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술

세상에서 가장 에로틱한 수밀도형 술잔 이야기⑨ 南台祐 교수의 특별기고

로마의 정치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Marcus Antonius, BC.83년경〜30)는 클레오파트라(Cleopatra, BC.69∼BC.30)의 유방을 본떠서 황금으로 ‘고블렛(Goblet)’ 잔을 만들게 했다고 한다. Cleopatra는 자신의 성적 매력을 무기로 이집트를 침입한 정복자들을 유혹해서 두 번이나 국가를 구한 무기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여성의 아름다움은 전쟁을 발발하기도 하지만 종전을 가져오기도 한다. 유사이래, 생명의 탄생 이래 성(性)은 영원한 화두가 되고 있다.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역사 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했다. 파스칼이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면 세계사는 바뀌었을 것이라고 말한 이후 클레오파트라의 코는 줄곧 시비의 대상이 되어 왔다. 말하자면 여성미의 척도인 코 높이가 알맞지 않아 클레오파트라가 그처럼 절세미인이 아니었을 경우 안토니우스는 그녀에게 반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랬으면 악티움해전은 없었을 것이고, 더불어 ‘황제’ 아우구스투스도 로마제국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란 논리다. 플루타루쿠스는 <클레오파트라>의 본성에 대해 이렇게 썼다.

그녀는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을 헌신적으로 했다.

그녀는 사랑할 때 온전한 사랑을 바쳤다.

그녀는 미워할 때 정열적으로 증오했다.

그녀는 슬퍼할 때 온 마음을 다해 비탄에 빠졌다.

그의 마지막 자기변호 역시 격정적인 자기 인생의 옹호였다. 그 옹호의 앞과 뒤에는 또 다른 진실과 편견, 그리고 오해의 시각이 가로 놓일 것이다. 역사는 산 자의 몫이다. 희랍어로 ‘그녀의 조국의 영광’이라는 뜻의 Cleopatra가 정복한 두 명 가운데 한 명은 세상에서 가장 힘 있고, 머리가 벗겨진 호색한 카이사르(Gaius Iulius Caesar, BC. 100〜44)였고, 다른 한 명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였다.

기원전 48년 Cleopatra는 자신의 남동생인 남편을 독살하고 20세의 나이로 로마의 명장 카이사르를 유혹했고, 기원전 42년에는 로마의 최고 실력자 안토니우스를 차례로 유혹하였다. 명실공히 카이사르의 후계자였던 안토니우스는 카리스마와 미모를 겸비한 이집트 여왕 Cleopatra에게 반해 조국을 버리고 역시 자살을 하고 말았다. 미모가 아닌 젖가슴으로 당시에 최고의 권력자들을 무너뜨린 것이다. 유방의 힘, 보이지 않는 살인을 감행하는 육체적 무기로 사용한 것이다.

여성들의 육체는 신비로움, 호기심, 생리적 욕구의 중심에 있다. 개인의 삶도, 나라의 역사도, 인류의 문화도 밑바탕에는 성의 물결이 흐르고 있다. “몸에 구슬을 달아 더욱 고혹적으로 보이게 했다.” “시민들이여, 아내를 감춰라!” 위 문구는 Cleopatra와 그의 연인 카이사르에 대한 평가다. 지성, 미모, 계략을 겸비한 불세출의 여인 Cleopatra와 세계 제국 로마의 지배자인 카이사르의 만남은 특별하다. 성을 주체할 수 없던 남녀의 결합이었다. 그녀가 22세 때 만난 51세의 카이사르는 대단한 정력가였다. 영국의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은 그를 희대의 카사노바로 평가한다. 갈리아와 브리타니아를 정복한 그는 루빈콘강을 건너면서 “주사위는 던져졌다(alea iacta est/alea jacta est)”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또 원정 전쟁에서 승리한 뒤에는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ni, vidi, vici)”라고 외쳤다. 리더로서 크게 성공한 그는 위엄이 있었다. 전쟁에서 돌아온 카이사르와 병사들은 신전까지 개선 퍼레이드를 펼친다. 그런데 그의 군사들은 사령관의 성적 욕망을 알고 있었다. 개선행진에서 군사들은 소리친다. “로마의 남편들이여, 아내를 감춰라! 대머리 난봉꾼이 나가신다.”

