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피해 하며 무시하지 말고 모르면 배워라
모르는 것은 창피한 일이 아니다. 더구나 죄를 짓는 일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나 모르는데 아는 척하며 일을 그르치는 것은 범죄가 될 수도 있다. 술 산업을 진흥시키는 문제는 아주 간단한 일이다. 맛과 품질이 좋은 술을 정성껏 만들어서 잘 팔면 그것이 곧 ‘산업 진흥’인 것이다.
과거처럼 비밀리에 술을 혼자 만드는 것도 아니고, 마케팅을 위해서도 제조의 95% 이상은 공개돼 있다. 즉, 잘 만들고 잘 팔 줄 모르면 배우면 된다는 말이다. 누구에게 배울 것인가도 이미 정해져 있다. 이미 세계적으로 성공한 술인 와인과 사케로부터 배우면 된다. 항상 배우는 일을, 새로운 시도를 막는 것은 기존의 조그만 시장을 지키려는 기득권층의 자기 밥그릇을 지키려는 탐욕스러움이다.
많은 일본 사람들에게 물어봤다. “막걸리가 일본에서 인기 있는 이유가 대체 무엇인가?” 대답은 두 가지로 아주 간단했다. 첫째는 가격이 싸기 때문이고, 둘째는 일본 술맛과 유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꼭 한 마디 덧붙인다. “오래 못 갈 거야. 일단 본격적인 술 시장에 들어오질 못하고 있잖아. 젊은 여자들 위주의 술 소비로는 오래 못 가. 술꾼들이 마셔야지.”
이제부터라도 우리의 술을, 우리의 맛을 팔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와인과 사케의 경우를 보면, 우선 세계인의 입맛과 맞추려는 노력을 많이 했다. 그러기 위해서 등장하는 것이 술맛에 따른 술의 분류와, 흔히 ‘마리아주(marriage)’라고 하는 술과 음식의 조화에 관한 문제다. 아직 세계에 내놓을 만한 변변한 전통주도 없는데 벌써부터 마리아주를 말하기에는 좀 이른 것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마리아주는 술 제조과정에서부터 술을 만드는 사람의 머리에 이미 있어야 하는 것이다. 가능하면 지역 특산음식과의 조화를 염두에 둔다면 더욱 좋을 듯싶다.
농촌 어메니티 자원과 전통주 산업
정부가 ‘전통주 등 산업진흥에 관한 법률’을 입안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농사를 짓는 농민 스스로 자신이 재배한 농산물을 100% 사용해 술을 만드는 ‘농민주’라는 개념과, 인접 시도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50% 이상 사용해 술을 만드는 ‘지역특산주’의 개념이었다. 국순당이나 롯데, 진로, CJ 등 대기업이 알아서들 잘 하고 있는 막걸리판에 뛰어들어 걸판지게 한 판 벌이라는 뜻이 아니었다. 결국 시작은 농촌의 농촌다움이 묻어나는, 집집마다 다른 맛이 배어나는, 소위 농촌 어메니티(amenity) 자원을 활용하기 위한 방안으로 추진됐는데 ‘배가 산으로 간 꼴’이 된 것이다. 농촌다움을 바탕으로 한 세련됨, 농촌다운 느긋함을 강조하는 개념인 어메니티는 대기업의 등장으로 ‘도시적인 대량생산, 대량 판매’로 탈바꿈되고 말았고, 수십 년을 지역의 터줏대감으로 버텨 온 지역 술들이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간 것이다.
와인이나 사케도 그 시작을 보면 지역 특유의 맛을 내는 포도, 쌀, 물의 맛을 사용해, 결국 그 지역의 농촌 어메니티 자원을 이용해 점차 가치를 높이려는 노력을 하고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독특한 캐릭터를 추구하다보니 오늘날과 같은 고가(高價)의 세계적인 상품이 된 것이다. 그러한 비전과 노력도 없이 영세 중소기업들이 만들어 온, 그 지역의 특성과 물맛을 잘 살린 막걸리를 마케팅의 힘을 앞세운 대기업이 나서서 죽이고, 이를 정부가 후원하는 꼴인 이러한 형태로는 우리에게 와인이나 사케 같은 우리술의 미래를 기대할 수 없다.
아무도 관심 없는 이웃나라 일본의 현실
두 아들에게 부채장사와 우산장사를 시킨 아버지의 이야기를 기억할 것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한 자식만은 굶지 않아야 한다는 아버지의 강한 의지를 읽을 수 있다. 그러나 형제가 아닌 경우에는 어찌해야 할까. 부채도, 우산도 필요하기만 하면 다 팔아야 할 것이다. 여러분 같으면 향후 방사능에 오염된 일본 사케를 마실 수 있겠는가.
초등학교 때, 방사선은 다른 어떤 용기로도 막을 수 없고 오직 납상자로 싸는 길밖에 없다고 배운 걸 아직까지 기억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면 후쿠시마 원전에서 직원들은 어떻게 옷만 입고 수리를 할 수 있을까 하고 물어볼 수 있다. 맞다. 바로 그 옷이 납실로 짠 특수한 옷이다. 하물며 병에 담긴 사케도 병에 담겨 있지 않은 사케와 방사능 오염에 있어선 사실상 아무런 차이가 없다. 하지만 이런 사실에 관심 갖고 있는 우리나라 술 생산업자는 아무도 없다. 단지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잘 팔리던 막걸리가 덜 팔린다고 죽는 소리 하기 바쁠 뿐이다.
부자는 기회가 온 것을 알아채고 그 준비를 철저히 한 사람이고, 가난한 사람은 그 기회가 온 사실조차 모른다고 한다. 여기까지만 말씀드리겠다. 전통주 등 산업진흥을 망친 사람들이 더 나아가면 무슨 짓을 하며 이 기회를 날려버릴지 걱정이 되니까 말이다.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열린 마음으로 배우자
열심히 와인공부를 하고 돌아와 국내 최초의 와인교수가 됐을 때 많은 분들이 “학생들의 졸업을 어렵게 만들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더 이상의 발전이 없을 뿐더러 와인 전문가가 난무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했을 때 나는 설마 했다. 그런데 내게 1년을 배운 한 제자가 찾아와선 “책을 썼는데 추천사를 써 달라”고 했을 때 고민에 싸였다. 결국은 추천사를 써 주고 말았다. 나는 아직 단 한 권의 책도 내지 못한 채 추천사만 많이 써 주고 있다.
이 글을 읽는 분 가운데 진실로 전통주에 애정을 갖고 있다면, 다른 술들도 내가 좋아하는 술만큼 배운 뒤에 평가하겠다는 열린 마음으로 배려해 주길 바란다. 제대로 만든 모든 술에는 만든 이의 정성과 철학이 깃들어 있고 혼도 들어 있다. 서로 적대시 하고 내 술만 마셔줘야 한다는 이기주의가 이 땅에 다양한 술이 문화로 어울리며 존재하는 것을 막고 있다. 남의 술을 헐뜯느라 내 술의 발전에는 소홀해 더 이상의 발전이 없는 현실은 하루빨리 고쳐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