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자리가 화해와 축제의 장이 되어야 하는 이유
박정근
(문학박사, 황야문학 주간, 작가, 시인)
술자리가 많은 필자는 다양한 사람과 술을 마신다. 술친구들의 유형은 인품과 성격에 따라서 천차만별이다. 그중에 가장 난감한 문제는 술자리에서 싸움을 거는 술꾼의 성격이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그가 결코 학식이 없다거나 반사회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불합리한 정치에 대해 매우 날카로운 시각으로 사회나 인간을 분석하기를 좋아하며 더 바람직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대안을 제시하는 능력을 가진 지식인이다. 게다가 그러한 이슈를 소설로 픽션화할 수 있는 문인이다. 또한 그는 호주머니에 돈이 있으면 지기들을 초대해서 기꺼이 술을 살 줄도 아는 호인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성격적으로 취약한 점이 있다. 너무 자주 화를 잘 내어 분위기를 썰렁하게 만들어버린다. 그의 불화산과 같은 성격은 필자를 매우 곤혹스럽게 하곤 한다. 그의 행위는 자신의 지성을 너무 과신한 나머지 쉽게 선과 악을 규정하는 것이 버릇에서 비롯된다.
설상가상으로 그런 버릇은 술자리에서 자주 등장한다. 부정적으로 인식된 이슈가 술에 취할 때 뇌리에 등장할 수 있는 환경이 되는 모양이다. 남을 공격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리면 심리적으로 남의 흠이 눈에 쉽게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공격성이 남에게 합리적이 되려면 화자에게 흠이 없어야 타당해질 수 있다.
요즘 필자는 술친구인 그를 술자리에 불러내는데 주저하고 있다. 그가 여러 술자리에서 모든 사람과 불화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친구들로부터 소외되는 모습이 너무 안타까웠다.
필자는 동료들에게 그를 문학모임에 불러들여야 한다고 수차례 설득을 시켰다. 그리고 술자리를 만들어 화해 주를 마시며 다시 한 번 좋은 우정을 나누자고 다짐했다. 하지만 비슷한 상황이 오면 특유의 공격적 언행이 다시 돌출되곤 했다. 누군가 말했던가. 타고난 성격은 평생 결코 고칠 수 없다고 말이다. 그가 지기들과 논쟁을 하는 동안 필자는 그의 정의는 과연 타당한 것인가를 생각하며 회의적인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그가 술자리에서 거의 싸움에 가까운 논쟁을 길게 하는 이유는 분명히 있다. 그에게는 남이 범접할 수 없는 승부사적 기질이 있다. 그가 전면에 내세우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상대방에게 결코 지지 않으려는 꼰대다운 고집이 이성을 마비시킨다. 그래서 취기가 적당히 차오르면 대들보와 같은 자신의 흠결은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대신 남의 바늘 같은 흠결이 대들보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논쟁이 발화되는 시점에는 함께 술을 마시고 있는 사람은 친구로 여겨지지 않고 적으로 여겨진다. 그는 모든 화력을 동원해서 공격적 논쟁에 불을 붙인다. 급기야는 이 논쟁의 전투가 끝나면 친구가 적으로 돌아설지라도 상관없다는 인식에 이르고 만다.
이런 증상이 술 탓이 아니라 분노가 조절이 안 되어 발생한다면 그 행위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사실 스스로 자신의 심리적인 문제를 인식하고 시인하면서 논쟁의 동기를 타인에게 돌리는 것은 아무래도 자기모순이 아닐 수 없다. 일단 폭발하면 누구도 말릴 수도 없고 다시 주어 담을 수도 없다. 마치 셰익스피어의 오셀로의 성격과 유사하다. 그는 존재하지도 않은 아내의 외도를 이아고의 음모에 의해서 확신하지 않았던가. 마침내 아내의 부정행위가 자신의 상상력 속에서 증폭되어 드디어 그녀의 목을 졸라 죽음에 이르게 한다. 이것은 엄청난 비극적인 결과를 낳는 증상이 아닐 수 없다.
필자는 그의 언쟁의 현장에서 객관적인 시각으로 관찰할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그 때마다 체험한 결과는 술자리에서 일어난 불화로 인한 파국이었다. 불화는 상대방에 대한 화자의 관용에 의해서 얼마든지 조절될 수 있고 방지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대화를 이끌어 가는 과정에서 극도로 자기중심적인 자세를 취했다. 대화에 낀 참여자가 자신의 의견을 전폭적으로 따라주는지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술을 마시고 취하는 목적은 상대방과 막힌 소통의 길을 열어보자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그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는 그저 일방적인 논리에 대한 추종일 뿐이다. 술자리에서 자신의 목소리만을 들으라고 주장하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언어적 폭력이나 다름없다.
어느 날 마포 어느 카페에서 술 파티를 하려다 낭패를 본 적이 있다. 언제나 넉넉하게 베푸는 여류 작가가 2차로 술을 한잔 사겠다고 술자리를 제안하며 이뤄졌던 자리였다. 문단에서 자신의 지지 세력을 모으려고 기꺼이 한턱 쏘겠다는 취지였지만 나름대로 애주가의 마음도 곁들였다.
하지만 술기운이 오르면서 술친구의 뇌리에 남아있던 어느 여자대학교 출신의 작가에 대한 증오감이 갑자기 부상하기 시작했다. 여류작가는 자신의 모교출신의 여류작가에 대한 공격을 방어하려고 술친구의 분노를 다독이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그녀의 시도는 여지없이 실패하고 말았다. 그의 주장을 막으려는 여류작가의 화해시도가 술친구의 분노의 불길에 휘발유를 끼얹는 효과를 내고 말았던 것이다.
술친구의 분노폭발은 거의 한 시간 이상 지속되었다. 술자리의 분위기는 형편없이 가라앉아버렸고 술자리의 취지는 사라져 모두 왜 여기 왔을까 후회하고 있었다. 술을 즐기러온 애주가들의 마음속에 무엇이 남아있겠는가. 도대체 왜 저 술친구가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분노를 허공에 쏘아대고 있는지 서로에게 묻고 있었다. 그리고 화장실을 가겠다는 핑계를 대고 슬금슬금 술자리를 빠져나가고 말았다. 술자리가 만들어야 할 화기애애한 이야기는 들리지 않고 빈자리만 필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사건 이후에 만난 그들은 이상한 눈초리를 필자에게 던졌다. 왜 그런 술친구를 끼고 도는가라는 이야기였다. 필자의 미련이 술친구의 못된 버릇을 지속하게 만들고 있다는 무언의 지적을 던지고 있었다.
결국 술친구는 후배작가들에게 소주잔을 던지며 폭언을 한 사건과 여성 활동가에게 폭언과 폭력을 자행하는 사건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필자가 더 이상 그를 변호할 여지를 남기지 않았다. 술자리는 분노를 삭이고 화해의 자리가 되어야 의미가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 순간 필자는 술친구와 나누던 정담이나 미래에 대한 아이디어를 되새기고 있다. 술자리를 할 때마다 분노를 치유한 술친구가 유머를 날리며 화끈하게 술잔을 나누었으면 좋으리라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사진 : 1. 화해주, 불화설에 휩싸인 가수 싸이와 김장훈이 하이트진로의 ‘참이슬’과 롯데주류의 ‘처음처럼’을 각각 마시며 화해했다. 2012년 10월 12일(출처:컨슈머타임스)
- 기분이 나쁜 상태에서 술을 마시면 독이 된다. 술은 즐거울 때 마셔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