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과 관련된 사람들은, 그래도 ‘사가신사’의 위치는 알고 있으려니 생각했던, 필자의 처음 생각이 일본을 너무 과신했던 것은 아닌지 곱씹어본다. 이렇게 숨어 있는 곳 ‘사가신사’를 필자가 찾는 까닭은 백제 ‘인번’, ‘수수보리’에 대해서는 많이 알고 있지만, 정작 ‘사가신사’를 알거나, 갔다 왔다는 사람을 아직 만나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 “술을 한다는 사람”으로서 ‘사가신사’는 호기심을 넘어 정복해야 할 목표이고, 장악해야 할 대상이었다.
‘사가신사’를 찾은 것은 일본 도착 다음날, 21일(화) 새벽이다. 일본 현지의 지도를 구해서 밤 새 뒤적인 뒤에야 겨우 위치를 찾은 것이다. ‘사가신사’는‘ 긴테쓰 미야즈(Kintetsumiyazu)’라는 작은 간이역 인근에 있었다. 피라는 카메라와 지도를 챙겨들고 교토역에서 나라방면으로 전차를 탔다. 한적한 교외를 달리던 전차가 ‘긴테쓰 미야즈(Kintetsumiyazu)’역에 섰다. 하나밖에 없는 출구를 통해 역사 밖으로 나와보니 아주 작은 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역 주변은 평야지대였다. 평야 가득 펼쳐진 논에서 벼가 자라고 있었다. 평야가 넓은 우리나라의 전라도 같은 느낌이다. 낮은 구릉지대를 의지해 평야 가득 벼농사가 한창이다. 관개 수로 시설이 아주 잘 돼 있는 농촌처럼 보인다.
간이역, 긴테쓰 미야즈(Kintetsumiyazu)’에서 출발해 ‘사가신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곧 나타난 마을이 아주 작다. 길가에 사람도 적다. 한적한 길을 지나면, 아주 좁은 도로에 설치된 앙증맞은 신호등이 있다. 서너 발자국만 넘으면 되는 좁은 도로 폭. 신호등이 아기자기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사가신사’는 이곳 신호등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입구가 있다. 도로변에 별도의 인도가 없어 위험해 보이기조차 하는 작고 앙증맞은 길을 따라간다.
‘사가신사’입구
뭔가 대단해 보이는데 조금 떨어져서 보면 사람들이 찾기 힘든 곳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좁고 인도도 없는 자동차 도로와 ‘사가신사’ 입구가 바짝 붙어있었다. 문 밖을 나서면 바로 자동차 도로라는 말이다. 위험한 곳에 ‘사가신사’ 있었다. TV에서는 아주 크게 나왔던 ‘사가신사’. 그 때 비춰주던 ‘안내팻말’. 그 생각만 했더라면 자칫 찾지 못하고 돌아 올 뻔 했다. ‘안내팻말’이 화면에서 봤던 것보다 너무 작았기 때문이다. A4용지보다 조금 더 큰 흰색 나무판에 잘 보이지도 않게 세워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의 다른 신사들과는 많이 비교가 되었다. 아마도 ‘사가신사’에 모신 신은 일본 사람들도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는 신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사가신사’ 두 번째 입구로 향했다.
가는 길에 쓰러져가는 ‘주차금지’ 표지가 왠지 슬프게 느껴진다. ‘사가신사’ 주자창 같은 곳은 모두 동네 차들이 모여있는 것 같았다. 입구에 있는 빨간 신사를 지나 계단을 올라가면 작은 공간이 하나 나오고 여기서 계
막상 ‘사가신사’를 가서 직접 눈으로 보니 사실 실망감이 매우 컸다. 들어오는 입구도 그랬고 관리하는 사람이 없어 쌓인 낙엽이나 거미줄 등이 신사를 매우 음산하게 만들고 있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쓰러져가는 표지판과 자칫 찾지도 못 할 뻔한 작은 ‘사가신사’ 안내판은 왠지 쓸쓸해 보이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수수보리수수보리, 백제인번 등을 말하지만 정작 ‘사가신사’는 버려져 있는 것 같았다.
오래전부터 궁금했다. ‘사가신사’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어떤 모습일지
우리나라가 누룩을 언제부터 만들었는지는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곡물을 재배하고 농사 기술이 발달하게 되면서 술의 원료도 과실이나 꿀 등에서 자연스럽게 곡물로 빚는 술로 넘어왔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지나 쌀, 밀, 보리가 재배되면서 곡물을 당화시키는 엿기름에서 점차 밀을 이용한 누룩으로 발전하게 됐고 이것이 아마도 최초의 누룩 기술이었을 것으로 보여 진다. 이렇게 누룩으로 술 빚는 기술이 일본에 전해진 것은 어떻게 보면 너무 당연한 것이다.
이번 교토의 사가신사 방문을 통해 크게 두 가지 느낀 것이 있다. 하나는 교토에서 우리술의 뿌리를 찾는 다는 것이 큰 의미가 없다는 것과 두 번째는 역설적으로 우리의 뿌리에 대한 연구가 없었다는 것이다. 첫 번째는 교토 자체가 한국의 손이 너무 많이 닿아있는 부분이라 꼭 우리나라의 뿌리를 찾지 않아도 교토 자체가 우리의 뿌리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그렇게 말로 떠들고 다녔던 역사 유적지에 대한 관리가 전혀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