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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잔과 반잔의 철학

빈 잔과 반잔의 철학

임재철 칼럼니스트

기업에 있을 때 골프선수 최경주의 초청강의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가 전해주었던 철학은 세 가지다. 그의 고향 완도에서 암벽을 타며 한걸음씩 올라가야 했다는 바로 ‘계단의 철학’이다. 또 하나는 ‘빈 잔의 철학’으로 내 마음의 잔을 비워야 다른 것을 넣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빈잔’은 낮춤이고 겸손이라고 강조했고, 그러면서 ‘잡초의 철학’을 설파했다. 온실보다는 잡초의 생명력이 훨씬 강하다는 것을 배웠다며 그렇게 골프 선수의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즉 그의 인생철학은 빈잔, 계단, 잡초인 셈이다.

잘 얼려진 대로 최경주의 애창곡은 언제나 ‘빈잔’이다. 잔을 비움으로써 새로운 것을 원할 수 있다는 의미라 하겠다. 최경주는 평소 “올라 갈 때도 한 계단씩, 내려 갈 때도 한 계단씩 밟는다”며 계단 철학 배경을 설명했다.

한꺼번에 모든 걸 얻을 수 없고 조금씩 성취해 나가는 그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잡초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꿋꿋함이다. 온갖 역경에 굴하지 않고, 긴 생명력을 지닌 잡초 같은 근성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최경주 선수는 잔을 채울 때보다 비울 때가 더 아름답고 빈 잔의 여유를 보라고 그런 교훈을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 험난한 경쟁 관계의 골프 세계에서 마음을 비우고, 조급함을 버리고, 그리고 집착을 버리고 정상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최경주의 철학이 얼마나 많은 것을 담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우리가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무언가에 자꾸만 집착해 갈 때, 삶이 허무하고 불안하여 믿음이 가지 않을 때, 빈 잔의 철학은 자신의 비움을 돕는 방법이 될 것이다.

인간이 어떤 계획을 세우면, 신은 비웃는다고 했다. 내일 일을 어찌 알겠나. 인생이 계획대로 흘러간다면 좋겠지만 사는 게 어디 그런가. 그래도 칠흑 같은 인생행로에 방향은 잡아야 할 것 아니겠는가. 비록 도돌이표가 거듭되는 ‘링반데룽(Ringwanderung)’ 일생일지라도 말이다.

코로나19로 다사다난 했던 사계절이 지나고 새봄이 찾아왔다. 연초 세운계획들을 잠시 돌아본다. 작심삼일이라고 무너져버린 것이 많다. 하지만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 시작한다. 젊을 때는 성취 지향적 목표를 세웠지만 중년이 되면 대체로 스스로 삼가는 수양 지향적으로 변한다. 대표적인 것이 금주와 금연이다.

혹자는 말한다. 담배를 끊기는 쉬워도 술은 어렵다고. 고체인 담배는 가위로 싹둑 자를 수 있지만, 어디 술은 칼로 벨 수 있겠나 말이다. 그보다는 담배가 스스로 문제이라면, 술은 더불어 문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거리두기가 일상화된 시대 속에서 사회적 동물인 인간들이야 더더욱 외롭지 않겠는가. 그러니 ‘금주(今週) 금주(禁酒), 금년(今年) 금연(禁煙)’이라면서 애써 자신을 위로하는 것 아닌가.

다산 정약용은 술을 그다지 즐기지 않았던 모양이다.『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를 보면 자식들에게 술을 상당히 경계하는 내용이 있다. 그럼에도 정작 주량은 제법이었던 듯싶다.

다산이 벼슬하기 전이다. 중희당(重熙堂)에서 세 번 일등을 했다. 중희당은 정조(正祖)가 원자(元子)를 위해 세웠는데, 임금이 대대로 현명하여 태평성대가 계속된다는 뜻이다. 여하튼 다산은 옥(玉)필통 가득 담은 소주를 마시게 됐다. 그때 “나는 오늘 죽었구나” 했는데, 그다지 취하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다산은 “시권(試券)을 다 읽고, 착오 없이 과차(科次)도 정하고, 물러날 때 조금 취기가 있었다”고 자랑하고 있다. 대단한 술 실력이다. 그럼에도 자신이 반 잔 이상 마시는 것을 본 적이 있느냐고 묻는다. 바로 ‘반잔의 미학’이다.

