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술

술 빚기 고수, 최원

술을 인생에 비유할 정도니, 그도 경지에 이른 것일까?

“좋은 술은 처음엔 쓰지만 마지막엔 달잖아요.
인생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요?”

술 빚기 고수, 최원

“하고 싶은 일은 해야 하는구나” 느껴 바텐더 도전
한 전시회서 우리술 만난 후부터 한없이 빠져들어

“어느날 용수에 조금 남은 청주 한 모금 마셨을 때
정말 미치도록 맛있는, 뒤통수 때리는 느낌이었죠”

“술빚을 때만큼은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아 행복해”

이 남자는 왜 술을 잘 빚는다는 소문이 났을까. 아니, 도대체 얼마만큼 해야 술을 잘 빚는다고 소문이 날까. 허영만 화백의 ‘식객(食客)’에도 얼굴을 내비쳤으니 객관적으로 인정받은 솜씨 정도는 된다고 해야 할까. 궁금했다. ‘코리아푸드엑스포’가 한창이던 20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최원(崔源?37) 씨를 만났다. 식객 속에서 봤던 그를 잊지 않으려 노력했다. ‘고수(高手)필’ 충만해 보이는 그와 커피 한 잔 마시며 얘기하려고 행사장 내 커피 부스에 들어섰다. 그는 에스프레소를 선택했다. “원래 커피를 자주 마시냐”고 물었더니 “에스프레소밖에 안 마신다”고 했다. “어쨌든 범상치는 않네….” 혼자 중얼거렸다.

‘칵테일’이라는 영화가 있다. 대부분 ‘톰 크루즈 영화’로 기억하지만 그는 중학교 때 이 영화를 본 후 없던 꿈이 생겼다. “바텐더가 돼야지.”
고교 졸업 후 그는 고향인 안면도에서 서울로 올라왔다. 곧바로 요리학원에 수강했다. 바텐더가 될 수 있는 길을 거기서 찾은 것이다. 어찌하다 보니 요리사 자격증까지 따게 됐다. 그는 서울의 한 호텔에서 일하다가 입대했다.

