. 고추, 정제하지 않은 설탕, 익힌 옥수수, 과일 속, 향료 등이 첨가된다. 이 첨가물들로 인해 알코올 농도를 조금 더 강해진다.

테킬라와 메스칼는 알코올 농도 40도 정도다. 독한 술이다. 용설란을 으깨 15일 발효 시킨 후 증류하면 테킬라나 메스칼이 만들어진다. 우리에게 가장 알려진 술은 테킬라다. 메스칼은 스모키향이 나고 싱글 몰트와 비슷하다. 둘 다 매그웨이로 만들지만 원료가 되는 부위나 제조과정이 조금씩 다르다. 메스켈른 머리 부위를 주로 사용한다. 멕시코 사람들은 “나쁜 일이 생기면 메스칼을 마셔라. 좋은 일도 마찬가지다.”라고 외친다. 그 말대로 좋으나 싫으나 술을 마신다.

따지고 보면 뿔케는 전통주에 속하고 멕시코의 국주는 테킬라와 매스켈이다. 우리는 전통주를 국주라고 생각하지만 그들은 그를 구분한다. 일본도 사케를 국주이자 전통주라고 한다. 멕시코는 그것을 구분하는 셈이다.

식민지 역사가 멕시코에 미친 영향이 너무나 컸다. 술도 마찬가지였다. 역사적으로는 멕시코의 국주는 스페인 정복자들이 증류기술을 가지고 건너왔을 때 시작되었다. 스페인인들은 증류기술을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한 무어인으로 부터 배웠다. 스페인인들은 전염병을 가지고 들어와 멕시코인의 90%를 소멸시켰다고 의학사에 적혀있다. 그와 함께 독한 술을 가지고 들어어멕시코인들의 혼을 빼기 시작했다.

멕시코인들의 관습과 의례 속에 깃든 음료는 사실상 뿔케다. 그 뿔케는 이제 대도시인 멕시코시티의 일반음식점에서 찾기 쉽지 않다. 특별히 뿔케 파는 음식점이 있다. 하지만 지방에 가면 일반적으로 마신다. 뿔케는 히스페닉 문화가 들어오기 이전 종교적 신념이나 행사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7세기에 테오티우아칸 몰락 후 아즈텍 제국의 선조가 된 톨텍 문명이 있었다. 뿔케는 톨텍 문명 보다도 1500년쯤 전에 멕시코에 있었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스페인인들이 들어오기 이전 멕시코에서는 술을 아무나 마실 수 있는 음료는 아니었었다. 술 제조장이 히스패닉 문화가 출현하기 전에 여기저기 많았다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적어도 스페인 시대 이전의 음주는 의식과 관련이 있었다. 그러므로 노인들, 현자들, 상류층 등이 주로 마신 것으로 보인다.

평민 중 음주가 가능한 이는 ‘임신한 여성’이었다. 지금은 이상한 일이지만 음주가 임신여성의 피를 강하게 한다고 믿었다. ‘고된 노동으로 탈진한 청년들’이나 남성들에게 힘을 주는 경우 음주가 허용되었다. ‘신에게 바치는 경우’는 물론이고, ‘축하할 큰 일’이 있을 때, ‘특별한 기념일’에, ‘풍요를 기원할 때’ 술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만취는 큰 악행으로 간주되었다. 습관적으로 만취하는 이는 마을을 망치는 이로 치부되었던 것이다. 심지어 ‘성직자’나 ‘처녀’가 취하면 사형에 처해졌다.

멕시코인들은 술이 ‘위대한 문명도 파괴하는 힘을 가졌다’고 믿었고 전설이 있다. ‘빛의 신’ 케짤코틀(Quetzalcoatl)은 톨텍(Toltec) 시민들에게 스스로 신성을 부여할 수 있는 특별한 혜택을 주었다. ‘어둠의 신’인 테즈칼트리포카(Tezcaltlipocar)가 이를 질투했다. 복수로 테즈칼트리포카가 케짤코틀을 취하게 했다. 취한 케잘코틀은 부끄럼을 잃었다. 옷까지 찢으며 춤을 추었다. 술에서 깨어난 후 빛의 신은 수치심에 못 이겨 톨텍을 떠났다. 그 후 톨텍은 멸망했다. 이것이 멕시코의 최고 문명 중 하나였던 톨텍문명이 ‘술 때문에 파괴되었다’는 신화다. 그 멕시코인 들이 과음을 멀리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멕시코의 음주문화는 식민지 시대 이후 본격적으로 크게 달라졌다. 신성한 술이 취하는 술로 변했던 것이다.

1524년 초 스페인의 필립2세는 인디안 들에게 술 판매를 금지했다. 인디안 마을에는 술의 진입조차 막았다. 스페인인들이 멕시코인 들을 위해 그리 한 것은 아니었다. 뒤에 물론 꼼수가 있었던 것이다. 스페인 국왕이 술의 생산과 유통을 통해 돈을 벌려는 속셈이었다. 술은 신의 물질인데 정치가들은 어디나 돈 줄로 생각한다. 스페인 통치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돈줄이 수단은 예외 없이 면허제와 주세였다.

식민지 기간 동안 국왕은 와인이나 맥주를 만들기 위해 포도나 보리를 경작하거나 주류제조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흑인노예를 들여오는 데에 대해 면허를 주고 세금을 받았다. 술과 관련된 수입은 왕가의 큰 수입원이었고, 그 대행자인 식민 통치자들에게는 통치자금이 되었다. 통치를 당한 멕시코인 들에게는 눈물이었다.

