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에로틱한 수밀도형 술잔 이야기⑩
南台祐 교수의 특별기고
(The death of Cleopatra(1914)/ Reginald Arthur)
Cleopatra의 드라마틱한 일생 가운데 가장 신비로운 부분은 바로 죽음의 순간이다. 이를 이야기 하려면 일단은 당시 정황을 자세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쓴 고대 로마의 역사가 플루타르코스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남겼다.
“악티움 해전에서 패한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을 위해 만들어 둔 왕실 묘지에서 마지막 순간을 맞았다. 시녀들과 보물로 가득한 무덤으로 숨어든 그녀는 문에 단단한 방어벽을 쳤다. 당시 마케도니아의 여느 무덤처럼 문은 한번 닫히면 다시 열기 어려웠다. 안토니우스의 시신도 쇠줄과 밧줄로 몸을 감은 채 묘지 위로 올라가 창문을 타고 클레오파트라의 무덤으로 들어가야 했다.”
이집트와 동맹한 안토니우스는, 정략결혼을 했던 옥타비아누스의 누나 옥타비아(Octavia)와 이혼했다. 그리고 Cleopatra와 결혼했다. 그 후 두 사람에 쌍둥이의 남매와 또 남자 아이가 태어났다. 따라서 안토니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완전히 이집트군과 연합하게 된다. 기원 전 31년, Cleopatra·안토니우스 연합군과 옥타비아누스(Octavianus)가 인솔하는 로마군과, 그리스의 악티움(Actium)에서 격돌했다. 이 해전에서 패배한 Cleopatra 군과 안토니우스의 연합군은, 이집트로 귀환했으나 끝내 안토니우스는 사망한다.
그러나 Cleopatra는 옥타비아누스에게 항복하는 것을 거절하고, 독을 품은 코브라에게 물려 자살했다. 정복자 옥타비아누스는 Cleopatra가 안토니우스와 함께 묻히고 싶다한 유언을 들어주었고 전한다. 프랑스 철학자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은 “Cleopatra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도 세계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 속에는 클레오파트라의 미모가 그만큼 뛰어났으며, 그 미모를 무기로 여러 남성을 유혹해 야심을 채웠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Cleopatra는 당대 최고의 미녀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녀는 뚱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천부적인 화장술과 미용법으로 많은 남성들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그런데 Cleopatra는 미녀의 대명사답게 자신의 풍만하고 탄력 있는 유방을 본 딴, ‘투구만한(!)’ 술잔으로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를 대접(?)하여 역사를 바꾸는데 성공했다. 술잔을 ‘투구’만하게 라는 의미에서 그녀는 글레머(Glamour)로 유방도 탐스럽게 큰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후세에 이르러 ‘샴페인 잔의 원조’가 되기도 했다. 이집트의 여왕 Cleopatra가 그녀의 애인 안토니우스를 대접 할 때는 섹시한 자신의 여성기 유방을 본 뜬 유방 술잔이 연회석에서 사용되었다. 실제로 당시 이집트에서는 ‘마스토스’라 하여, 보다 큰 유방을 과시하기 위해 자신의 유방을 본 떠 만든 술잔을 연인에게 헌작, 구애를 하는 관습이 있었다니 거짓은 아닌 듯하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Marcus Aemilius Lepidus)와 함께 제2차 삼두정치를 이루어 로마를 다스리고 있는 최고 권력자였는데 그는 삼두정치 반대파 카시우스(Cassius)를 도와준 Cleopatra를 문책할 생각이었다. 당시 이집트는 로마의 동맹국이긴 하지만 사실상 속국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Cleopatra는 소환에 선뜻 응하지 않고 몇 번이나 독촉을 받은 끝에 타르수스로 향하는데 카드누스 강가에서의 선상 파티에 안토니우스를 초대하게 된다.