그는 두 번 죽을 뻔 했다. 모두 군대에서다. 헌데, 그 과정이 ‘드라마’다. 입대 후 운전병 보직을 받은 그를 두고 어느 날 호텔 전력(前歷)이 화제가 되더니, 장교식당으로 뽑혀 가냐 마냐의 기로에 서게 됐다. 선택을 종용받은 그는 운전병을 택했다. 누구라도 장교식당을 선택했을 법 하지만 그는 달랐다. ‘줄’ 하나에 군 생활이 좌우되는 현실을 감안하면 그는 대단히 ‘어리석은 선택’을 한 것이다. 이유는 단순했다. 논산훈련소에서 강원도 고성까지 함께해온 동기 때문이다. 더 웃긴 건 그는 그때까지 운전을 못했다는 사실이다. 군대나 되니까 그런 일도 가능하다.
한 번은 추운 겨울, 눈으로 땅이 얼어붙은 고개를 넘는데 바퀴가 헛돌더니 이내 미끄러지면서 뒷바퀴가 절벽에 걸렸다. 캄캄한 밤이었지만 머릿속과 얼굴은 하얘졌다. 죽기 바로 전에 보인다는 ‘인생의 파노라마’ 현상을 어린 나이에 겪게 될 줄 꿈에도 몰랐다. 순간의 기지(機智)로 위기를 벗어나긴 했지만, 선임(先任)과 그는 탈진 직전이었다. 다리가 후들거려 가만히 서 있기가 힘들었다. 반쯤 나간 정신을 되돌리려 담배 한 대 피워 물었다. 그러자 번뜩 생각이 났다. “아, 정말 하고 싶은 건 해야겠구나.”
또 한 번은 도로 운행 중 앞차를 추월하려다 반대 차선에서 마주오던 덤프트럭과 충돌할 뻔했다. 그가 운전한 트럭의 왼쪽 사이드미러와 덤프트럭의 왼쪽 사이드미러의 거리가 10㎝도 채 안 된 듯 보였다. 순간 모골이 송연해지고 자연 몸이 옹송그려졌다. 얼마 가지 못해 차를 세워두고 내려서 담배 한 대 피워 물었다. 그러곤 또 생각했다. “아, 정말 하고 싶은 건 해야겠구나.”
그는 “두 차례 죽음 직전의 상황에서도 그런 생각이 또렷하게 들었던 건 그만큼 바텐더가 되기를 절실히 원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제대하자마자 바텐더가 되기 위해 공부했다. 우선 조주사 자격증부터 땄다. 잠시 한 호텔에서 일했지만 곧 집어치우고 당시 바텐더 양성 교육기관인 씨그램스쿨(현 조니워커스쿨)에 다녔다. 본격적으로 바텐더가 될 참이었다.
그의 턱 선(線)은 각이 져있다. 장점이자 단점일 수 있다는 얘기다. 바텐더 면접을 수없이 봤지만, 그때마다 그의 턱 선은 단점으로 작용했다. 당시의 바는 웨스턴이 대세였고, 그에 맞춰 바텐더 역시 마스크(mask)가 받쳐줘야 했는데, 본인은 그걸 만족시켜주지 못한 것 같다고 했다. 열정은 외모 탓에 잠시 빛이 바랬다.
그 즈음, 부평에서 자그마한 식당을 운영하던 그의 친누나가 큰맘 먹고 가게를 물려줬다. 8~9평의 공간,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하던 중 지인이 “바를 해보라”고 권했다. 생각해보니 혼자서 해도 되겠다 싶었다. 바텐더가 꿈이었으니 더 바랄 게 없었다.
정확히 1년 반만에 그는 “가게를 말아먹었다.” 하루는 진열돼 있는 맥주들에 눈이 갔다. 전 세계 맥주를 취급했던 터라 이것저것 몇 병을 골랐다. 그러고는 한 모금씩 맛보기 시작했다. “맥주가 이런 맛이었구나. 서로 이렇게 다를 수가 있구나.”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가 맨 처음 조우(遭遇)했던 술은 우리술이 아니라 맥주였다.

2002년, 아는 형의 음식점에 취직했다. 메뉴는 장어. 마침 그때 코엑스에서 식품 관련 전시회가 열렸다. 정보 취합차 그곳을 방문했다. 이것저것 시식하던 그에게 한 부스가 눈에 띄었다. 한국전통주연구소 부스였다. 거기선 우리술 빚기 시연이 펼쳐졌고, 시음도 할 수 있었다. 무심코 브로슈어 하나를 가지고 왔다. “괜찮은데, 한 번 수강해볼까?”
그는 관심 있는 종목이 생기면 미쳤다 소리 들을 때까지 파는 성격이다. 우연히 우리술과 마주쳤지만 이내 미칠 듯이 빠져들었다. 때마다 고향에서 보내온 80㎏짜리 쌀 한 가마는 죄다 술 만드는데 썼다. 저녁에 배고프면 술밥으로 해결했다. 망치기도 많이 망치고 만들기도 꽤 많이 만들었다. 줄곧 연구소에서 시간을 보냈다. 아는 형은 걱정 반 짜증 반 섞인 목소리로 “너무하는 거 아니냐”고 꾸중했다. 그때마다 그는 “형, 일 못한 만큼 월급에서 까라”고 했다.
한 번은 누룩에 대한 책을 내보자고 연구소장에게 제의했다. 그때까지 우리 전통 누룩에 대한 서적은 전무했다. 욕심이 생겼고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누룩 빚을 때 필요한 닥나무 잎이나 약쑥, 도꼬마리 등을 얻으려 원주를 비롯해 방방곡곡 누볐다. 당시 그는 차를 한 대 샀다. 좌석 비닐도 뜯지 않은 새것이었지만 그에겐 초재(草材) 운송용 차에 다름 아니었다. 나중에 보니 트렁크엔 거미줄이 잔뜩 끼었고, 집안 행거엔 거미집?나방집까지 만들어졌다. 아무리 혼자 살아도 이건 좀 심하다 싶었지만 그 수는 점점 더 늘어갔고 진공청소기는 점점 더 막혀갔다. 잘 만들어져 보관중인 누룩도 점점 더 쌓여갔다. 그러니 그 누룩들로 빚은 술은 얼마나 맛있었을까.

