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술

헛헛한 마음에 막걸리 한 사발,

헛헛한 마음에 막걸리 한 사발,
여전히 그립고 그리운 내 할머니 냄새

 

삼강주막(三江酒幕)

 

 

주막에서 낙동강 줄기를 바라보며 얼마나 헛헛했을까요. 어스름 저녁이면 달빛에라도 인사하고 싶지 않았을까요. 스치는 인연뿐이라 말동무 흔치 않았을 텐데, 그 긴 세월은 또 어떻게 채웠을까요. 보릿가을에 부는 막새바람 맞으며 할머니는 그렇게 가슴을 비우고 또 비웠을 테죠.
좀 덜 살면 어떻습니까. 배운 것이 남들만큼 되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평생 모자랐지만 그런 만큼 더 베풀 수 있어서 행복하고 풍족했으면 그것으로 됐지요.
유옥연 할머니. 삼강주막(三江酒幕)을 얘기할 때 먼저 듣게 될 이름입니다. 이 시대의 마지막 주막에 마지막 주모(酒母)이니 떼려야 뗄 수 없을 테지요. 서른 넷 나이에 남편과 사별(死別)하니 품에 남은 것이라곤 아들 둘에 딸 둘 뿐이었습니다. 먹고 살아야 했기에 주막을 넘겨받았다곤 하지만 그 모진 세월, 잘도 이겨내셨습니다.

지금은 이 세상에 안 계시지만 삼강주막엔 할머니의 흔적들이 여전히 뚜렷합니다. 2005년 90세의 일기로 이 세상과 작별할 때까지 50년을 주모로 살다가셨으니 그럴 법도 하지요.
주막 부엌에 들어가 봤습니다. 벽면 여기저기에 길고 짧은 선(線)들이 그어져 있습니다. 세로로 짧게 그은 선은 막걸리 한 사발, 길게 그었으면 한 되라고 합니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아시겠어요? 바로 유옥연 할머니만의 외상 표기법이랍니다. 길고 짧은 세로 선들 중앙에 가로로 길게 쭉 그어놓으면 다 갚았음을 뜻합니다. 뱃사공들이나 지나는 사람들이 오며 가며 막걸리를 공(空)으로 들이킬 적마다 글을 몰랐던 할머니는 벽에다 선을 하나씩 그었습니다. 유옥연 할머니에게 이 벽면은 한 마디로 ‘외상장부’였던 셈입니다. 북쪽 부엌 벽은 뱃사공 전용 장부였고, 동쪽 벽은 동편에서, 서쪽과 남쪽 벽은 서편과 남편에서 오가는 사람들의 외상장부로 활용했습니다. 동서남북 외상 줄이 한두 개가 아니었는데도 신기하게 할머니는 누구의 외상 줄인지 다 꿰고 있었다고 합니다.

허나 그마저도 단순한 표기일 뿐, 실제 돈을 꼭 받으려는 마음을 보인 적은 없었다고 합니다. 고성(高聲) 한 번 지른 적 없고 재촉 한 번 하지 않았던 할머니에게 모든 손님들이 아들이자 손자로 보였던 까닭일까요. 배고픈 사람에겐 아무 소리 하지 않고 상을 내어주고, 물고기를 잡아오면 말없이 매운탕을 끓여주시던 인심 좋은 할머니로 기억하는 분들이 아직 예천엔 많이 있습니다.
할머니는 살아생전 외상값을 다 받지 못했습니다. 아니, 굳이 받으려 하지 않았을 겁니다.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지만 나눔에 인색하지 않았던 유옥연 할머니는 누구에게라도 내 할머니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그래서인지 한 번 뵌 적 없는 주모 할머니의 목소리가 듣고 싶고, 머리 쓰다듬어 주시길 기다리고 싶은지 모르겠습니다.

 

삼강주막은 경북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三江里)에 속합니다. 마을(里)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강원도 황지연못에서 발원(發源)하는 낙동강과 경북 봉화에서 발원하는 내성천, 경북 문경 사불산에서 발원하는 금천, 이 세 강이 모이는 곳이라 해서 삼강이라 이름 지어졌다 합니다. 그런 까닭인지 예부터 이 지역은 풍수지리학적으로도 유명하다고 합니다.

이곳 최상열(崔尙烈) 문화관광해설사는 “기(氣) 좋기로 소문나 한양으로 과거 보러 가는 사람들은 여기서 잔뜩 기를 받고 가곤 했다”고 말해줍니다.
삼강주막이 몇 년도에 세워졌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안내판에도 ‘1900년경에 지었다’고만 알려줍니다. 주막에서 몇 걸음 되지 않는 곳에 보부상과 뱃사공 숙소가 있었는데, 77년 전 대홍수 때 모두 사라졌다고 합니다. 이 두 숙소는, 최근 삼강주막이 인기를 끌면서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새롭게 복원해 놓았습니다. 실제 이곳에서 숙박할 수도 있답니다.
삼강주막은 방 두 칸과 부엌 한 칸으로 돼 있습니다. 방 두 칸엔 모두 7쪽의 문이 나 있습니다. 문 바로 앞에서 자는 술꾼을 피해 드나들기 편하도록 배려한 구성입니다. 부엌에도 문은 4쪽입니다. 방이며 마루에 술상을 나르기 편하도록 한 것입니다. 당시에 그런 아이디어를 냈다고 생각하니 그저 놀랍기만 합니다.

