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술이 좋은 음식이긴 하지만 지나치게 마시면 몸과 마음이 상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 그래서 이를 삼가도록 하자는 술잔이 만들어졌는데 이것이 바로 ‘계영배(戒盈杯)’다. 어떻게 계영배가 만들어졌는지는 남 교수의 《홀수배 飮酒法의 의식과 허식》에 소개돼 있다.
술꾼들이 내린 술의 정의
인간이 사는 곳에 많은 문화가 있어도 술(酒)의 문화가 으뜸이고, 세상에 많은 문화가 있어도 술 마시는 일보다 즐거운 일은 없다. 영어의 ‘spirit’ 가 ‘술’과 ‘정신(精神)’을 뜻하고 한자문화권에서 精神과 주정(酒精)의 ‘精’자가 동일 글자임을 보아도, 술은 우리의 생활과 문화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인 비노 베리타스(In vino veritas:In wine there is truth)’라는 라틴어 속담이 있다. 곧 술 속에 진리가 있다는 뜻이다. 술이나 마시며 허심탄회하게 얘기 나눌 때 흔히 이 말을 쓴다. 이 말은 로마시대의 과학자 프리뉴스가 쓴 박물지(博物誌?historia maturalis)에서 유래된 말이다. 취중진담(醉中眞談)이다. 다음의 술에 대한 정의들은 주당과 술꾼들이 술이 깨기 전 한 마디씩 한 취중진담들의 정수다.
△ 술의 외상값은 가는 곳마다 있는 법이요, 인생 칠십은 예부터 드물레라. _두보의 曲江二首)
△ 말더듬이도 취해서 노래 부를 때에는 조금도 더듬지 않는다. _조지훈
△ 술집에서 여자의 외모를 믿지 말라, 또한 남자의 지식(책)도 믿지 말라.
△ 아내를 무서워하지 않는 술꾼은 바보, 주정뱅이 남편을 어려워하지 않는 아내는 그 천배의 바보.
△ 신은 단지 물을 만들었을 뿐인데 인간은 술을 만들었다. _빅토르 위고
△ 여인과 돈과 술에는 즐거움과 독이 병존한다. _프랑스 격언
△ 까닭이 있어 마시고 까닭이 없어 마신다. 그래서 오늘도 마시고 있다. _돈키호테
△ 악마가 사람을 찾아다니기에 바쁠 때에는 그의 대리로 술을 보낸다.
△ 인생은 짧다. 그러나 술잔을 비울 시간은 아직 충분하다. _노르웨이 속담
△ 값비싼 것은 오직 첫 번째 술병뿐이다. _프랑스 속담
△ 지금까지 인간이 궁리해 낸 것 중에서 가장 큰 행복을 만들어 낸 것. _사무엘 존슨
△ 술은 비와 같다. 진흙 속에 내리면 진흙을 더 더럽게 하나 옥토에 내리면 그 곳에 꽃을 피게 한다. _존 헤이
△ 나의 음주 변…기호물이니 그저 마시는 것이다. _변영로
△ 비너스의 우유(The milk of Venus). _벤 존슨
△ 술 마시더라도 술로 말미암아 난잡해지지는 않는다.(不爲酒困) _논어
△ 술이 머리로 들어가면 비밀이 밖으로 밀려나오게 된다.