삼두 정치인 중 한 사람인 안토니우스가 로마 제국의 동부 지역 사령관에 오른 후 동방 원정길에 나섰다는 정보를 입수한 Cleopatra는 자신과 국가의 운명이 걸린 안토니우스를 유혹하기 위해 묘안을 짜냈다. 앨마 테디마(Sir Lawrence Alma-Tadema)는 그리스의 역사가 플루타르크가 안토니우스와 Cleopatra의 만남을 묘사한 글을 토대로 이 그림을 그렸다.
Cleopatra와 안토니우스가 첫 만남을 가진 장소는 타르수스다. 오늘날에는 터키의 한 지방 도시에 불과하지만 고대의 타르수스는 소아시아에서 가장 손꼽히는 대도시였다. 시가지는 강으로 이어져 있었는데 Cleopatra는 온갖 보석으로 치장한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와 안토니우스를 만났다. 선체는 황금빛이요, 바람을 받아 크게 부풀어 오른 돛은 가장 값비싼 색깔인 자주색이었으며, 갑판 중앙에는 금실로 수놓은 장막이 좌우로 열려 있고, 그 아래 옥좌에 사랑의 여신 비너스로 분장한 Cleopatra가 앉았다.
노예들은 은으로 만든 노를 저으며 피리와 하프 가락에 맞추어 춤을 추고 배에서는 형용할 수 없는 향기가 바람을 타고 진동했다. 이 화려한 첫 만남에 안토니우스는 그만 혼을 뺏기고 말았다. 정신이 나간 안토니우스가 벌떡 일어서서 두려움과 경이로움이 가득찬 눈길로 Cleopatra를 바라본다. Cleopatra는 금으로 장식된 이동 닫집 아래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앉아 요염한 눈초리로 안토니우스를 탐색한다.
안토니우스와 극적인 첫 만남을 가진 이후 Cleopatra는 그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행여 안토니우스가 권태를 느낄새라 늘 새로운 쾌락을 개발했고 날마다 산해진미에 악사와 무희를 동원한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이런 생활이 10년이 넘도록 이어지자 Cleopatra는 연인을 아예 자신 곁에 못 박아두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려 안토니우스의 사랑이 순간적인 열정이 아니었음을 증명하고 싶었다.
그날 저녁 Cleopatra 배에 오른 안토니우스 눈이 휘둥거려 지는데, 금은 장식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배 안에는 온통 꽃으로 깔려있는 금 접시와 보석이 박힌 금 술잔이 빛을 발하는 가운데 사랑의 여신 Aphrodite로 치장해 아름다움의 절정을 이룬 29살의 Cleopatra가 감미로운 선율이 흘러나오는 금빛 차양 안에 비스듬히 누워 안토니우스를 맞이하였다. 안토니우스가 “이런 화려한 파티에는 많은 비용이 들겠군요.”라고 말하자, Cleopatra는 “지금까지 파티에 쓴 경비는 하잘 것 없는 것입니다. 이제 저 혼자 10,000 세스테르티우스(Sestertius)(1만 세스테르티우스는 오늘 날의 화폐로 환산하면 약 20만 파운드, 2억 4천만원)를 써보죠.” 라고 대답하였다. 그녀는 글레머스러운 육체만큼이나 통도 컸던 모양이다.
끝내 신분과 국적, 동양과 서양이라는 인종적인 차이를 무시하고 이국의 여왕과 혼인식을 올릴만큼 안토니우스는 철저하게 여왕의 노예가 되었다. 그리고 안토니우스는 결혼 선물로 여왕에게 엄청난 이권이 걸린 오리엔트 지방의 통치권을 주었다. 로마의 권력자를 애인으로 둔 덕분에 그녀는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재물과 권력을 소유한 여왕이 되었다. 사랑에 눈이 먼 안토니우스는 로마의 아내 옥타비아에게 이혼을 요구하는 편지를 쓰고 또 다른 권력자인 옥타비아누스에게 로마의 지배권을 동서로 양분할 것을 요구했다.
