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반대로 ‘술은 만병(萬病)의 근원’이라는 말도 있다. 백약지장을 압도하는 말이다. 만병 앞에 백약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동의보감〉에는 “오랫동안 마시면 정신이 상하고 수명이 줄어든다. 사람이 마시면 몸이 말을 듣지 않고 정신이 혼미해지니 그것은 술에 독기가 있기 때문이다”라고 얘기하고 있다.
찬반(贊反), 좋고 나쁨이 교차할 때 우리는 중용이라는 말을 곧잘 사용한다. 적당한 선을 유지하면 해로울 것이 없다는 것이다. 다만 지나침이 문제다. 적당함과 지나침은 개개인의 선택의 문제이니 놓아두고, 여기에서는 한국의 전통주 중에서 대표적인 약술인 구기자술 맛을 가늠해보자.
구기자주에 얽힌 재미난 얘기가 이수광(1563~1628)의 〈지봉유설〉에 나와 있다.
옛날 하서에 길을 가던 사신이, 16~17세가량의 여인이 80~90세쯤 돼 보이는 백발의 늙은이를 매질하는 것을 보고 그 연유를 물으니, 젊은 여인이 늙은이를 가리키며 “이 아이는 내 셋째 자식인데 약을 먹을 줄 몰라서 나보다 먼저 머리가 희어졌다”고 했다. 여인의 나이를 물었더니 395세라 했다. 이에 사신이 말에서 내려 그 여인에게 절한 다음 그 약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여인은 구기자주 만드는 법을 가르쳐줬다. 사신이 돌아와서 그 법대로 만들어 먹었더니 300년을 살았다고 한다.
〈동의보감〉 잡병편에는 구기자주 빚는 법이 소개돼 있다. “구기자 5되를 청주 2말에 7일 동안 담갔다가 꺼내어 찌꺼기를 제거하고 마신다. 처음에는 3홉으로 시작하고, 뒤에는 주량대로 마신다”고 했다.
구기자주를 빚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술을 빚을 때 구기자 달인 물로 빚든지, 술에 구기자를 넣어 침출시켜 빚든지 하는 방법이다. 다만 구기자의 어느 부위를 쓰며, 얼마나 넣으며, 다른 약재와 어떻게 섞어서 쓰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
가장 널리 알려진 구기자술로, 충남 청양군 운곡면 광암리에서 빚어지는 청양 ‘둔송 구기주’를 꼽을 수 있다. 충청남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술이다. 청양과 구기주 앞에 붙은 둔송(屯松)이라는 말은 청양읍내의 원각사 정문 스님이 지어준 이름이다. 언덕 둔(屯)자에 소나무 송(松)자인데, 스님은 “크게 되라고 지어준 이름이니까 더는 자세히 알려하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구기주를 빚는 임영순 씨는 1996년에 농림부로부터 전통술 명인 지정을 받았고, 2000년 충남 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그녀가 술을 빚게 된 것은 순전히 시집 와서 생긴 일이다. 그녀는 21살에 시집왔다. 청양 지방으로 갈래를 친 하동 정씨 종갓집이었다. 일도 많았지만, 20대에 혼자된 시어머니의 시집살이가 혹심했다. 새벽 3시에 눈뜨면 혹시나 다시 잠들까봐 아궁이 곁에 쪼그리고 앉아 물을 데우고 밥할 준
임씨는 누룩과 멥쌀로 밑술을 담근다. 4일이 지난 뒤에 찹쌀 고두밥과 누룩을 넣어 덧술을 한다. 이때 두충잎, 두충피, 감초, 구기자뿌리를 달여서 넣는다. 구기자 열매는 따로 달이는데, 달인 구기자 열매와 함께 술에 넣는다. 덧술은 뒤안의 언덕을 파고 만든 광에서 한 달 동안 발효시킨다.
임씨가 말하는 누룩 딛기 좋은 철은 5월과 음력 8월이라고 했다. 그 때를 맞추면 누룩이 잘 되고 그 때를 놓치면 누룩이 잘 안 된다. 노란곰팡이를 피우고 볕에 말려가면서 두 달쯤 지나야 누룩이 완성된다고 했다.
술에는 구기자와 검정콩 말고도 두충과 두충피 그리고 구기자뿌리인 지골피(地骨皮)가 들어간다. 지골피를 달일 때에 향기가 말할 수 없이 좋다고 한다. 구기주의 맛과 향은 진한 편인데, 마시고 나면 입안이 끈적이지 않고 경쾌하다. 누룩의 잔맛
임영순 씨는 “돌이켜보면 시어머니와 남편이 술을 무진장 먹고도 술국 한 번 찾지 않은 것이 신통했다”고 한다. 그녀는 시어머니와 남편이 소주를 마셨다면 아마 술 때문에 죽었을 것이라고도 했다. 그나마 집에서 농사지은 곡식에다가, 땅의 신선인 구기자를 듬뿍 담아서 빚은 술을 드셨기에, 사는 동안 건강할 수 있었다고 믿는다.
임씨는 지금도 예전에 시집살이하던 방식대로 술을 빚기에 말 그대로 약술이 돼 나온다. 술 한 첩이 그대로 보약 한 첩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