△ 신들의 음료(코냑을 두고). _빅토르 위고
△ 적을 당신의 위로 불러들여 당신의 머리를 뽑아가게 하는 것(Putting an enemy in your stomach to steal away your brains) _무명씨
△ 후세에 반드시 술로써 나라를 망치는 자가 있을 것이다.(後世必有以酒亡國者) _夏后氏十八史略)
△ 바다에 빠져 죽은 사람보다 술에 빠져 죽은 사람이 더 많다. _T. 풀러
△ 흙탕물에서 남성은 여성을, 여성은 남성을 낚았다. 그들이 사용한 미끼는 술이었다. _W.로던 스타인)
△ 당신이 술 마시는 이유. 목이 마를 때는 목을 축이기 위해 마시고, 그렇지 않을 땐 미리 목마를 것을 예상해서 마신다. _토머스 L. 피코크
△ 술이 없는 지구는 산소 없는 지구와 같다. _샌더스
△ 술이 없는 식탁은 애꾸눈 미녀이다. _프랑스 속담
△ 술은 너에게 발을 거는 속임수 레슬러다. _플러터스
△ 술은 인간을 쫒아내고 짐승을 들어낸다. _알베르 까뮈
△ 여자, 와인, 노래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일생을 바보로 사는 것이다. _J. H. Voss
△ 조심하라. 질병과 슬픔과 근심은 모두 술잔 속에 있다. _롱펠로우
△ 술이 있을 때는 술잔이 없었다. 술이 없을 때 술잔만 있었다. _헵벨
△ 술 취하는 사람의 뜻은 술에 있지 않고 산수를 즐기는 데에 있다.(醉翁之意不在酒 在乎山間也) _歐陽水醉翁亭記
△ 우리가 감정 속에서 통합되는 동안 사고를 격리시키는 조건. _에머슨
△ 술잔과 입술 사이에는 많은 실수가 있다. _필라디스
△ 술 취함. 인간의 기지와 사리 분별의 무덤. _G. Chancer
△ 술꾼, 코르크 병따개로 곤경 속의 자기를 끌어내리려는 사람. _볼드윈
△ 악마가 젊음을 공격할 때 사용하는 첫 무기. _제롬
△ 우리는 서로의 건강을 위해서 축배를 들고는 자신들의 건강을 해친다. _제롬
△ 사고로부터 떠나는 휴식(Amere pause from thinking). _바이런
△ 믿을 수 없는 첩자. 내가 그것을 내 위(胃)로 내려 보냈더니, 그것은 곧 내 머리 속으로 가 버렸다. _해리지
△ 여성이 술을 한 잔 마시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두 잔을 마시면 그녀는 품위를 떨어뜨린다. 석 잔째는 부도덕하게 되고, 넉 잔째에 가서는 자멸한다.
△로맨스는 알코올과 같이 즐겨야 하지만 필수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_E.Z.Friedenberg
△ 어떤 일이 발생할지 전혀 알 수 없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남자가 처음으로 술을 마실 때이고, 또 하나는 여자가 마지막으로 술을 마실 때이다, _O. 헨리의‘점잖은 사기꾼’
△ 그리스의 희극작가 에우폴이스에게 어느 날 한 젊은이가 물었다. “술을 마시면 어떻게 되지요?” 그러자 시인이 거침없이 대답했다. “한 잔 마시면 의사가 필요 없고, 두 잔 마시면 싱글벙글, 석 잔 마시면 잠이 오는데, 여기에서 끝나는 게 최상책이야. 넉 잔부터는 술이 술을 부르게 되어 다섯 잔에 목소리가 높아지고, 여섯 잔이면 무례해지고, 일곱 잔 들어가면 권투선수가 되고, 여덟 잔이면 골치가 아프지.”
△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마시고, 다음에는 술이 술을 마시고, 마침내는 술이 사람을 삼킨다.(初則人呑酒 次則酒呑酒 後則酒呑人) _법화경
△ 술은 잘 사용하면 도움이 되는 물건이다(Good wine is a good familiar creature. if it be well used). _오셀로 2막 3장
△ 술이 떨어질 무렵이면 친구도 떨어진다. _소련 속담
△ 하나님은 술꾼과 바보 어린이를 보호하신다. _미국 속담
△ 바보의 혀, 건달의 마음(A fool’s tongue and knave’s heart). _M.콕스
△ 술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고, 사랑은 그것을 뺏어버린다. 술은 우리를 왕자로 만들고, 사랑은 우리를 거지로 만든다. _W. Wycherley
△ 로맨스는 알코올과 같이 즐겨야 하지만 필수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 일시적인 자살, 소극적인 행복, 불행의 일시적인 중지. _B. A. Russel
△ 술병과 같이 목과 배만 있고 머리가 없다(Like a whiskey bottle all neck and belly and no head. _Austin O’ Malley
△ 바보…짐승…악마(Fools…Beasts…Devils). _Henry G. Bohn
△ 인류를 괴롭히는 가장 무서운 해독들의 일부는 술로부터 나온다. 그것은 병과 싸움과 소란과 게으름과 일하기 싫어하는 것과 모든 종류의 가장 많은 불화의 원인이다. _페늘롱
△ 인생의 뜻을 얻었을 때 모름지기 환락을 다하고, 황금 술단지를 공연히 달빛과 마주 버려두지 말라. _이백
넘침을 경계하는 계영배라는 신기한 술잔
계영배(戒盈杯)는 7할 이상을 채우면 모두 밑으로 흘러내려, 넘침을 경계한다는 의미가 있는 잔이다. 과욕(過慾)하지 말라는 것을 보여 주는 상징물이기도 하다. 계영배는 고대 중국에서 과욕을 경계하기 위해 하늘에 정성을 드리며 비밀리에 만들었던 ‘의기’(儀器?사람을 의롭게 하는 그릇으로서, 사람인변(人)을 써서 의기라고 함)’에서 유래한 것이다.