둘의 첫날밤을 작가들은 황홀하게 묘사했다. 회춘의 물로 목욕하고, 향유로 마사지 하고, 공작색 눈 화장을 한 알몸의 여인이 부드러운 융단에 감싸져 카이사르의 침실에 옮겨진다. 카이사르가 융단의 끈을 푸는 순간 백금처럼 빛나는 상아색 나신(裸身)이 드러났다. 방 안에는 달콤하고 은은한 향기가 진동했다. 카이사르는 연인과 깊은 포옹을 한다.

카이사르의 후원을 받은 Cleopatra는 열두 살에 불과한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4세와 결혼한다. 둘은 애정행각을 숨기기 위해 허수아비 남편을 내세운 것이다. 이를 통해 욕망의 화신인 클레오파트라는 성과 권력을 얻었고, 바람둥이 카이사르는 매력 넘치는 여인을 얻었다. 이집트에서 뜨거운 밤을 보낸 카이사르는 로마로 귀국한 뒤에 아예 Cleopatra를 집 근처로 불러들인다. 다시 전장에 나가는 카이사르는 믿을만한 부하 안토니우스에게 여인을 맡긴다.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뒤 뜨거운 여인 Cleopatra는 안토니우스 품에 안긴다. 정치적 야망도, 식을 줄 모르는 사랑의 열정도 채워줄 남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결국 안토니우스는 전쟁 중 부상으로 숨지고, Cleopatra도 황금옥좌에서 자신의 젖꼭지를 독사가 물게 해 자살한다. 성적자극의 극치를 맛보면서 삶을 마감하게 한 치명적인 젖꼭지이다.

Cleopatra는 미녀의 대명사답게 자신의 풍만하고 탄력 있는 유방을 본 딴, ‘투구만한(!)’ 술잔으로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를 대접(?), 역사를 바꾸는데 성공했다. 이것은 후세에 이르러 ‘샴페인 잔’의 원조가 되기도 했다. 실제로 당시 이집트에서는 ‘마스토스(Mastos)’라 하여, 보다 큰 유방을 과시하기 위해 자신의 유방을 본 떠 만든 술잔을 연인에게 헌작, 구애를 하는 관습이 있었다니 근거 없는 새빨간 거짓은 아닌 듯하다.

레드와인용은 일반적으로 화이트와인 글라스보다 크며, 와인의 향기를 풍성하게 느끼게 하고 이 역시 포도 품종에 따라 더욱 세분화하여 분류한다. 레드와인 잔은 풀 바디한 레드와인의 향과 맛을 잘 느끼도록 설계되었으며, 볼과 잔 입구의 크기에 큰 차이가 없고 잔의 볼 부위에서 올라갈수록 입구가 조금 작아지는 형태이다. 이 모든 형태가 여성의 예쁜 가슴을 성형화한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풍부한 유방이 인기를 모아서 팽팽함과 둥그스러움을 유지하기 위하여 유방을 띠로 들어 올리듯 만들었다. 그렇지만 고대 로마에서는 자그마한 유방이 극구 찬양되었고, 16세기 프랑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큰 유방은 공공연히 혐오되었다. 그래서 젊은 아가씨들은 유방이 발달되지 않게끔 벨트 모양의 유방대(乳房帶)로 유방을 동여매었다. 프랑스에서는 17세기 중반쯤 되면 큰 유방이 인기를 모으는 등 시대에 따라 유행이 바뀌었다.