히스패닉이 들어오기 이전의 음주 관습은 고대의 전통대로였다. 인디언들은 술의 효능을 신이나 뿔케의 탓으로 돌렸다. 인간에서 술을 분리하고 신과 뿔케의 권능을 동일시 한 것이다. 그들은 술이 우리 인간과는 판이하게 다른 존재라고 생각했다.

1717년 경 북부에 멕시코 최초의 대규모 포도밭이 생겼다. 스페인인들은 여러 가지 규제를 가했는데 그 이유는 당연히 와인을 독점생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규제는 효율적이지 못했다. 신에게서 인간에게 옮겨가자 술의 그 힘을 통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포도밭이 멕시코 전체로 늘어났다. 그 속도가 무서워 한때 주조를 금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금지는 통치자에게도 음주자에게도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와인, 테킬라, 매스칼 생산은 다시 허용될 수밖에 없었다. 규제와 허용이 오락가락하고 변화무쌍했다.

모두 멕시코인 들의 건강이 기준이 아니라 왕가의 이익에 의해 정책이 좌지우지되었던 것이다. 알코올 정책에 대한 정책철학이 없는 상황이 되었다. 작금의 우리나라 술 정책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21세기 한국의 알코올 정책에 시사 하는 바 크다.

독주인 매스칼은 인디언들이 주로 마셨다. 음주 이유는 과로를 잊기 위해서였다. 결국 비참한 근로조건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던 것이다. 금주령은 대체로 경제적인 이유로 일시적으로 강제되었던 것이다. 도덕이나 예법을 표면상 내세운 것은 무마용이자 단순한 핑계일 뿐이었다. 게다가 금주의 대상은 주로 인디언이고 신분 상 평민들이었고 통치자들이나 상류층은 계속 마셔 댔었다.

스페인에서 독립한 후에도 알코올 정책의 추진은 주로 경제적인 이유였다. 이제 술이 신의 영역에서 정부의 영역으로 이사를 해 간 것이었다. 식민지는 멕시코인 들의 술도 신도 완전히 파괴한 셈이다. 1822년에 뿔케, 와인, 증류주 등 모든 술에 과세를 시작했다. 멕시코 제 1제국이 성립한 시기다.

식민지 시대 끝없이 늘어난 과음하는 음주태도는 이제 멈추기 어려웠다. 재무당국의 수입이 끝없이 늘어났다. 술 남용도 규제하기가 어려웠다. 술을 장악한 정부도 돈 맛을 보자 규제를 할 이유도 없었다. 주세 이외에도 면허제. 술집에서의 규제, 판매 제한 등 다양한 포고, 금지, 규제 등을 시도했다. 하지만 규제는 주세수입을 위해 정부가 쥔 칼이 되었고 알코올 중독을 줄이기 위한 칼은 뒷전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알코올 건강정책에는 특별한 의지를 보이지는 못했다. 차라리 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할 일이 되었다.

1800년대 말의 멕시코 정부는 음주에 대해 친화적 경향성을 보였다. 본색을 드러낸 것일 뿐이었다. 그러자 뿔케 농장, 포도밭 등 원료분야, 테킬라와 맥주 산업 등 제조업이 모두 번성했다. 1878년의 포고문을 읽어 보자. ‘경찰이 만취자를 끌고 갈 수는 있다’고 규제했는데 그 정도는 ‘스스로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취했을 경우’에나 해당되었다. 최소화 시킨 것이다. 음주 친화적 상황은 1900년대 초까지 계속되었다.

연구자들만 달랐다. 연구 자료를 찾아보면 정부의 관용이 문제라고 지적하고, 정부의 알코올 정책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보인다. “알코올중독을 없애려고 노력하지 않을 경우, 그 노력을 멈출 경우 우리의 사회구조는 해체되고 말 것”이라고 적혀있다.

멕시코 혁명이 일어나자 상황이 바뀌었다. 이 같은 상황을 반전시킬 음주억제법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도 특별한 변화가 1932년까지는 없었다. 그 때 반 알코올 캠페인이 시작되었다. 그만해도 사실 우리나라 상황보다는 훨씬 우수하지 않은가. 1932년경 한국은 일제강점기다. 슬픔에 찬 조선 사람들은 무진장 마셔댔다. 그때 일본인 들은 연속식 증류시설이 들여와 싼 소주를 마구 생산하기 시작하지 않았던가. 우리나라 정부가 공식 음주예방 캠페인이 제대로 시작된 것은 2006년에 와서다. 아직도 형식적이지만 말이다.

1940년대에는 국회가 새 규제를 결정했다. 알코올 판매에 규제를 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1960년대가 되면 새 술집 면허를 5년간 금지했다. 위생 상태를 빌미로 이미 운영 중인 술집을 폐쇄하기도 했다. 1970년대에 되면 대통령의 공식 리셉션에서 과일 음료만 제공하도록 바뀐다. 혁명정부의 음주통제는 의미 있게 추진되었다. 1980년대에는 국가적인 반 알코올위원회가 구성된다. 알코올 정책에 대해 연구계획도 세우고 다양한 기관들이 술 문제를 줄이도록 노력하게 했다.

<다음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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