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술

술을 친구 삼은 정철의 낭만성에 관한 소고

송강 정철의 가사(歌詞) ‘사미인곡(思美人曲)’을 모티브로 해서 주명(酒名)을 붙인 전남 장성의 ㈜청산녹수의 ‘사미인주’

박정근 칼럼

술을 친구 삼은 정철의 낭만성에 관한 소고

박정근(문학박사, 소설가, 시인, 대진대 교수 역임)

 

현대를 사는 인간의 특색 중의 하나는 편의성과 신속성이다. 과학과 기술이 발전하여 인간들에게 시간과 일로부터 해방시켰다고 자랑한다. 완행열차를 타고 꾸벅꾸벅 밤새 졸면서 가던 여행이 현대인의 풍속도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자다가 깨어 느릿느릿 달리는 완행열차의 차창에 스치는 풍경을 바라보며 느림의 미학을 즐기던 여행이었다. 새벽이 다가오면서 지평선 저편에서 천천히 먼동을 터오는 것을 바라보는 즐거움이 사라진 것이다.

경춘 열차

과연 시간에 쫓겨 고속철을 타고 창가의 경치를 바라볼 생각도 조차 할 수 없이 바삐 살아가는 것이 행복한가. 산의 정상을 향해서 뒤나 옆을 돌아보지 않고 줄달음치는 등산이 느릿느릿 새싹과 봄꽃을 감상하는 산책보다 즐거울 수 있을까. 필자는 단연코 그런 신속성과 편의성이 인간에게 행복을 줄 수 없다고 본다. 인간은 사물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고 어떤 즐거움을 획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관객들이 무대에서 펼치지는 희극을 감상한다고 가정해보자. 희극배우들이 선사하는 재담들을 채 이해하지 못하던 관객들은 사고를 통해서 대사 속의 숨어있는 기지를 잠시 후 깨닫고 웃음을 터뜨린다. 인간의 감각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아름다운 장경이 눈앞에 펼쳐지면 동공을 통해서 망막에 비쳐지고 시신경을 통해서 그것의 미적 가치를 깨닫게 된다. 하지만 빠른 고속철을 타고 갈 때 바라보는 장경은 그런 시간적 여유를 승객으로부터 빼앗아 버린다. 미처 장경의 미적 가치를 깨닫기 전에 새로운 장경이 들어와 전 장경의 느낌을 밀어내버리는 것이다.

정철은 바삐 살아가는 것의 덧없음을 일찍이 깨달았던 시인이었다. 인생이 아무리 길어도 백년이다. 제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인생은 백년을 넘지 못하고 사리질 수밖에 없다. 이렇게 인생의 유한성을 깨달을 때 인간은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할까.

아마도 두 가지 양상이 나타날 것이다. 하나의 양상은 인생의 유한성을 극복하기 위해서 많은 일을 하려고 덤비는 자들을 떠올릴 수 있다. 다른 양상은 뛰어보았자 벼룩이란 말이 있듯이 인생의 유한성을 알고 여유를 부리는 것이다. 어차피 서둘러 보았자 큰 의미가 없으니 여유자적하면서 인생을 즐기려는 부류이리라.

정철은 후자를 선택하고 전자의 추종자들을 나무란다. 부생초 같은 인생이 뭘 대단한 일을 하겠다고 자신이 권하는 술잔을 마다하느냐고 반문한다. 아무리 바빠도 친구가 권하는 술 한 잔을 마다하고 가려고 하는 자에게 힐문하는 것이다. 정철에게 일이란 인간을 초조하게 하는 스트레스의 원인자일 뿐으로 술보다 상위개념이 전혀 아니라고 본다. 아무리 바삐 살아보았자 죽음을 피할 수 없는데 근심걱정을 내려놓고 술의 달콤한 미각을 마다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정철은 노래한다.

일정 백 년 산들 그 아니 초조한가

초초한 부생(浮生)이 무슨 일을 하랴 하여

내 잡아 권하는 잔을 덜 먹으려 하는다

 

정철은 술이 있는 곳이면 신이 나서 달려가는 애주가였다. 조선시대에는 각 집마다 집안행사나 손님 접대를 위해 집안에서 술을 담갔다. 집에서 술 익는 냄새가 나면 친한 친구에게 기별을 하여 초대를 하는 관습이 있었다. 정철의 시에는 술을 익었다는 소식을 듣고 환희에 차서 달려가는 시인의 모습이 생생하게 재현되어 있다.

전남 담양의 정자 정철 송강정.

시의 일행과 이행에서 성권농이란 농사를 권장하는 하급관리가 집에 술을 담갔는데 잘 익어간다는 소식을 들은 정철의 반응은 점잖은 학자와 전혀 다르다. 거의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파격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는 마치 농부처럼 소등에 담요와 같은 언치를 얹힌 다음 그 위에 주질러 앉아 그의 집으로 달려간다.

그의 감정은 일행에서 술이 익어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시인의 좋아하는 표정을 읽을 수 있다. 두 번째 행에서 그의 기대감은 매우 들떠서 떠날 채비를 하는 행위를 연극적으로 재현한다. 마지막 행에서 그의 시어는 대화체로 바뀐다. 그의 대화의 상대는 성권농의 하인이다, 정철은 마시게 될 술에 대한 기대감을 표현하기 위한 수법으로 환호법을 사용한다. 평범한 서술로는 그의 환희를 나타내기 어렵다고 생각했으리라. 문 앞에서 시인이 도착했다는 것을 알리라고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이다.

재 너머 성 권농(成勸農) 집에 술 익단 말 어제 듣고

누운 소 발로 박차 언치 놓아 지즐 타고

아이야 네 권농 계시냐 정 좌수 왔다 하여라.

이 글에서 소개한 두 편의 시는 정철이 얼마나 대단한 애주가인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첫 번째 시에서는 인생의 허무함을 강조하여 술을 마셔야 하는 당위성을 강조하였다. 인생의 덧없음을 깨닫는 각성은 어떤 의미 있는 업적의 무의미성에 의해서 돌이킬 수 없는 내적 상처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본다. 그러한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술을 마실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는 것이다. 두 번째 시에서는 인생의 허무함을 극복하기 위해 술을 마시고자 하는 시인의 능동적 행위를 재현하고자 하였다.

술이 익어간다는 소식을 듣는 행위에 이어 성권농의 집으로 신속하게 가기 위해 누운 소를 발로 차서 일으켜 세우고 등 위로 뛰어올라 가는 능동적 행위로 발전시킨다. 정철은 술을 직접 마시는 행위는 생략하고 성권농의 집에 도착했을 때 발생하는 가장 절정의 들뜬 연극적 행위로 시를 마무리 한다. 그는 이 시에서 술에 대한 기대감이 점층적 고조되다가 절정에 이르는 모습을 재미있게 표현하였다. 결국 두 편의 시는 정철을 최고의 애주가라고 일컫는 이유를 설명하고도 남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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