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술

룸살롱이 아니면 어떠랴, 대폿집이라도 좋다

남자는 자고로 ‘3근(根)’을 조심하면 큰 화(禍)를 면할 수 있다고 했다.
그 중 하나가 세치 혀(舌)다. 즉, 말(舌禍)을 조심하라는 것이다. 한 번 뱉은 말은 주워 담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에서 말실수로 인생을 망친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 그래서 옛 성인들은 세 번 생각하고 한 번 말하라고 했다.
오래전 전 한나라당 안상수 대표가 연평도에서 보온병을 포탄이라고 했다가 망신을 당했다. 그리고 여기자 3명과 점심을 먹으며 “요즘 룸(살롱)에 가면 오히려 자연산을 찾는다고 하더라. 요즘엔 성형을 너무 많이 하면 좋아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했다가 곤욕을 치르고, 결국 국민 앞에 사과를 했다.
룸살롱에서의 자연산이고 성형이고 하는 말은 서민들에겐 남 이야기 같은 말이다. 룸살롱은 월급쟁이 서민들이 평생 한 번 가볼까 말까하는 고급 술집이다. 물론, 돈 많은 사람들이나 술대접을 받아야 하는 고관들 입장에선 서민들이 포장마차 드나들듯 하겠지만, 월급을 몽땅 들고 가도 하룻밤 술값으로 부족하다는 룸살롱은 분명 서민들에겐 그림의 떡이다.
룸살롱은 고급 술집의 대명사다. 그런데 이런 고급 술집 문화는 비단 오늘날의 이야기는 아닌 듯하다. 삼국시대부터 서민들과는 상관없이 고급 술집은 면면이 이어져 내려왔다는 게 정설이다. 이곳에서 권세가들이 정치적 담론을 해왔고 그들만의 여흥을 즐겼다. 그러나 1970년대 말부터 이런 식의 술집이 폭발적으로 늘어났으니, 바로 룸살롱이다. 특수 계층만 드나들던 고급 술집에 대중이 드나들게 됐다.
우리나라 주점에 관한 기록은 고려시대에 비로소 나타난다. 고려 성종2년(983년) 송도에 처음으로 주점의 설치를 허가한 것으로 전해지고, 숙종 7년(1102)부터는 서민 대상의 주점이 곳곳에 생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당시 개경에 좌우 주점을 두고 각 주와 현에 주점을 내었는데 이러한 관설주점은 당시 해동통보, 동국통보 등의 화폐를 주조해 유통시키기 위한 유인책이었다고 한다. 결국 화폐 통용의 이익을 교육하려는 목적으로 관설주점을 개설한 것이다. 그 외에 민간에서 운영하던 주점이 문헌에 나타난 구체적인 기록은 없으나 고려가요 ‘쌍과점’에 “술파는 집에 술 사러 갔더니 그 집 주인이 내 손목을 쥐더라”는 것을 보아 민간에도 술을 소매하는 집이 이미 정착했던 것 같다. 재밌는 것은 고려시대에 국가적 종교로서 각종 특혜를 누렸던 불교의 사원들이 가장 규모가 큰 주점이었다는 사실이다. 불교 사원들은 세금과 역을 면제받고 술, 국수, 마늘, 소금 등을 판매하면서 숙박업까지도 했다.
19세기 후반부터 여행자가 불편을 느끼지 않게끔 전국의 교통요지 곳곳에 주막이 생겼다. 조선시대 말기에 이르러서는 상업이 활발해짐에 따라 헌주가, 소주가, 병주가, 주막, 목로주점, 내외술집, 모주가, 색주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주점이 등장한다.
1900년대 초만 해도 서울에 고급 요정 같은 것은 없었고, 일반 대중이 많이 이용하는 목로주점이 술집의 주종을 이루고 있었다. 이어서 1930년대에는 신식 술집인 카페가 등장한다. 지금도 다양한 형태로 영업하고 있는 카페는 이미 일제강점기 때부터 성행했던 술집이다. 교수 부인의 춤바람을 다룬 영화 ‘자유부인’(1955)의 인기가 말해주듯, 50년대 도시에서는 춤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그 당시 서울에는 카바레, 댄스홀이 급증했다. 이러한 카바레는 5.16 이후 그때까지 유행했던 댄스홀이 폐쇄되면서 성행하기 시작했다.
5.16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더욱 번창한 요정에 ‘고급술과 돈, 그리고 여자’라는 삼대요소가 있어야 했듯이 룸살롱에도 이 같은 삼대요소가 있기는 마찬가지다. 꽃 같은 젊은 여성이 고급술을 따르고 흥청망청 돌아가는 세상사에서 서민들은 겨울 한파를 힘겹게 넘기고 있다. 소시민들은 룸살롱이 아니더라도 대폿집에서 소주 한 잔 부담 없이 마실 수 있으면 그것이 행복이려니 하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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