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술

이 세상에 젊은 道士는 없다

권녕하

이 세상에 젊은 道士는 없다

 

홍길동이 스승을 만나려고 괴나리봇짐을 지고 금강산을 향해 출발했다. 때는 초여름, 시대는 조선시대 중기로 사농공상(士農工商) 시스템을 기반으로 국정을 운영하던 때였다. 이 시스템은 생산, 분배 과정에서 한계점에 도달해 조선의 고을마다 탄식과 원망이 먹구름처럼 짓누르고 있었다. 하급관리들조차 끼니 걱정을 할 정도로 공급과 유통이 무너지자 각계각층에 분란을 일으키는 주요인으로 작용하며, 툭하면 민란이 일어나곤 하였다. 더욱이 하층계급은 그저 하루하루 먹고 살기에 급급해, 주고받는 인사말이 “밥은 먹었니?”, 오늘도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게 다행이라는 듯 “밤새 안녕?”이란 말이 유행하고 있었다.

한편, 시절이 좋을 때는 양반 행세하며 놀고먹던 얼자(孽子:첩의 자식)들에게 제일 먼저 충격이 왔다. 나눠먹을 게 부족해지자 양반들이 재주 많은 얼자들을 갖은 핑계를 대며 내치기 시작했다. 세상에 먹고 살 양식이 없는 나라꼴이라니! 양반 맛을 잘 아는 얼자들이 이도저도 못하고 난감해진 것이다.

스승은 금강산 어느 골짜기에서 흰 수염을 솔바람에 휘날리며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도대체 길동이가 찾아오면 과연 무슨 말을 해 준단 말인가! 스승은 도사니까, 길동이가 물어볼 말을 이미 알고 있었다. 길동이는 제자 중에서도 참 아끼는 수제자이지만 그의 고민을 덜어줄 쾌도난마(快刀亂麻)같이 시원하게 일갈(一喝) 해줄 말이 없었다.

왕권조차 우습게 여기는 학문권력자 사대부들은 패거리를 지어 국정을 농단하고 있는데 스승인들 그들의 그 흠험한 심중을 어찌 알 수 있단 말인가. 끼리끼리 모여 밀실(密室)에서 결정한 사항을 도사인들 어찌 미리 알 수 있단 말인가. 도사가 저자거리에서 혹세무민하는 점쟁이라도 된단 말인가! 아니면, 오가는 사람 소매 붙들고 여론조사라도 하는 사람이란 말인가! 그런 건 한양 땅에 있는 홍길동이 이놈! 제 놈이 더 잘 알면 알았지 금강산에서만 있는 도사가 어찌 그걸 안단 말인가!

열길 물속이나, 하늘의 운행 이치는 통탈했지만 정말 알다가도 모를 게 사람의 속내였고! 그 중에서도 가관은 ‘권력욕’이었다. 권력에 관한 욕망은 인간의 기본적인 심성과는 달리 인간끼리의 경쟁관계에서 이빨을 드러내는 괴물 같은 욕망이었다. 피아간(彼我間)에 피(血)를 봐야 직성이 풀리는 몹쓸 욕망덩어리였다.

조선사회가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다. 능률적으로 잘 짜인 시스템 덕분에 조선은 학문이 발달하고 문화예술이 융성하고 민본주의 애민사상이 싹트는 등 전쟁도 없는 낙토(樂土)였다. 그런데 인구가 자꾸 늘어나고 있었다. 조선 땅 한정된 영토에서 초창기의 통치 시스템으로 쥐어짜고 해봐야 잘 될 리가 없었다. 미래는 고사하고 현실조차 감당해내기에 점점 벅차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문제가 하나 둘 발생하고 만다. 지배계층인 당대의 학문권력자들이 낡은 시스템을 자기네 패거리들의 안일을 위해 교조화(敎條化) 한다. 정체된 낡은 시스템은 부작용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생산량은 정해졌고 분배할 곳은 자꾸 늘어나는데, 먹을 놈(?)은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내핍에 금주령에 궁색을 떨어가며 청백리(淸白吏)를 아무리 찬양해도 낡은 시스템을 적용한 분배방식으로는, 도저히 골고루 나눠줄 방도가 없어져갔다.

결국 지배계층은 기발한 아이디어를 짜낸다. 순혈주의를 주창하며 제일 먼저 서얼(庶孼)의 출세를 제도적으로 차단한다. 개인의 재주 능력은 외면한 채 한정된 벼슬자리를 독과점하기 시작한다. 그래도 잘 안 돌아가자 생산을 늘릴 생각을 하지 않고, 요즘 말로 적대관계, 경쟁관계 사대부들의 재산을 합법적으로 접수, 합병을 시도한다. 그런데 그 방법이 경제논리가 아니라 정치로 엮는다. 역모(逆謀)라는 치명적 너울을 씌워서 제거해 버린다. 이 방식의 장점은 구차스럽게 제조업에 투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깔끔하게! 몽땅! 경쟁 집단을 도륙(屠戮)하면 된다. 이 방식을 일석이조(一石二鳥)라고 했다. 무릎을 탁! 칠 정도로 이 말이 오래도록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된다. 경쟁 집단의 벼슬자리와 재산을 빼앗고, 잘 교육받은 아녀자들은 노비로 보너스로 얻는다. 자기네 패거리와 후손들에게 빼앗은 재산과 벼슬자리 챙겨주었다. 이런 사업은 잘 만하면 조선사회에서 임금 부러울 것 없는 쾌거였다. 몇 대에 걸쳐 일족의 안위가 보장되는 수익성이 아주 높은 사업(?)이었다.

딱한 길동이, 이제 헛걸음 칠 일만 남았다. 금강산이 어디 예사로운 산인가. 봉우리가 일만 이천 봉이나 된다. 길동이가 하루에 한 봉우리씩 부지런 떨며 스승을 찾아다닌다 해도 일만이천날(日)이나 걸릴 터인데 참 걱정된다. 게다가 스승은 스승대로 ‘날 찾아봐라’하고 피해 다니지 않는가. 길동아! 헛수고 고마해라! 날 찾아다니다 세월 다 간다. 그 세월이 네놈 턱에 허연 수염 붙여주면, 아예 네가 도사해라! 길동이! 이눔아! 그래서 이 세상에 젊은 도사는 없다. 젊은이가 도사(道士)인 척 하면, 십중팔구 꿍꿍이를 감춘 사기꾼이거나 정신병자이거나 신체 생리적으로 ‘애늙은이’이거나 스트레스 너무 많이 받아 단명하고 만다. 공자(孔子)인 척 하고 살기도 힘든데, 도사인 척 하고 살려면 DNA 검사부터 해야 한다. 오늘날 기자(記者)가 ‘천기누설 하는 척’ 잘 못하면, 결국엔 골로 간다. 한 잔 척 걸친 날, 특히 여자 만나는 날은 더욱 유념해야 한다. 흰 수염이 바람에 휘날릴 때까지.

권녕하

시인, 문화평론가 <한강문학> 발행인

Exit mobile ver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