자료에 의하면 공자(孔子)가 주(周)나라 환공(桓公)의 사당을 찾았던 적이 있는데, 생전의 환공이 늘 곁에 두고 보면서 스스로의 과욕을 경계하기 위해 사용했던 의기를 보게 됐다 한다. 환공은 늘 곁에 두고 보는 그릇이라 해서 ‘유자지기(有坐之器)’로 불렀다고 한다. 이를 본받은 공자도 유자지기를 곁에 두고 스스로를 가다듬었으며, 과욕과 지나침을 경계했다. 공자의 공자됨이 바로 이 의기인 계영배에서 비롯된 것이라 전해진다.
이 의기는 분명 밑에 구멍이 뚫려 있는데도 불구하고 물이나 술을 어느 정도 부어도 전혀 새지 않는다. 그러나 7할 이상을 채우게 되면 밑구멍으로 쏟아져 나가게 돼 있었다고 한다. 이는 현대의 ‘탄타로스의 접시’라는 화학 실험기구와 비슷한 원리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도 이와 관련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강원도 홍천 산골에 우삼돌이라는 청년이 살고 있었다. 이곳에서 평생 질그릇이나 구우며 살아야 할 자신을 생각하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한숨을 쉬던 우삼돌은 어떤 시련이 닥쳐와도 이겨내 성공하겠다는 결심을 했다. “이왕 배운 노릇이 질그릇 굽는 일이니 사기로 유명한 분원으로 나가 보겠다”는 결심을 한 우삼돌은 곧 짐을 꾸려 분원으로 가서는 곧 지외장의 제자가 됐다.
불철주야 흙만 갖고 연구를 거듭하기를 여덟 해, 그의 기술은 탁월한 경지에 이르렀다. 스승은 그의 재주를 사랑했고, 그 역시 스승을 따라 사제지간의 정이 매우 돈독했다. 이렇게 피땀 어린 노력으로 이뤄진 그의 기술은 만인이 인정할 정도에 이르렀고, 어느 해 봄 왕에게 진상할 반상기를 만들게 됐다. 스승은 매우 기뻐하며 새로 옷 한 벌을 지어 입히고, 명옥이라는 새로운 이름도 지어줬다.
나라에 바칠 반상기는 상감이 한여름 동안 조석 수라를 받을 사기그릇이었다. 웬만한 기공은 만들 엄두도 못내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의 친구들은 그를 시기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릇이 잘 빚어지지 않게 할 흉계를 꾸몄다. 명옥은 이런 사정을 알지 못한 채 밤낮으로 그릇 만들기에만 몰두했다. 그는 그의 스승에게 열심히 배우고 익혀 마침내 스승도 이루지 못한 설백자기(雪白磁器)를 만들었다. 드디어 그가 만든 반상기가 왕실에 진상이 됐고, 왕은 설백자기의 아름다움에 경탄하며 상금과 치하를 아끼지 않았다. 지외장은 자신의 제자가 그 같은 영광을 차지한 것이 너무나 기뻐 눈물을 흘렸다.
분원 고을에선 자기네 고장에서 나온 이 명기공의 전도를 축복하는 소리가 곳곳에서 났다. 그러나 그를 시기하는 동료들의 음모는 더해만 갔다. 이후 그의 재주를 높이 평가한 서울에서 그릇 주문이 쇄도하기 시작했고 자연스레 매우 바빠졌다. 차츰 재물이 모이기 시작했다. 매일 계속되는 일에 지친 몸을 쉬고 싶을 때 그의 동료들이 찾아왔다.
“매일 그처럼 일만 하니 어디 몸이 견뎌 내겠느냐? 조금씩 쉬면서 일하는 것이 오히려 능률적일 거야. 그래서 내일은 소내강에 선유(船遊)나 한 번 차려서 우리도 놀고 자네도 위로하자고 몇몇이 의논을 했네. 자네도 그리 알고 내일은 놀러가세.” 동료들은 이렇게 그를 꾀었다.
명옥도 고되기 한량없던 터라 반갑기 그지없는 말이었다. 명옥은 동료들의 강권에 못 이겨 그렇게 하기로 하고, 한편으론 그들의 우의를 고맙게 생각했다. 다음날 소내강에는 배 한 척이 떴고, 배 안에선 노랫소리가 흥겹게 퍼졌다. 명옥은 술과 여자에 마음을 홀딱 뺏겨 희희낙락했다. 동료들은 명옥이 술과 여자에 마음을 빼앗겨 다시는 기술 연구를 못하게 할 참으로 미리 기녀들에게 명옥의 마음을 사로잡도록 당부해 둔 것이다. 해가 지도록 진탕 술과 여자에게 취해 있던 명옥은 집에 돌아와서도 향긋한 분 냄새가 자꾸 떠올라 견딜 수 없었다.