원시민족에서 유방에 푸른 문신을 판다든지 화장을 하기도 했고, 기원전 1세기의 Cleopatra도 유방의 장식으로 링을 달았다. 19세기에는 유방의 밑동에 구멍을 뚫어 거기에다 금이나 보석으로 장식한 링을 끼웠다. 또 두 젖꼭지를 가는 체인으로 이은 장식물을 다는 여인들도 있었다. 풍요한 유방을 갖고 있는 여성들은 가슴을 본뜬 ‘고블렛(Goblet)’을 만들었다. 상대방 남자에게 사랑을 위해서 만드는 경우이다. 그래서 남성들은 술잔을 두 손으로 감싸는 행위를 본능적으로 한다.

Cleopatra는 흠잡을 데 없는 미인이긴 했지만, 첫 인상에 남자를 유혹에 빠지게 하는 미모의 미인은 아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마르고 긴 얼굴에 뾰족한 코를 가지고 있었던 Cleopatra는 그리스의 피가 섞인 부를 소유한 여인으로 여러 나라 말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했던 언어의 마술사로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 그녀의 목소리를 한 번이라도 들어 본 사람은 그녀의 매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Cleopatra의 혀는 마치 현이 달린 악기처럼 풍부하고 달콤했다.

아울러 그녀는 외교를 위해 자기의 여성기를 최대한으로 이용, 남성들을 꼼짝 못하게 사로잡았다. 불리한 신체적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로마의 우두머리 정치인들을 쥐락펴락했으니 탁월한 섹스 테크닉을 포함하는 Cleopatra의 남자 조종술이 어느 정도 수준이었는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달콤한 목소리와 빼어난 몸매로 뭇 남성의 마음을 애태우게 한 그녀는 근육질의 건장한 노예를 상시 대기시키며 욕구를 푼 것으로 전해진다.

권력과 섹스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당나라의 현종, 존 F. 케네디, 예카테리나(Ekaterina) 여제 등 권력을 이용해 섹스를 취해온 이들이 있는 반면, 에바 페론(Eva Peron)이나 양귀비처럼 섹스를 이용해 권력을 취해온 이들도 있다. 또 역사 속엔 사랑과 결혼을 위해 권력을 버린 사람들도 있다. 권력을 섹스의 도구이자 수단으로 삼은 예는 비단 남자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집트의 여왕 Cleopatra와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여제 등은 남성 권력자들과 마찬가지로 권력을 이용해 자신들 만의 성생활을 즐겼다. 그녀는 7개 국어를 구사하는 천재적인 전략가이기도 하지만 또한 펠라치오(fellatio, 여성이 남성의 성기를 자극하는 구강성교)의 여왕이고, 천의 입을 가진 여자, 입술 두터운 여자 등으로 불린다. 펠라치오를 무기 삼아 로마 황제를 휘둘렀을 거라고 전한다.

Cleopatra는 섹스랭귀지의 천재로 알려져 있다. 뛰어난 화장술과 남성의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우아한 자태, 그리고 천사와 같은 목소리로 수많은 당대의 영웅들을 홀렸기 때문이다. 또 뛰어난 성욕을 가진 그는 하룻밤에 30∼40명과도 섹스를 즐길 정도였다고 하니 놀랄 만하다. 하지만 그의 그런 섹스랭귀지도 선척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한 사원에서 섹스 훈련을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때 많은 젊은 남성들과 실습교육을 하면서 어떻게 하면 남성들을 흥분시키며 자신도 최고의 쾌락에 이를 수 있는지 터득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넓적다리를 잘 단련시켰고, 그를 통해 수많은 남성들을 황홀경으로 빠지게 했다. 또 섹스 할 때 자스민 향을 온몸에 뿌려 상대방이 극도의 쾌락에 도달할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Cleopatra는 여러 명의 젊은 남성과의 섹스 실습을 통해 어떻게 하면 남성을 성적으로 흥분시키며 자신도 최고의 쾌락에 이룰 수 있는지 교육을 받았다. 젊고 잘생긴 남자들만을 골라 사랑의 미약(媚藥)을 먹여 최고로 흥분시켜 남성기를 발기시킨 후 섹스를 즐기기도 했고, 많을 때는 하루 동안 1백 명의 남자를 상대했다고도 하는데 믿을 수 있는 얘기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오늘날 <킨제이 보고서(Kinsey Reports)>에 따르면 남녀 모두 일생동안 다른 섹스 메이트와 즐길 수 있는 최대 수는 1백 명을 넘지 못한다고 하니 Cleopatra의 성적 절륜에 놀라울 뿐이다.