사태가 이렇게 악화되자 로마인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국사를 돌보기는 커녕 힘들게 정복한 식민지에서 나온 귀한 수입을 이집트 여인에게 몽땅 안겨주는 사령관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는가. 특히 상속자요, 양자인 옥타비아누스는 여왕의 노예로 전락한 안토니우스를 로마의 수치로 생각했다. 그는 두 남녀를 국가의 명예를 더럽힌 탕아와 국제적인 창녀의 야합으로 매도한 후 안토니우스를 제거하기 위한 전쟁을 벌였다. 결국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31년에 벌어진 악티움 해전의 승자가 되었고, 패전 사령관이 되어 벼랑 끝에 몰린 안토니우스는 자결하였다. 그후 옥타비아누스는 아우구스티스로 황제 이름을 바꾸고 대로마제국을 건설하게 된다.
Cleopatra의 죽음은 아무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갑작스럽고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안토니우스의 묘를 참배하고 돌아온 그녀는 곧바로 최후를 맞았고, 역사가들은 그녀가 독사에 물려 죽은 것으로 추정했다. Cleopatra를 그릴 때는 독사가 벌거벗은 여왕의 젖가슴을 무는 자극적인 장면을 선택하는 것이 관습처럼 되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 에로티시즘이 강하게 풍겨 나오는 것은 죽음과 성을 한 쌍으로 묶어 표현했기 때문이다.
Cleopatra가 팜므 파탈의 원형이 된 것은 정치적인 야심을 실현하기 위해 권력의 최정상에 앉은 남자들을 차례로 유혹해 희생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아름다움과 성적 매력을 이용해 왕권을 차지했고 애인들의 막강한 힘을 빌어 정적을 제거하고 부귀영화를 누렸다. 플루타르크는 Cleopatra의 신비로운 죽음에 대해 “여왕의 갑작스런 죽음은 탐스런 무화과 바구니를 든 농부가 여왕을 방문한 직후에 일어났다. 무화과 바구니에 맹독성이 강한 독사가 들어 있었던 것일까? 라고 강한 의문을 던졌다.”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 1798~1863)는 Cleopatra를 방문한 농부의 바구니 속에 숨겨져 있는 뱀을 그려 넣어 극적인 죽음을 예견하고 있다.
유방은 여성의 성기의 일부로 간주된다. 그래서 트로이의 헬레나는 제전에 바치는 황금 술잔을 자신의 유방과 똑같은 모양으로 만들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최고의 사랑 표시로 자신의 유방을 본 떠 만든 술잔을 안토니우스에게 바쳤다. 사랑하는 남자가 여인의 젖을 애무하면서 “이건 내 꺼야. 딴 사람은 손대지 못해.”라고 말했을 때 여인이 황홀경에 취해 “그래. 당신 꺼야”라고 했다면 유방의 소유주는 두 사람의 합의 하에 그 남자의 것이 된다.
물론 중세기 정조대와 달라 가슴에 철갑을 두를 수는 없을 터이니 여인이 마음이 변해 다른 남자의 손에 자신의 유방을 맡긴다면 소유주는 쉽게 바뀌겠지만. 그런데 유방암이 생기는 경우 유방은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무서운 적, 살해자로 변하고 만다. 이렇게 유방은 여성 신체의 일부이기는 하나 그 기능의 결정자나 소유자는 자신이 아닌 경우가 허다하다.