어느 날 연구소에 한 방송사가 취재를 왔다. 그는 취재가 잘 이뤄지도록 옆에서 도왔다. 그러다 한 항아리에 박힌 용수 위로 조금 떠있는 청주 한 모금을 마셨다. 만화에서나 봄직한 장면이 그에게 펼쳐졌다. 온통 별들이 머리 위로 돌고 있고 눈이 엄청 커진 것을 느꼈다. 색, 향, 맛, 뒤끝, 목 넘김, 감칠맛까지 뭐 하나 나무랄 데가 없었다. “정말 미치도록 맛있는”, “뒤통수 때리는” 술을 마셨다는 사실에 몸까지 부들부들 떨렸다. 만화 속 대사 같은 한 마디가 떠올랐다. “난 지금 술을 마신 것이 아니라 정말 맛있는 요리를 먹었다.”
두 말할 필요 없이 그때부터 우리술에 더 빠져들었다. 더 많이 빚었다. 더 많이 울고 웃었다. 더 많이 감동했다.
한 번은 허영만 화백 팀이 연구소로 연락을 해왔다. 만화 ‘식객’에 술 편을 준비 중인데 협조를 구한다고 했다. 연구소장은 그를 추천했다. 낭중지추(囊中之錐). 이럴 때 쓰는 사자성어다. 그 덕분에 얼굴이 좀 알려지기도 했다. 이후 허영만 화백 팀에게서 한 번 더 연락이 왔고, 그때도 그는 도움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현재 술을 혼자 빚는다. 그런 지 5년쯤은 됐다. 그게 그의 생활이다. 압구정 ‘무이무이’(그는 이곳의 지배인이다)에서 일이 끝나면 집으로 가 TV를 보며, 혹은 음악을 들으며 누룩을 빚고 술을 빚는다. 괜찮다 싶은 건 나눠주기도 한다. 허나, 잘 만든 술은 혼자만 간직한다.

그는 서일대 문예창작과를 나왔다. 습작(習作)도 꽤 된다. 그중 ‘파초’ 한 편을 보여줬다. 원래 정독(精讀) 습관이 있는 터라 한참을 뚫어지게 보는데 “시를 그렇게 읽는 사람이 어디 있냐?”며 나무랐다. 시를 이해하려 들지 말라며 그저 느껴지는 대로 느끼면 그 뿐이라고도 했다. 그러고 보면 시와 술은 한참을 닮은 듯하다. 잘 빠진 시 한 편을 만났을 때의 느낌은 잘 빚어진 술 한 잔을 마셨을 때의 그것과 같다. 옛날 사람들은 술 한 모금에 시 한 수를 지어 부르곤 했다지 않나.

4시간여 가까이 인터뷰를 하는 동안 어느덧 행사장은 철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제야 “푸드엑스포 취재는 틀렸네” 하는 걱정이 생겼다. 코엑스 밖에서 사진촬영 후 지하철을 같이 탔다. 다음에 술 빚을 때 불러달라며 넉살좋게 얘기하곤 헤어졌다. 집으로 가는 길, 한 번 생각해봤다. “최원씨는 고수인가?” 헌데,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가 아주 예쁜 말을 했기 때문이다.
“난 여태 무엇을 해서 칭찬 받아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술은 그렇지 않았어요. 신기해했고, 잘한다 말해줬어요. 술을 빚을 때가 가장 행복해요. 단순히 술 빚는 게 좋아서가 아니라 그 순간만큼은 아무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거든요. 술은 인생과 비슷해요. 둘 모두에게 쓴맛 단맛 다 있죠. 좋은 술은 처음엔 쓰지만 마지막엔 달듯이 인생도 그래야 하지 않겠어요? 술 빚기 고수라고요? 흠…. 지금은, 그저 잘 익게 하고, 잘 끓게 하고, 그러니 잘 빚을 수 있을 것 같은 정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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