다음날 날이 밝기 무섭게 조반도 먹지 않고 돈주머니를 찬 채로 기녀 집으로 달려간 명옥은 하루 종일 정신없이 술을 마셨다. 다음 날, 그 다음 날도 매일 술과 여자에 빠져 지냈다. 날이 갈수록 명옥의 주색(酒色)은 그 도를 더할 뿐, 좀처럼 옛날로 돌아올 것 같지 않았다. 보다 못한 스승은 기녀집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명옥의 마음을 되돌리려 애썼지만, 명옥은 스승에 대한 죄스러움보다 여자에 대한 마음이 앞선 탓에 회개할 줄을 몰랐다. 동료들은 또 그에게 다음과 같이 꾀었다.
“질그릇을 갖고 촌으로 돌아다니며 집집마다 뿌려 놓고 가을 추수 때 그 값을 곡식으로 받으면 잘 팔릴 것이고, 이익도 많을 테니 한 번 해봄세.”
명옥은 돈이 필요했던 터라 당장 승낙을 하고선 그들과 함께 배를 타고 해남 쪽 땅으로 향했다. 가던 도중 폭풍이 불어서 배가 뒤집혔다. 친구들은 모두 빠져 죽었고 명옥 혼자만 고기잡이배의 도움으로 간신히 구조됐다. 명옥은 문득 그간의 행동에 대한 잘못을 깨닫고 매일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기 시작했다. 낮에는 종일 강가와 솔밭을 거닐었다. 이렇게 새벽마다 기도드리기를 석 달 열흘. 백일기도를 마친 명옥은 다음날부터 방에 들어앉아 무엇인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만들었다가 부수고 또 만들었다가 부수기를 수십 번 반복했다. 그렇게 얼마가 지난 섣달그믐에 명옥은 조그만 술잔 하나를 만들어서 지외장에게 바쳤다. 물을 그 술잔에 가득히 부어놓으며 “스승님, 이제 이 물이 없어집니다” 하고 말했다. 그러자 술잔에 가득 부어 놓았던 물이 한 방울도 남지 않았다. 스승이 잔을 한참 동안 살펴보다가 “참 신기하구나. 그런데 이 잔이 술잔이므로 술을 부어 마시게 될 것인데 없어지면 어찌하느냐?”고 물었다. 명옥은 스승을 바라보며 이번에는 잔에 물을 반쯤 부었다. 그러자 물이 그대로 있었다. “자, 이제 보십시오. 물이 그대로 있습니다. 이 술잔을 계영배(戒盈杯)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스승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명옥은 자신의 필생 사업으로 그 잔을 만든 것이다. 그런데 그 잔을 의주의 임씨가 우연한 일로 깨뜨렸다. 이상한 일은 그 잔이 깨지던 날 명옥이 이 세상을 떠났다. 그 후 술잔은 의주의 임씨라는 사람이 소유하게 됐는데, 그가 바로 조선시대 의주 거상 임상옥(1779~1855)이다. 계영배에 대한 시 한 수가 전해지고 있다.
계영배에 술을 담아 마시면
명옥이의 넋이 술 속에 어리고
계영배에 술을 담아 마시면
천세만세 산다 하네
계영배가 아직까지 남아 있었다면 고려자기에 뒤지지 않는 훌륭한 도자기로 명옥의 이름을 빛냈을 것이다. 계영배의 한자성어는 과음을 경계하기 위해 술이 일정한 한도에 차면 새어나가도록 만든 잔, 즉 ‘절주배(節酒杯)’다.
계영배는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인간의 끝없는 욕심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과 ‘넘치면 곧 아무 것도 없는 것과 같다’는 교훈을 준다. 과유불급이다. 이는 곧 자신의 욕심만 채우려다가 모든 것을 잃고 만다는 진리를 보여준다. ‘재상평여수(財上平如水) 인중직사형(人中直似衡)’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즉, 재물은 평등하기가 물과 같고 사람은 바르기가 저울과 같다는 뜻으로, 마음속에 항상 담아둬야 할 좌우명이라 할 것이다.
홀수배 음주법의 의식과 허식|남태우|창조문화|45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