본디 술 맛이란 입술을 적시는 데 있다고 했다. 소가 물을 마시듯 벌컥벌컥 마시는 사람은 절대 술 맛을 알 수 없다는 거다. 입술과 혀에 적시지 않고 바로 목구멍으로 들어가는데, 무슨 맛을 알겠느냐는 것이다. 사실 단맛 쓴맛 짠맛 신맛 모두가 혀에 퍼져 있는 미뢰를 통해 느끼는 것 아니던가.

그래서 술을 마시는 정취도 살짝 취하는 데 있다고 결론짓는다. 얼굴빛이 홍당무처럼 붉어지고 구토를 하고 잠에 곯아떨어진다면 술 마시는 정취가 없다는 것이다. 이태백도 ‘한 잔, 한 잔에 또 한 잔’을 읊었지만, 친구에게 “나 졸리니 그대는 가라”고 하지 않았나.

다산이 술을 경계한 것은 목민관으로서 자세가 몸에 뱄기 때문이리라. 낮술은 물론, 하루 일과가 끝난 후에도 술자리를 피하려 했던 듯하다. 이리저리 얽히고설키다 보면 청탁에서 자유롭지 않다. 술이야 청탁(淸濁) 불문이지만, 관리에게 청탁(請託)은 ‘김영란법’ 위반이다. 실사구시 주도(酒道)인 셈으로 다산의 시에 송강 정철의 서정(抒情)이나 이백의 호방함이 엿보이지 않는 연유일 거다.

‘반 잔’ 철학을 내세운 다산은 ‘뿔 달린 술잔’을 소개한다. 옛날 중국에서는 도자기 술잔에 한 번에 들이키지 못하도록 뾰족한 뿔을 달았다. 공자도 제자에게 각잔(角盞)을 권했다. 헌데 ‘반 잔’의 절제가 어려웠나. “뿔 달린 술잔이 뿔 달린 술잔 구실을 못하면 어찌 뿔 달린 술잔이라 하겠나” 탄식했다니 말이다.

술 이야기는 그렇고, 핵심은 ‘반 잔’이다. 제나라 환공이 늘 가까이 두었다는 ‘좌우명’도 그렇다. ‘각잔’과는 다르나 가득 차면 기운다는 점에서 경계하는 바는 같다. 술도 물도 가득차면 넘친다. 포부도 계획도 마찬가지이다.

정치도 그렇다. 반쯤 비었을 때 화합과 통합의 공간이 있다. 여유 없이 몰아붙이는 국정도 자칫 후회를 남기기 십상이다. 이미 가득하다면 비워야 바로 설 것이다. 노상 나뉘어 싸우는 정치권 모두가 ‘반잔의 미학’을 되새겼으면 좋겠다.

정의의 기치를 내걸고 옳고 그름을 명확하게 따지는 명분 위에 서서 촛불집회와 탄핵소추로 출범한 정권이 어느덧 만 5년을 향해 가고 있다. 개별 사안에 대해 성패를 논할 식견은 안 되지만, 안타까운 심정으로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그른 것을 비판하고 바로잡는 일에 참으로 큰 용기와 희생이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옳은 것을 주장하고 현실에서 관철해내는 일 역시 매우 많은 난관을 헤치고 나갈 지혜와 내공이 요구된다 하겠다.

그 과정에 옳고 그름의 기준이 다른 사람, 당연하게 누리던 것을 놓아야 하는 사람, 의도와 달리 예기치 못한 문제에 직면한 사람들 모두를 다 설득하며 나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옳으니 따라야 한다는 일방적인 주장만을 되풀이한다면 남는 것은 점점 더 극대화되는 분열과 반목뿐일 것이다.

길어지는 역병의 시대, 다들 지치고 인내심도 바닥이 나려한다. 이렇게나 답답한 시대이지만 봄기운이 물씬한 바람결 속에서 막연하게나마/이나마 최경주의 ‘빈 잔의 철학’과 다산의 ‘반잔의 철학’을 곱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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