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술

구수한 보리술의 잠재력

술의 무리 중에는 유행을 이끄는 리더가 존재합니다. 서너해 동안 막걸리가 인기를 끌었는데 그 몇 해 전에는 와인과 복분자가 인기를 끌었습니다. 매실주, 백세주로 대표되는 약주 등등도 한 시절을 풍미했습니다. 근자에는 RTD음료(마시기 좋게 칵테일된 알코올 음료)와 맥주가 주목을 받고 있는데, 그중에서 맥주가 새로운 유행을 이끌고 있다고 평할 만합니다. 맥주의 경우 수입맥주가 대형매장을 점령하고, 다양한 맥주를 즐기는 창고형 주점이 생기고, 크래프트 비어라 하여 소량으로 주문제작되는 맥주들이 이태원을 중심으로 큰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어쨌든 최근의 술 시장에서는 맥주가 주목받고 있고, 영국식 에일맥주도 대기업 맥주회사에서 다투어 출시하고 있고 하니, 맥주 즉 보리술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그렇다고 하여 대기업의 라거형의 맥주나 하우스 맥주만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보리로 만든 맥주가, 조선시대에도 있었고, 고려시대에도 있었습니다.

고려 말 문인 이제현 선생은 보리술을 마시고 쓴 글을 남겼습니다. 내용을 보면 이렇습니다. “맥주를 마신다. 마시는 방법은 용수를 박거나 눌러 짜지 않는다. 대나무 통을 항아리 속에 꽂는다. 둘러앉은 손님들이 차례차례 빨아 마신다. 옆에는 물 잔을 놓아두었다가 술을 마신 만큼 항아리 속에 물을 붓는다. 술이 바닥나지 않는다면 그 맛이 달라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손님들과 함께 항아리에 둘러앉아 대나무 빨대로 술을 나눠마시다니, 신기하고도 정겨운 모습입니다.

항아리에 빨대를 꽂아놓고 술을 빨아 마시는 풍습은 우리에게서는 사라졌지만, 동남아는 남아있습니다. 베트남의 지오 깐이라는 술이 그런 술입니다. 술병이라 하기엔 크고, 술항아리라고 하기에는 작은 단지에 술덧채 술을 담고, 빨대를 곶아 마십니다. 베트남에서는 외진 동네에 그 풍습이 남아있다는데, 서로 유사한 문화가 있었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어 신기하기만 합니다.

조선시대 영조 때에 금주령을 내리면서도 국가 부역을 하는 군인과 농사짓는 농부들을 위해서 “군사들에게 술을 줄 때는 단지 탁주만 쓰고, 농민들에게도 맥주와 탁주 역시 금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물론 지금의 맥주와 다릅니다만, 맥주라는 문자를 생각하면 고려 사람과 한국 사람이 달리 사용하고 있어서 우리 혼이 달아나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합니다.

보리술은 쌀보다 삭히기 어려운 재료라서, 술을 빚으면 그 맛이 거칠고 술의 양도 적습니다. 그래서 보리를 싹 틔운 엿기름으로 우리네는 식혜를 만들어 마셨습니다. 우리에게는 누룩이라는 훌륭한 발효제가 있었기에 굳이 엿기름 자체를 술 원료로 삼지 않았고, 술을 만드는 보조제 정도로만 사용하였습니다. 대신에 누룩이 없었던 유럽에서는 엿기름을 끓이는 아주 번거로운 절차를 거치고, 여기에 홉을 넣어 맛을 강화시킨 뒤에 맥주라 하여 마셨습니다.

유럽 스타일은 아니지만, 우리에게도 고유한 보리술이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습니다. 쌀이 귀한 서남해안 섬 지방에 가면 거무튀튀한 보리술이 있습니다. 가난의 상징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술이 귀한 섬에서는 보리술도 없어서 못 마실 정도로 인기가 있었습니다.

요즈음 보리가 건강한 잡곡이 되어, 보리막걸리도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이모작으로 보리 재배량이 많은 군산 지방에서는 봄이면 꽁당보리 축제를 열리는데, 군산을 대표할만한 군산양조공사에서 꽁당보리를 원료로 보리막걸리를 빚습니다. 그 이름이 재미있습니다. 보리 맥자를 써서 맥걸리입니다. 군산 지방을 여행하면 하면 맛봐보십시오. 맥걸리는 보리 70%와 밀가루 30%가 들어가 있는데 그 맛은 쌀 술에 견주면 구수합니다. 마치 싱거운 쌀밥에 비해 보리밥이 좀 더 구수한 이치와 같습니다.

하지만 보리막걸리로 보리술의 진수를 맛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보리막걸리는 알코올 도수 6도라서, 향기 성분이 많이 줄어들어 있습니다. 좀 더 강렬한 보리향을 맡으려면 증류한 보리소주가 제격입니다.

우리 소주 문화는 순도 95%이상의 에탄올에 물을 희석하여 마시는 희석식 소주가 주도하고 있어서, 어떤 재료로 소주를 만들었는지 따지질 않습니다. 하지만 모든 음식이나 술이 그렇듯, 그 맛은 근원은 그 재료에서 출발합니다. 소주에도 보리소주, 포도소주, 쌀 소주, 수수소주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보리소주는 위스키이고, 포도소주는 브랜디이고, 쌀 소주는 안동소주이고, 수수소주는 고량주입니다.

한국에도 보리소주가 있습니다. 전주 이강주에 보리가 들어가고, 보성 강하주에도 보리가 들어가고, 진도홍주에도 보리가 들어갑니다. 진도홍주 기능보유자로 지난해에 작고한 허화자씨가 빚던 진도홍주도 보리밥을 지어 술을 합니다. 쌀이 귀해서 보리밥을 해 먹던 시절의 술입니다. 보리밥이라고 부르지만, 보리가 좀 섞여있지 보리만 가지고 빚는 술은 아닙니다. 보리밥의 구수한 향기가 보리소주에 스며있어서 맛이 들뜨지 않고, 감칠맛이 돕니다.

보리술에 주목할 부분은 체질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우리네 보리는 겨울을 나기 때문에 냉한 기질을 지니고 있습니다. 땀을 많이 흘리고 난 뒤나, 더운 여름이면 보리술이 쌀 술보다는 더운 몸을 잘 식혀줄 수 있습니다. 여름에 보리술인 맥주를 더 마시게 되는 이유가 단지 차게 해서 마시고 도수가 낮기 때문만이 아닌, 체질과 관련된 요소가 존재합니다.


유럽 자본주의 문명이 세계를 제패하면서 지금은 독일식 보리술인 맥주가 세계를 호령하고, 한국에서도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보리막걸리, 보리소주, 한국산 보리로 만든 맥주가 많이 생겨나기를 기대해봅니다.

 

☞허시명/ 술평론가, 여행작가. 삼청동 입구에서 문화공간 막걸리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저서 <술의 여행>, <막걸리, 넌 누구냐?>, <조선문인기행> 들이 있다.

 

사진설명

 

1 막걸리학교에서는 맥주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2. 2014년 코엑스에서 열린 술박람회장의 맥주이벤트

3 맥주를 만들기 위해서 맥아를 당화시키고 있다

4 대전의 하우스맥주집인 바이젠하우스에서 만든 맥주를 서울에도 맛볼 수 있다.

5 다양한 맥주를 시음하다

6 벨기에 맥주 시메이를 따자 샴페인처럼 뚜껑이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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