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근 칼럼
생의 환희를 노래하기 위한 권주가, 이백의 將進酒
박정근(대진대 교수, 윌더니스 문학 주간, 소설가, 시인)
그래서 그는 황하강의 물을 바라보면서 인생의 허무한 시간을 사유한다. 하늘에서 떨어진 빗물이 황하로 흘러가 바다로의 긴 여정을 시작하지만 다시는 원점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는 시인의 감정은 어떨까. 그는 “황하의 물이 하늘에서 내려와/힘차게 흘러 바다에 이르나 다시 오지 못 하는 것”으로 묘사하면서 시적 각성을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백은 “높고 귀한 집 귀부인도 거울에 비친 흰 머리 슬퍼하느니/아침에 검푸른 머리 저녁에 눈같이 희어진 것을”이라고 젊음의 찰나성을 한탄한다. 하지만 그는 인생의 덧없음을 인식하나 슬픔의 늪으로 빠지지 않는다.
오히려 이백은 짧은 삶의 시간을 빠짐없이 생의 환희를 위해서 바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흔히 실용주의 자들은 오늘을 내일을 위한 준비로 여긴다. 그래서 내일 행복하기 위해서 오늘은 절제하고 헛되이 낭비해서 안 된다는 도덕적 관점을 내세운다.
특히 젊음과 열정을 즐기는 행위를 방종이나 무절제라는 부정적 가치관으로 치부해버린다. 성경은 아비의 재산을 술과 여자에 빠져 탕진하고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적고 있다. 자신에게 허용된 재산과 젊음을 마음껏 즐기는 행위를 “방탕”이라고 부정적으로 매도하는 것이다.
대조적으로 이백은 젊음의 시간은 한번 가면 다시 오지 않는다는 인생의 진실을 알기에 그 순간들을 즐기는 데 전념하고 몰두하고자 한다. 젊음이란 무기를 지니고 있을 때 쾌락을 추구하라고 권한다. 그래서 술이 채워진 잔을 그대로 두어 달이 뜨게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그것은 술을 잔에 채웠으면 빨리 마셔야 한다는 의미이다. 하늘이 준 달란트는 마음껏 써야 하며 돈은 낭비해야 다시 벌 수 있다고 본다.
시인은 흔히 방탕을 재현하는 “酒池肉林”을 권하는 듯 “양고기 삶고 소 잡아 또 즐기리니/모름지기 한 번 마시면 삼백 잔은 마셔야 하리라”라고 노래한다. 이백이 권주가에서 쓰고 있는 시귀 그대로라면 희랍의 디오니소스의 주신제를 방불케 하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심지어 술을 통음하기 위해서 한 번에 삼백 잔을 마셔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 시의 제목이 권주가인 “將進酒”이듯이 작시의 목적은 친구에게 술을 권하는 것이다. 물론 혼 술을 즐길 수도 있겠지만 술은 역시 친구와 같이 마시는 것이 제격이다. 물론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마시는 것도 나쁠 것도 없지만 이백의 경우는 술이야말로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친구와 함께 하는 술이 더욱 남성적 통음으로 인식한 것 같다.
여성적 음주는 아무래도 술의 질과 분위기를 살리기에 치중될 수밖에 없다. 또한 연인과의 음주는 사랑을 나누는 행위에 비유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시인은 여인보다 친구를 호명하고 자신과 술 마시기에 동참해줄 것을 권한다.
그는 “내 친구 잠부자, 단구생이여/그대들에게 내 술 한잔 권하려 하니, 거절하지 말게나”라고 적고 있다. 이 시귀는 친구에게 던지는 얼마나 다정한 제안인가. 아마도 이 술은 결코 술 자체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리라. 이백은 술잔 안에 자신의 진정한 우정을 담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도 그랬거니와 친구와 술을 마시면 항상 따라오는 것이 있다. 그것은 진한 인간미가 담겨있는 음악이다. 술이 얼큰한 상태가 되면 마음도 함께 흥겨워지고 타인에게 더욱 관대해지는 것이 당연하다. 그래서 마주 앉은 친구에게 음주를 하면서 느끼는 감동을 노래로 전하고 싶지 않겠는가.
시인은 “그리고 내 또한 노래 한 곡 불러주고 싶으니/그대들 나를 위해 귀 좀 기울여 주게나/음악과 귀한 안주 아끼지 말고/부디 오래 취하여, 제발 깨지 말았으면 좋겠네”라고 적고 있다.
여기서 인상 깊은 시귀는 노래를 부르며 술에 취한 달콤한 기분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다는 고백이다. 우리가 술을 마시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지 모른다. 세상의 근심과 걱정을 다 잊고 오직 술을 나누는 친구와 우정이란 쾌락을 오래 공유하는 것이다.
이백은 세상의 권력과 재력을 상징하는 말과 갑옷도 시인을 행복하게 해주는 술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멋진 말과 값비싼 갑옷이 어떻게 시인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겠는가. 시인은 이 시의 마지막 행에서 “오색빛 나는 말과 천금이나 되는 갑옷도/아이를 불러 나가서 술과 바꾸어 오게 할 테니/그대와 함께 만고의 근심을 녹여 보세”라고 노래한다. 인간의 근심을 녹여낼 수 있는 것은 권력이나 재물이 아니라 인간의 닫힌 마음을 풀어낼 수 있는 술이라는 시심이 담긴 시귀가 아닐 수 없다. 즉 술이야말로 시인의 진정한 보배라는 의미이다. 세상 욕심을 다 버리고 막걸리 한 병으로 행복에 취했던 천상병의 시심이 이백의 술의 예찬론과 맥을 같이 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