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는 탁주나 약주를 화력(火力)으로 증류시켜 얻은 증류주이기 때문에 알코올 농도가 현저히 높다. 이 때문에 몇 잔만 마시면 금방 취한다. 그러나 비교적 쉽게 술이 깨고 뒤끝도 깨끗한 편이다. 청주나 탁주는 쉽게 산폐돼 보존이 어렵지만 알코올 농도가 매우 높은 소주는 밀폐해두면 장기간 보관이 가능하다.
소주는 불을 지펴 증류시키는 제조과정 때문에, 혹은 알코올 도수가 높아 술에 불이 붙는다고 해서 ‘화주(火酒)’라고도 했다. 밑술을 증류해 이슬처럼 받는다고 해서 ‘노주(露酒)’로도 불렀고 무색투명하다고 해서 ‘백주(白酒)’라고도 했다.
우리나라에 소주가 전해진 건 오래 전 일이다. 1300년경인 고려 후기 때 원(元)나라에서 전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원나라가 페르시아의 회교문화를 받아들이면서 페르시아의 증류법이 몽골을 거쳐 우리나라에까지 전해졌다는 것이다. 소주를 아라비아어(語)로 ‘아락(arag)’이라고 하는데, 평안북도에서 ‘아랑주’, 개성에서 ‘아락주’라고 한데서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지금도 경상도나 전라도 몇 곳에선 소주를 고을 때 풍기는 알코올 냄새를 ‘아라기’ 냄새라고 한다. 특히 몽골군의 주둔지였던 개성과 전진 기지가 있었던 안동, 제주도부터 소주 제조법이 발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 명(明)나라 때의 의서(醫書) 《본초강목(本草綱目)》에는 ‘소주는 예로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고 원나라 때에 비로소 만들어진 술이다’라고 기록돼 있다.
외람된 얘기지만, 조상에게 제사를 드릴 때 제주(祭酒)로 청주나 탁주를 사용하고 소주는 사용하지 않는데, 이는 소주를 우리 고유의 것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소주는 고려~조선시대엔 약용(藥用)으로 마시거나 왕 또는 사대부들이 마셨던 술이다. 그러던 것이 점차 서민들에게도 보급돼 각 가정에서 빚어 마시게 됐다. 조선 성종 땐 일반 민가에서까지 소주를 빚어 마시는 건 극히 사치스런 일이므로 소주 제조를 금지해야 한다는 상소(上疏)가 임금에게 올라온 적도 있다고 한다.
1919년엔 평양에 소주공장이 세워졌고, 곧이어 인천과 부산에도 건설되면서 재래식 누룩을 이용한 소주는 흑국(黑麴)소주로 바뀌게 됐다. 52년부터는 값싼 당밀을 수입해 만들었다. 그러다 광복 후 정부가 양곡관리법을 시행한 65년부터는 곡류로 소주를 만드는 게 금지됐다. 이 때문에 증류식 순곡주가 자취를 감추고, 고구마 당밀 타피오카 등을 원료로 해서 만든 주정(酒精)을 사용한 희석식소주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후 88년 서울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주류제조에 관한 규제가 완화되면서 다시 전통소주의 생산이 가능하게 됐다. 우리의 전통문화를 전수․보전하고, 외국인 관광객에게 우리의 술을 널리 알리기 위해 그 같은 조치를 취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