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에 더해 항상 온도와 습도가 일정한 터널에서 숙성되어 풍미를 더한다.
이 터널은 일제가 조선의 지배를 공고히 하고자 부산에서 서울까지 기차를 놓으며 뚫린 터널이다. 말하자면 일본과 식민지 조선을 잇는 거대한 사닥다리 같은 것이다.
터널의 천장은 일제 강점기 일본해군이 사용했던 욱일승천기처럼 붉은 적벽돌로 촘촘하게 쌓은 것이 인상적이다.
청도감와인 숙성터널처럼 우리 근현대 술사(酒史)에서 일제의 직간접적인 영향력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회사일로 술에 알맞은 발효숙성터널을 찾으려고 몇 해 전 제주도를 수차례 답사했었다.
현재 제주공항으로 쓰고 있는 비행장(정뜨르 비행장)과 근현대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제주 남단의 알뜨르 비행장은 일본의 중국침략을 위한 전진기지로 활용되었다. 일본에서 발진한 전투기는 이곳에서 중간급유를 받고 중국 본토를 공습할 수 있었다. 또한 가미가제를 위한 연습비행장 역할을 하기도 했다.
알뜨르 비행장은 지금도 그때 일제가 만들어 놓은 콘크리트 격납고 20여기가 감자밭 군데군데 남아 있다.
뿐만 아니라 태평양전쟁 당시 수세에 몰린 일제는 제주도 곳곳에 진지동굴을 파놓았다. 연합군의 상륙을 죽음으로 저지하겠다는 옥쇄작전의 일환이며, 또한 일본 본토 상륙을 늦추기 위한 발악이었던 셈이다.
만주와 중국에서 조선인과 중국인들의 조직적 저항에 발목이 잡힌 일제는 태평양에서 미군을 맞아 더욱 힘겨운 싸움을 벌인다. 전세를 만회하기 위해 나이 어린 소년들까지 전쟁에 참가시키지만 전세는 갈수록 기운다. 태평양 대부분을 차지했던 전선(戰線)은 일본 열도로 점점 좁혀 들었다.
일본 방방곡곡마다 젊은 남자들은 모두 전쟁터로 끌려간다.
일본정부는 초기에는 빚는 술의 양을 제한했으나 2차 대전 패망 직전에는 양조장의 폐업을 유도했다.
술을 빚을 수 있는 남자들이 없으니 일제가 양조장의 폐업을 유도하거나 술의 양을 제한하지 않아도 실제로 술을 빚을 수 있는 여건이 되지도 않았다.
술을 빚을 수 있는 남자들이 사라지자 금녀의 영역이던 양조장에서 여자들과 소년들은 술을 빚기 시작한다. 어디 양조장뿐이었겠는가. 가사일 뿐 아니라 경제활동 전반에 여자들과 소년들이 등장하게 되었을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들, 아톰시리즈, 에반게리온, 미래소년 코난, 그리고 은하철도 999 등의 작품에서 여성과 소년은 갈등을 봉합하고 새로운 미래를 제시한다. 전쟁과 폐허 속에서 고난을 극복하고 화해하며, 혹은 극악(極惡)과 맞서는 전사로 변신하기도 한다.
이후 전쟁에 나갔던 남자들이 되돌아오며 일본은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룬다.
여성과 아이들의 손에 의해 간신히 명맥을 유지한 사케는 비즈니스맨들의 눈부신 활약으로 일약 세계적인 술이 된다.
일본 비즈니스맨들은 외국바이어들을 만날 때면 최고급 일식집에서 최대의 예우를 갖추어 비즈니스를 성사시킨다. 스시와 사케는 현재의 와인처럼 전후(戰後) 떠오르는 경제대국 일본과의 경제교류를 위해서는 알지 않으면 안 되는 문화가 된다.
일제에 의해 도입된 주세법과 근대적 양조장 체재는 해방 후에도 계승되며, 특색 있는 가양주가 음지에서 머물다가, 88년 올림픽 전후로 전래의 가양주 50여종이 민속주라는 이름으로 양성화된다.
이후 농민주 및 지역특산주 등의 도입으로 가양주 혹은 지역의 농산물을 활용한 다양한 술이 우리 곁에 머물 수 있었다.
이제는 이러한 가양주 혹은 지역특산주를 잘 살려 대를 잇는 양조장들이 많아져야 한다.
3차 산업이 고도로 발달한 현대사회에서 양조장은 주점문화를 활성화하고 관광자원으로 훌륭한 역할을 할 수 있다. 나아가 우리 술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서는 작지만 내실 있고 깊은 역사가 있는 양조장들이 건강하게 살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은하철도 999를 타고 영원한 생명을 얻으러간 철이는 결국 기계의 몸을 포기하고 지구로 돌아온다. 비록 생명은 유한하지만 미래와 다음 세대를 위해 오늘을 살아가는 것은 어쩌면 계속될 미래를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수백년전 우리 조상 수수거리는 일본에 술 빚는 법을 전수해주었다고 한다. 그 이후로도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교류가 일어났고, 술도 밀접한 연관 관계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비록 양조장이 타의에 의해 도입되었다 하더라도 이제 우리 양조장도 백년의 역사를 헤아린다.
대를 이으며 지역의 문화가 살아 있는 그리고 그 지역의 농업과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양조장.
이제 그런 양조장들이 이 땅 곳곳에 뿌리내리기를 철이와 메텔의 손을 함께 잡고 기원한다.
사진 : 1.세계 유일의 감와인이 청와대 영빈관에서 박근혜대통령이 주재하는 재외공관장회의 만찬주로 선정됐다.
2. 청도와인터널 내부는 기온(13~15℃)과 습도(60~70%)가 연중 일정하며 다량의 음이온이 어우러져 와인 숙성에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