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맥주는 담색맥주인 에일(ale)과 흑맥주인 스타우트(stout)로 구분된다. 에일의 역사는 아주 오래지만 스타우트는 최근의 맥주다. 18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런던을 중심으로 흑맥주인 포터가 석권했다. 포터의 발상은 확실치 않으나, 1722년 런던 동부 쇼어디치(Shoreditch)에 있는 벨양조장(Bell Brewhouse)의 기사 랄프 하워드(Ralph Harwood)가 상품화한 제품이다.”
포터와 스타우트는 흑맥주로, 보리차에서 느낄 수 있는 보리의 탄맛이 난다. 이 두 가지 맥주는 에일에 이용되는 상면발효 효모를 사용해 발효시키며, 탄맛에 상면발효 효모만의 특징인 과일 향을 갖고 있다.
스타우트라는 말이 일상 회화에서 사용되기는 했어도 포터라는 명칭이 주를 이뤘고, 지금도 세계적으로 포터라는 상품명이 더 넓게 통용되고 있다. 오늘날 이 두 가지 맥주를 구분할 때면, 통상 포터가 입안에서의 맛이 약간 가볍고 바디(body)감이 적은 맥주로 구분한다.
포터와 스타우트가 런던과 더블린에서 생산되고 유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곳의 양조용수 수질이 탄산염의 농도가 높아 짙은 색의 맥아(麥芽)를 생산하는데 적합했기 때문이다.
포터가 처음 선보였을 때는 ‘엔타이어(entire)’라고 불렀다. 당시에 팔리고 있던 여러 가지 맥주를 하나로 합했다는 의미다.
이런 정황으로 미뤄 볼 때 포터 이전에도 벌써 유사한 흑맥주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호프브로이하우스에서 제조한 맥주를 일반인에게 팔기 시작하면서 바이에른 국왕은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다.
‘30년 전쟁’(1618~48년의 종교전쟁) 당시 바이에른의 국왕인 막시밀리안(Maximilian) 1세는 맥주판매에서 얻은 수익으로 30년 전쟁을 치를 수 있었다고 하니, 맥주로 인한 수입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맥주의 품질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도 했다. 마르틴 슈타인들(Martin Staindl)을 영국으로 보내 당시 유행했던 포터를 배워오게 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해외유학이었다.
포터맥주에 대해 무라카미의 얘기를 좀 더 빌리면, 포터라는 이름의 유래는 노동자 계급이나 항구에서 물건을 운반하는 사람들(porter)이 마셨다고 해서 그렇게 불렀다는 설이 있고, 또 하나는 벨양조장에서 맥주를 배달하는 사람이 주문한 집의 현관에 도착해서 “포터가 도착했소!”라고 소리친 것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30년 간의 종교전쟁을 치르고 난 독일은 음주행태가 크게 변했다.
북부독일의 훌륭했던 맥주공장은 파괴되고, 남부의 포도농장은 모두 망가졌다. 북부독일 도시들은 부서진 맥주공장을 재건할 자신이 없었다.
남부 도시들 또한 엉망이 된 포도밭에서 다시 포도를 재배할 기분이 아니었다.
포도나무를 심고 수확이 될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무언가는 마셔야 했던 바이에른 주민들은 자연히 손쉬운 맥주를 택하게 됐고, 17세기 이후에야 비로소 바이에른이 맥주의 중심지가 됐다.
그렇다고는 해도 맥주는 소규모로 양조돼 동네에서나 마셨지 북부독일의 한자동맹에 참가했던 자유도시와 같은 대규모 맥주 거래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더구나 30년 전쟁 후 독일은 370여 개의 주(州)로 나눠져 하나의 도시국가 형태였다. 1750년경 바이에른에는 4000여 곳의 맥주공장이 있었다. 뮌헨에 67개, 아아구스부르크에는 109개소나 있었다고 하니, 얼마나 급속히 맥주 소비량이 증가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모든 도시는 그들의 작은 맥주공장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 고장의 맥주를 보호했고, 도시를 경계로 관세를 부과했으며, 자(自)도시에서 타(他)도시 맥주를 마시는 일도 금지했다. 이러한 상황은 18세기까지 지속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