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근 칼럼
풍류가 정철은 자연 속에서 술을 마셨다
박정근(대진대 교수, 윌더니스문학 발행인, 소설가, 시인)
특히 정철은 술에 대한 무절제로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그는 임진왜란에 선조가 의주로 몽진했던 시기에 술을 지나치게 마신 나머지 중요한 어전회의에 불참하고 말았다. 그 후 정철은 탄핵을 받았으며 광해군 이전까지 복권을 하지 못했다. 그의 불명예는 지속되어 복권과 실추를 반복하는 수치를 겪어야 했다. 정철은 1694년 숙종 에 이르러서야 정치적으로 복권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철은 비록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귀양을 가거나 낙향할 때가 많았지만 자연을 즐기는 풍류가였다. 그는 정치적 상황으로 어쩔 수 없이 자연과 만나게 되지만 그걸 저주하거나 원망하지 않았다. 기왕에 만나는 자연을 향해 적극적으로 다가가 즐기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는 그저 자연을 관조하는 것으로 머무르지 않고 그 안에서 술을 끌어들여 낭만을 구가했다. 그가 쓴 대표작 ‘관동별곡’과 ‘사미인곡’은 자연을 적극적으로 즐기는 감성적인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는 결정체라고 볼 수 있다.
정철이 술의 시조는 20여 수를 남겼으나 술과 자연의 관계를 시적으로 멋지게 표현한 정철의 시는 “저녁달은 술잔 속에 지고 봄바람은 내 얼굴에 떠오르네”란 의미의〈대월독작(大月獨酌)〉이다.
이 시는 시인, 자연, 술의 조화로운 관계를 노래한 시가 아닐 수 없다. 도회의 풍류가들이 흔히 그러하듯이 멋진 술집에서 아름다운 여인을 가슴에 품고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다. 이 시속의 시인은 술과 고기를 배가 터지게 먹고 마시는 ‘주지육림(酒池肉林)’하는 호탕한 음주도 결코 아니다. 그는 자연의 상징인 보름달을 보며 홀로 술을 마시는 고독한 음주를 더 즐기고 있다. 이 시속의 시인의 낭만적인 음주는 술을 게걸스럽게 마시는 것과는 수준이 다르지 않은가.
자연미의 상징인 보름달을 보며 술을 마시는 모습은 시인을 이백과 같은 수준의 낭만주의 시인 반열에 오르게 한다. 정철의 자연과 술에 대한 사랑이 이백과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이백의 경우는 친구를 불러 만취하도록 마시는 것을 선호했으나 정철은 오직 보름달과 마주보며 홀로 술을 마시는 것이다. 보름달은 밤하늘에 떠있지만 정철은 그 보름달을 술잔에 띄워 여인인양 바라본다. 이 시귀는 정철이 보름달을 얼마나 사랑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시적 이미지이다.
호걸은 통상적으로 여인을 품에 안고 술을 마시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정철은 술잔 속에 보름달을 담아 술에 흔들리는 보름달을 애틋하게 바라보며 술을 마시고자 한다. 그렇다면 정철은 얼마나 술을 마시는 것일까. 물론 시인이 술을 양적으로 폭주하는 스타일은 전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그는 저녁달이 질 때까지 마신다고 노래하고 있다. 시인은 보름달이 지는 것을 밤하늘을 보고 확인하지 않는다. 그는 술을 마시다 보름달이 술잔 속에서 지는 것을 발견한다, 결국 시인은 달이 떠서 질 때까지 홀로 술을 즐겼다는 의미가 된다. 아마도 술을 사랑하되 양적으로 마시기보다 조금씩 음미하는 모습이 연상된다.
여기서 정철의〈달 보며 술 마시리(대월독작 大月獨酌))〉를 감상해보자.
저녁달이 술잔 속에 지니
봄바람이 얼굴에 떠오르고
하늘과 땅 사이 한 자루 칼이 외로워
길게 휘파람 불며 다시 누대에 오르리.
이 시에서 저녁달이 지는 으슥한 밤이 되니 술잔 속에서도 달이 지는 것을 발견한 시인은 봄바람이 그의 얼굴을 스치는 것을 느낀다. 아마도 봄바람은 임의 손길일 수도 있고 체취일 수도 있다. 술을 마시는 시인 정철의 마음은 몹시 안타까우리라. 임의 존재의 상징인 봄바람은 시인의 얼굴에 느낄 듯 말 듯 한 존재일 뿐이지 않은가. 그의 손으로 잡을 수도 없고 가슴에 품을 수도 없다. 이것은 사랑을 갈구하지만 획득할 수 없는 시인 정철의 사랑에 대한 갈증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상대적으로 봄바람을 통해서 임은 이미지로만 떠오르고 오각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임을 포착할 수 없으니 시인은 한 자루 칼이 되어 외롭기만 하다. 칼은 임을 사모하는 장수의 상징이다. 이제 장수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휘파람을 불며 누대로 올라간다. 누대에는 그리는 임이 부재한 공간이다. 아마도 낭만적인 시인이 견디기 어려운 황량한 공간이 아닐 수 없다. 정철은 그 황량함을 술 한 잔에 기대어 달래야 하리라. 시속의 이미지는 귀양을 간 외로운 사나이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사진 : 한강에 인공 달이 떴다. 10여 년간 방치된 서울 노들섬 선착장 위에 지름 12m 알루미늄 달이 들어선 것이다. 이름하여 ‘달빛노들’이다. 비정형의 구멍이 모여 이뤄낸 얼룩덜룩한 표면이 달의 지질(地質)처럼 보인다. 밤에는 내부에 설치된 조명이 일렁이는 수면 위에 노란 달무리를 흘린다.<서울시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