당대의 영웅들을 매료시킨 저 유명한 Cleopatra는 시간이 날 때마다 ‘섹스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알렉산드리아의 사원에서 넓적다리를 단련<케겔운동(Kegel’s excercise)>하는가 하면 비윤리적인 젊은 남성과의 접촉에서 어떻게 하면 남녀 모두 최고의 오르가슴에 이를 수 있는지를 진지하게 탐구했다. 또 그녀는 매혹적인 육체로 보이게 하기 위해 유두에 링을 달아 장식했다고 하니, 오늘날 피어싱(Piercing)의 원조인 셈이다. 당나라 현종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양귀비 역시 매력적인 모습을 잃지 않기 위해 전족을 위해 발에는 늘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고, 온천물에 풀과 꽃을 띄워 그 향기를 몸에 배게 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다.

고대 로마의 역사가들은 그녀를 가리켜 역사상 어느 여자보다 성욕이 왕성하여 하룻밤에 백여 명 이상의 로마 귀족들을 상대로 변태적 성행위를 즐겼다는 식의 요부로 기록하면서 그녀가 섹스를 통하여 남자들을 사로잡는 특수 훈련까지 받았다고 적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이 부분은 로마인들이 Cleopatra를 적대시하고 폄훼하고자 했던 감정이 드러나 있다. 왜냐하면 Cleopatra는 로마인들이 싫어하는 마케도니아 알렉산드로스의 혈통을 이어받은 그리스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Ptolemaios) XII세의 셋째 딸(Cleopatra VII Philopator)로 태어나 18세에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XII세와 결혼, 공동 파라오(Pharaoh)의 자리에 오른다. 하지만 남편을 비롯한 형제들과의 권력다툼과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권력 기반인 그리스계의 외면 등으로 왕좌에서 물러나게 된다. 기원전 48년 이집트에 온 로마 제국의 지배자 카이사르와의 협상에 성공, 반대 세력을 물리치고 다시 왕좌를 차지한다. 스물이 갓 넘은 Cleopatra가 50대에 이른 카이사르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이용했다는 갖가지 유혹의 비법들은 지금도 널리 회자되고 있을 정도다.

기원전 48년 Cleopatra는 자신의 남동생인 남편을 독살하고 로마의 명장 카이사르를 유혹했고, 기원전 42년 카이사르가 부루투스( Bluetooth) 일당에게 독살되었을 때는 최고 실력자 안토니우스를 다시 유혹했다. 기원전 31년 안토니우스가 실각한 뒤, 실력자 옥타비아누스(Octavianus)를 사로잡기엔 그녀 자신도 너무 늙어 이미 39세였다. 그 뒤 40세 되던 해, 독사로 자신의 가슴을 물게 해서 죽었다.

기원전 30년 자신의 군대와 함께 참패를 당한 안토니우스는 Cleopatra가 죽었다는 잘못된 소식을 전해 듣고 자신의 심장을 찔러 자결하였다. Cleopatra의 은신처에 옮겨진 안토니우스가 그녀의 팔에 안겨 숨지자 그녀 역시 코브라로 하여금 자신의 가슴을 물게 하여 죽음의 쾌감을 느끼며 일생을 마쳤다.

글쓴이

남태우 교수:중앙대학교(교수)▸중앙대학교 대학원 문헌정보학과 박사▸2011.07~2013.07 한국도서관협회 회장 ▸2009.07 한국도서관협회 부회장▸2007.06~2009.06 대통령소속 도서관정보정책위원회 위원 ▸2004.01~2006.12 한국정보관리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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