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술

정월 대보름 아침에 마시는 ‘귀밝이술’

귀 밝아지고 총명해진다고 믿어
耳明酒·治聾酒등 이름도 여러 개

차가운 막걸리가 귀를 밝게 해주는데      
아침에 마시는 것이 가장 좋다네.
가옹(家翁)에게 술 권하려 애쓰지 말게
가옹은 원래 귀 먹은 체하는 것이네.

권용정(權用正), 〈총이주〉, 《세시잡영(歲時雜詠)》 중에서

음력으로 정월 대보름날 이른 아침에 마시는 술을 ‘귀밝이술’이라고 한다. 이날 귀밝이술을 마시면 귀가 밝아진다고 해서 모두 한 잔씩 마시는데, 옛날부터 내려오는 우리 고유의 풍습이다. 이 술은 이명주(耳明酒), 명이주(明耳酒), 이롱주(耳聾酒), 치롱주(治聾酒), 총이주(聰耳酒)라고도 한다.
귀밝이술은 청주(淸酒)로 된 시양주(時釀酒·각 명절에 연례적으로 빚어 마시는 술)인데, 데우지 않고 차게 해서 마시는 것이 특징이다. 이 술을 마시면 귀가 밝아지고 총명해지며, 1년 동안 좋은 소식만 듣게 된다고 한다. 특히, 맑은 술이라야 귀가 더 밝아진다고 했다. 아이들은 귀가 밝아져서 어른이 부르면 빨리 알아듣고 대답한다고 했다. 지방에 따라서 귀밝이술의 해석에도 차이가 있다. 술을 마시면 귀밑 부분이 빨갛게 돼 ‘귀가 붉어지는 술’이란 말에서 귀가 밝아진다는 뜻이 생겼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귀밝이술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온 가족이 다 같이 마신다. 보통 부녀자는 술을 잘 마시지 않지만 이 귀밝이술은 마시는 것이 관례다. 어린이에겐 귀밝이술의 잔을 입에만 대게 한 뒤 그 술을 굴뚝에 붓는 풍속이 있었는데, 부스럼이 생기지 말고 연기와 함께 날아가 버리라는 뜻이다.
귀밝이술에 관한 기록은 여러 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청주 한 잔을 데우지 않고 마시면 귀가 밝아지는데 이것을 유롱주라 한다”고 했고, 《경도잡지(京都雜志)》에선 “소주 한 잔을 마셔 사람의 귀를 밝게 한다”고 했으며,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에는 “이날 새벽에 술 한 잔 마시는 것을 명이주라 한다”고 했다. 또 《해록고사(海錄故事)》에는 “사일(社日)에 치롱주를 마신다고 했으나 지금 풍속에서는 상원(上元)날로 옮겨졌다”고 했고, 《세시풍요(歲時風謠)》에선 “정월 보름날 일찍 마시는 술을 편총주라고 한다”고 했다. 조선 철종 때 정학유(丁學游)가 지은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에는 “귀밝히는 약술이며 부름 삭는 생율(生栗)이다”라는 구절도 있다.
귀밝이술의 기원은 중국으로 본다. 중국 송(宋)나라 섭정규(葉廷珪)의 《해록쇄사(海錄碎事)》에는 “사일(社日)에 치롱주를 마신다”고 했다. ‘사일’이란 춘분과 추분에서 가장 가까운 앞뒤의 무일(戊日)을 말한다. 춘분의 것을 ‘춘사(春社)’, 추분의 것을 ‘추사(秋社)’라고 했는데, 여기선 춘사를 말한다. 그런데 그 뒤의 풍속에는 이를 보름날에 행사는 것으로 바뀌었다.
귀밝이술은 정월 대보름 때에 맞춰 일부러 만들기도 하지만 정월 초하루에 쓰고 남은 청주를 뒀다가 그대로 쓰기도 한다. 이미 빚어뒀던 술을 이때 용수질 해 청주만을 떠 마시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풍습도 몇몇 시골에서만 겨우 그 명맥이 유지되고 있을 정도로 많이 잊혀가고 있다.
한시(漢詩)에선 귀밝이술에 대해 읊은 것이 많았다. 그중 유만공(柳晩恭, 1793~?)은 《세시풍요(歲時風謠)》에서 귀밝이술에 대해 읊었다. 나이 많은 노인이 귀밝이술을 마셨는데도 전혀 효과가 없음을 해학적으로 표현했다.

차가운 술을 많이 마시는 저 늙은이가 우습구나.
신통하게 귀가 밝아진다고 누가 알려 드렸나.
아침술에 취하여 꿈속처럼 몽롱해져서
귀가 더욱 먹었는지 불러도 대답이 없네.

노인에게 누군가가 귀밝이술을 마시면 귀가 밝아진다고 많이 잡수라고 말한 모양이다. 노인은 그 말을 믿고 아침술을 잔뜩 마셨고, 그 술로 인해 너무 취해서 깊은 잠에 빠져버려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다는 내용이다. 귀가 밝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멀어진 것 같다고 하고 있다.

조선조 순조 때의 문신인 면암(勉菴) 조운종(朝雲從, 1783~1820)의 《면암유고(勉菴遺稿)》 ‘세시기속(歲時記俗)’에는 귀밝이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집집마다 이른 아침에 데운 술이 잔에 가득한데
한 모금만 마셔도 두 귀를 밝게 하네.
여보게 오늘 나에게는 술을 권하지 말게나
세상의 시끄러운 소리 듣고 싶지 않다네.

작자는 귀밝이술이 귀를 밝게 해주는 것이라고 일단 인정을 한다. 그러나 자신은 진세(塵世)의 시끄러운 소리를 듣고 싶지 않으니 굳이 귀밝이술을 마실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래서 아내에게 자기에게는 귀밝이술을 권하지 말라고 한다. 은자(隱者)의 심성을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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