茶山 정약용의 술 취해 부르는 노래(醉歌行)

박정근 칼럼

茶山 정약용의 술 취해 부르는 노래(醉歌行)

박정근(대진대 교수, 윌더니스 문학 주간, 소설가, 시인)

 

실학자로 알려진 정약용(1762~1836) 선생이 걸출한 취가행(醉歌行)을 썼다는 것은 다소 의외라는 느낌이 든다. 그는 출중한 학식과 재능을 겸비한 나머지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신유사옥으로 강진으로 유배를 당하는 당했을 뿐 아니라 피폐한 농촌에 대해 심각한 문제의식을 가진 대학자였다.

부패한 현실을 부정적으로 보고 사회개혁을 추구하기 위해서 실학을 추구하는 민중주의적 사상을 지녔다고 본다면 그가 술을 가까이할 만한 근거로서 충분하다고 본다.

조선사회는 성리학에 뿌리를 두고 양반과 관료들은 허례허식에 지나친 관심을 두면서도 피폐한 민중들의 삶을 돌보지 않았다.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지식인인 정약용이 아마도 동일한 문제의식을 가진 동지와 마주 앉았다면 자연스럽게 술이 나오지 않았겠는가.

그들은 술을 마시면 더욱 대화는 깊어졌을 것이고 취할수록 병든 조선사회에 대해 미치도록 고민에 빠졌을 것이다. 그들의 미친 듯한 사회비판과 분노는 더 많은 술을 마시도록 이끌지 않았겠는가.

정약용은 <술 취해 부르는 노래(취가행)>의 일연에서 “긴긴 날에 한 동이 술/마주 대한 두 광객/마시면 미치고 미치면 더 마셨노라/재물 많은 부자가 더 많은 재물을 탐하듯이/묻노라 그대 무슨 일로 미치는가”이라고 노래하고 있다. 그 내용은 술을 좋아하는 두 대장부가 서로 미치도록 술을 마시는 연유를 묻고 있다.

일단 시인은 술을 마시는 연유를 인생의 허무함에서 찾고 있다. 세상에 대해 큰 뜻을 품은 영웅호걸이라 할지라도 인간인지라 한 번 가면 돌아오지 못할 죽음의 세계로 떠나는 운명에 놓여있다. 시인은 자신을 포함한 영웅호걸들이 한 번 죽으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실존적 존재이지만 우주를 상징하는 하늘과 해와 달은 영원하다는 것을 인식한다.

인간이 필멸의 존재인데 반해 우주와 세계는 영원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시인으로 하여금 인간에 대한 비극적 현실을 인식하게 한다고 볼 수 있다.

시인은 2연에서 “높고 넓은 저 하늘을 보라/서쪽으로 해가 지면/동쪽에서 달이 뜨나니/지고 뜨고 또다시 지고 뜨지만/그 사이에 영웅호걸은 한번 가면 돌아오지 못하노라/경도선 사만 오천리/위도선사만 오천리”라고 노래한다. 정약용이 위대한 학자임과 동시에 시인적 기질을 농후하게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시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정약용 묘

인간은 세상에 태어나서 한 바탕 놀다가 가는 존재라고 시인은 생각한다. 놀이판이란 노래하고 춤을 추며 사랑도 하면서 신명을 돋우는 시공간을 의미할 것이다. 개별적 인간들은 놀이판을 통해서 단독자의 경계를 허물어 뭇 사람들이 하나가 되는 곳이다.

분열된 단독자들이 모여서 술에 취해 노래와 춤을 즐기며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는 확장적 세계가 바로 놀이판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인간이 벌이는 놀이판의 기본적 결실은 아무래도 사랑이 농축된 가족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가족공동체를 통해서 사랑을 느끼고 확인하는 경향이 있다. 문제는 사랑을 주고받는 시간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다.

세상을 호령하는 호걸이라 할지라도 언젠가는 모든 인연들을 뒤로 하고 떠나야 되는 필멸의 운명을 피할 수 없다.

정약용은 이런 비극성에 대해서 “이 속에 한바탕 놀이판 벌이고/뭇 사람들 어지러이 노는데/금방 크게 드러나서 신명나게 놀다가도/적막하게 한 번 가면/다시는 오지 못하고/곱고 예쁜 처자식도 영영 잃게 되나니/적막하게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 있으랴”라고 한탄하고 있다.

정약용의 시적 비극성은 앞으로 다가올 필멸의 운명을 서러워하기보다 선행적으로 미래의 죽음의 시공간에 서서 이승을 바라보는 차원으로 승화시킨다. 아무리 영웅호걸이라고 하더라도 일단 죽음의 세계로 가버리면 이승의 영화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죽음의 경계를 넘어가면 이승의 영화와 권력이 무상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다. 시인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는 상호 불가역적이라서 오직 한번만 허용될 뿐이다. 저승으로 간 존재는 이승에서 즐길 수 있는 백말의 술, 수십 마리의 말, 천금이 있다고 하더라도 접근이 허용되지 않는다.

더더구나 농부가 농사를 지으려고 무덤을 쟁기로 갈아엎어도 무덤에 묻혀있는 망자가 어찌할 수 없으리라는 비극적 상상을 한다. 이것은 인생의 비극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시적 상상력을 통해 재현하는 전략이 아닐 수 없다.

시인은 4연에서 “백말의 술이 있어도 마실 수 없고/수십 마리의 말이 있어도 탈 수가 없고/천금이 있다한들 만져볼 수 없어라/농부가 소를 끌고 와 무덤을 갈아엎어도/벼락같은 소리를 질러서 꾸짖을 수도 없으리”라고 슬퍼한다. 정약용은 시를 통해서 이승과 저승의 경계선을 시적 상상력을 통해 넘나들며 인생의 한계를 서러워하는 것이다.

정약용은 시인으로서 인생의 비극성에 대한 재현을 통해 인간과 술의 유기성을 드러낸다. 즉 인간의 비극적 운명이 시인으로 하여금 평정심을 잃게 하고 광증으로 몰아간다고 본다.

그는 인간의 비극성을 깨닫는 자야말로 바로 그의 친구라고 토로한다. 시인은 인간의 비극적 관점을 공유한 친구와 술을 무한대로 마시자고 청한다. 그는 마지막 연에서 “성인이 빨리 될 수 없다면/그 본성을 잃을 수밖에/그 본성을 잃었다면 너 또한 미친 것이고/네가 미쳤다면 진정 나의 벗이거니/우리 함께 십만 잔을 마셔보기 않겠는가”라고 시를 마무리하고 있다. 정약용은 스스로 겸손한 자세를 취하여 자신이 성인의 단계에 도달할 수 없으므로 인간의 비극성을 극복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인간의 비극성이야말로 시인을 인간의 운명을 한탄하며 미칠 수밖에 없으며 그와 함께 십만 잔이라는 술을 거하게 마시자고 청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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