클레오파트라-진주귀걸이를 술에 녹여 마시다
Cleopatra는 왕권과 영토를 지키기 위해 안토니우스를 유혹하기로 했다. 그러나 거금을 들여 베푼 연회와 자신의 미모로도 안토니우스의 마음을 얻지 못한 Cleopatra는 한 가지 내기를 제안했다. 그러더니 그녀는 시녀에게 식초를 잔에 담아오도록 명령하였다. 술이 담긴 황금 술잔에 천연 진주 귀걸이를 빠뜨린 다음 그것을 마셔보겠다고 큰소리 친 것이다. 그 때 Cleopatra는 온 몸에 값비싼 보석을 많이 달고 있었는데, 그 중에 양쪽 귀에 늘어뜨린 커다란 진주 귀걸이가 가장 눈에 띠었다. 식초 잔을 받아 든 Cleopatra는 한 쪽 귀걸이를 떼어내 식초 잔에 담구어 버리는데 안토니우스는 흥미롭게 이를 지켜보게 되고 식초 술잔에 들어간 진주는 서서히 녹아버리고 만다.
진주를 착용하지 않는 여자는 거품없는 샴페인과 같다는 말이 있듯이 ‘바다의 눈물’이라는 진주는 모든 장소와 의상에 잘 어울리는 보석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청순과 순결을 상징하기도 하는 진주는 화이트, 블랙, 실버, 크림, 골드, 핑크, 옐로, 그레이, 흑진주 등 색상이 다양하며 일반적으로는 핑크계열이 많이 선호되고 있다. 진주는 몸에 부착하고 있으면 사람 몸에 열량을 제공하고 기력을 높여줘 젊음을 유지시켜주며 사람피부를 보호하고 면역력을 높여준다. 진주에 대한 일화가 있는데 로마 장군 안토니우스의 연인으로도 유명한 이집트의 여왕 Cleopatra가 안토니우스를 유혹하기 위해 자신의 둘도 없는 진주 귀걸이를 식초에 녹여 마셨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진주가 다 녹자 Cleopatra는 술잔을 단숨에 마셔버리고, 다시 귀걸이 한 쪽을 술잔에 마져 담그려 하자 안토니우스는 그 진주의 귀함과 Cleopatra의 대범함에 문책할 마음을 철회하고 Cleopatra의 마음을 빼앗게 된다. 이 ‘Cleopatra 진주’ 이야기는 로마의 학자 플리니우스의 <박물지>에 기술되어 있다.
진주는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생명체가 직접 만들어 내는 보석이다. 우아한 광채로 ‘대양의 여왕’이라고 불리지만 알고 보면 이는 조개가 만들어 내는 일종의 분비물이다. 조개는 속에 이물질이 들어가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껍질 바로 밑 외투막에서 방어 물질을 뿜는다. 이것으로 이물질을 감싸게 되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 막이 두껍고 단단해져 마침내 진주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Cleopatra는 진주를 어떻게 녹여 마실 수 있었을까. 술잔 속에 든 것이 술이 아니라 식초라면 가능한 일이다. 천연 진주의 성분은 석회석으로 식초에 잘 녹는다. 진주가 모두 녹지 않아도 녹는 모습만 보여 준 후 술과 함께 단숨에 삼키는 방법을 사용했을지도 모른다. 즉, 진주의 주성분인 석회석이 식초의 아세트산에 의해서 녹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므로 잠깐 식초에 담갔다고 바로 녹지는 않는다고 한다. 결국 Cleopatra의 영리한 눈속임일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진주가 녹다 만 식초를 그냥 삼켰을 확률이 높은 셈이다. 게다가 진주가 완전히 녹았다 하더라도 이는 원래 식초보다 조금 더 약한 산성을 띈 물정도 밖에 안되기 때문에 충분히 마실만한 상태이므로 그다지 놀랄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같은 내용의 사건의 다른 기록에도 있다. 클라우디우스(Julius Claudius)라는 이름의 난봉쟁이인 로마인이 아버지로부터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았는데, 그는 진주가 어떤 맛을 가지고 있는가를 알기 위해 값비싼 진주를 식초에 녹여 보이겠다고 했다. 그는 실제로 그렇게 했으며 이 음료가 굉장히 맛있었기 때문에 손님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도 진주를 고루 나눠주고 같은 행동을 하게 했다고 한다.
진주를 약으로 이용하는 방법의 기록도 있다. 그 중 하나는 통풍을 고치는 약이 있었는데 작고 거의 값어치가 없는 진주를 식초에 녹여서 만든 것인데 반드시 진주를 먼저 가루로 잘게 빻은 다음에 식초에 녹였다. 진주에서 얻어지는 가루는 주로 탄산칼슘으로 되어 있고 이것은 식초를 포함한 모든 산에 녹는다. 그밖에 식초에 녹지 않는 성분도 조금은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진주의 표피는 마셔도 해를 주지 않을 정도로 약한 식초에서 몇 초 동안에 녹지 않는다. 그러므로 Cleopatra가 식초에 진주를 넣었을 때 쉽사리 녹았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한편, 예로부터 진주는 정력을 강하게 하고 노화를 억제하는 ‘회춘의 묘약’으로도 유명하다. 이 외에도 진주를 가루 내어 팩과 함께 섞어 사용하면 화장을 잘 먹게 하고 희고 고운 피부로 만드는데 효과가 있는데, 이는 진주 속에 미네랄이나 생리활성 물질들이 피부를 약산성으로 유지시켜 피부 노화를 막고 보습효과를 주기 때문이다. 이처럼 귀한 보석으로, 때로는 강장식품이나 화장재료로 다양하게 활용되었던 진주는 옛날에 비해 많이 흔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그 신비로움은 잃지 않고 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큰 유방을 과시하기 위해 자신의 유방을 본떠 만든 술잔으로 헌작하고 구애하는 관습이 있었다. 이집트의 여왕이자 세기의 미모를 갖춘 Cleopatra가 그녀의 애인 마트 안토니우스를 대접할 때는 탄력적이고 섹시한 자신의 유방을 본 뜬 유방술잔을 연회석에서 썼다. 그런데 유방형 삼페인 잔에서는 거품과 향기가 빨리 없어지고 손 온도에 의해 와인이 데워지는 흠이 있어 받침이 있는 잔으로 바뀌게 되었다.
Cleopatra는 두 유두에 황금 링을 걸고 다녔는데, 그 유방이 너무 예뻐서 안토니우스가 그녀의 유방을 본떠서 황금의 술잔을 만들어 여기에 술을 따라 마신 것으로 전한다. 이뿐 아니라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Claudius)의 왕비였던 메살리나(Messalina)는 유방을 황금빛깔로 색칠했다고 하듯이 오랜 옛날부터 유방에 문신을 하고 화장을 하거나 장식품을 다는 것이 유행했다고 한다.
▴문학박사/중앙대학교 명예교수▴전남대 교수▴중앙대학교 도서관장▴중앙대학교 교무처장▴중앙대학교 문과대학장▴한국정보관리학회장▴한국도서관협회장▴대통령소속도서관정보정책위원회 위원
◇ 필자 남태우 교수 경력:▴전남대학교 문헌정보학과 교수▴중앙대학교 문헌정보학과 교수▴중앙대학교 중앙도서관장▴중앙대학교 교무처장▴중앙대학교 문과대학장▴한국정보관리학회장▴한국오픈엑세스포럼회장▴한국 문헌정보학교수협의회장▴대통령소속 도서관정보정책위원회 위원▴한국도서관협회장▴중앙대학교 명예교수(현재)▴현재 건전한 음주문화 선도자로 활동하고 있음
◇ 음주관련 저작리스트:▴비틀거리는 술잔, 휘청거리는 술꾼이야기(1998)▴주당별곡
(1999)▴술술술, 주당들의 풍류세계(2001)▴알코올의 야누스적 문화(2002)▴음주의 유혹, 금주의 미혹(2005)▴주당들의 명정과 풍류(2007)▴홀 수배 음주법의 의식과 허식(2009)▴술잔의 미학과 해학(2013)▴은자의 명정과 청담세계(2013)
<다음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