삼강주막 바로 옆에는 회화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데, 수령이 무려 450년이나 됐습니다. 부(富)를 상징하는 나무이니 만큼 이곳에 오실 일 있으면 눈으로 직접 보길 권합니다.
삼강주막은 현재 삼강리 부인회에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인심 좋은 부인회장님은 제가 갔을 때 맛난 배추전과 두부, 도토리묵에 걸쭉한 막걸리 한주전자를 먹어보라며 주셨습니다. 덕분에 겉절이김치 맛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네비게이션을 이용한다면 경북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 166-1번지를 입력하면 되는데, 네비 업데이트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면 그냥 ‘삼강주막’으로 검색해도 됩니다. 홈페이지(www.3gang.co.kr)를 미리 방문해보고 움직이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아날로그 세대라 이것저것 다 귀찮다면 직접 전화해 궁금사항을 물어보세요. 054․655․3132.
경북 예천=취재․글 김응구 사진 ilovemother

酒幕

 

조선시대의 주막은 시골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한성이나 관아가 있는 대처에 많이 모여 있어서 ‘주막거리’라는 이름이 생겨났을 정도였다. 대처 이외에 주막이 많았던 곳은 3일장, 5일장, 7일장이 서는 장터를 비롯해 큰 고개 밑의 길목이나 행인이 많은 나루터 등이었다.

한양은 물론이고, 한양에서 인천으로 가는 중간 지점인 지금의 소사, 오류동에도 주막이 많았다. 이곳에 주막이 많이 생겨난 이유는 서울에서 출발할 경우 점심때쯤 그곳에 도착하고, 인천에서 출발할 경우에도 점심때쯤 이곳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남지방에서 한성으로 상경하는 길목인 문경새재에도 주막촌이 이뤄져 있었다. 이밖에 천안삼거리도 주막이 번성했던 곳이고, 전라도와 경상도의 길목인 섬진강 나루터(화개장터), 한지와 죽산물․농산물의 집산지인 전주 역시 주막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문경새재는 지리적으로 험한 산이 있는 곳이며, 영남에서 올라오는 나그네와 선비들이 과것길에 반드시 넘어야 하는 고개였다. 천하제일관문(天下第一關門)이라 일컫는 주흘관(主屹關)을 비롯해 제2, 제3의 세 관문을 지나야 겨우 충청도 괴산 고을로 빠져나갈 수 있었기 때문에 해꼬리가 아직 남아 있어도 대개는 문경새재 일대 주막에서 잠을 자야 했다. 따라서 이 일대에는 예부터 주막이 많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으며, 그 중에서도 상초리(上草里) 주막은 언제나 새재를 넘는 길손들로 붐볐다. 상초리, 중초리, 하초리 세 마을 중에서 상초리 주막거리가 제일 번창해 인마(人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주막은 그 크기가 제각기 달랐다. 한성 등 대처와 사람이 많이 모이는 물산(物産)의 집산지에 있는 큰 주막은 방이 수십 개에 창고와 마구간이 있어 행상인들의 물건을 맡아주거나 마구간에선 마소․나귀 등 운반용 짐승을 재워주고 맡아주기도 했다. 이와는 반대로 시골의 작은 주막은 방 2~4개에 술청이 따로 있는 정도였고, 거리의 간이 주막은 허술한 칸막이를 설치해놓고 낮에만 술과 국밥을 팔았다.

조선시대의 이들 주막은 지금처럼 간판을 달 줄도 모르던 시대였지만, 어떤 형태로든 주막이라는 표시는 해야 손님이 안심하고 사립문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시골 주막은 문짝이나 기둥에 ‘주(酒)’라는 글자를 써 붙이거나, 창호지를 바른 네모난 등에 ‘酒’라는 글자를 써서 사립문 옆에 내다 걸기도 했다. 보다 원시적인 방법으로는 용수를 장대에 달아 지붕 위로 높이 올려두기도 했다. 전국 방방곡곡 모든 주막의 간판이 ‘酒’자로 통일돼 있었지만 이들 주막에는 각각 이름이 있었다. 그러나 이 이름은 주막집 주인이 지은 것이 아니고 이 주막을 이용하는 손님들이 지었다. 그 주막 뜰에 오동나무가 있으면 ‘오동나무집’, 우물이 있으면 ‘우물집’, 바깥주인의 코가 크면 ‘코주부집’, 주모의 수다가 심하면 ‘수다쟁이집’ 등으로 손님들끼리 지어 부르는, 애교와 해학이 깃든 이름이 있었다.

조선시대 대처에 있던 주막의 구조적 특징은 주모가 앉은자리에서 술이나 국을 떠 손님에게 줄 수 있도록 돼 있다는 점이다. 주막의 부엌은 주모가 앉아 있는 방 또는 마루와 밀착돼 있어서, 주모는 마루나 방에 앉은 자세로 부엌의 솥에서 끓는 술국을 그릇에 떠 담을 수 있었고, 또 술도 뜰 수 있는 구조였다. 주모나 주파가 이처럼 앉은 자리에서 주막의 중추적인 일을 해낼 수 있도록 꾸며져 있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주막에서 팔았던 술은 탁주가 대부분이었고, 원하는 사람에게 팔기 위해 소주나 약주를 준비해 두는 곳도 있었다. 돈 많은 양반 손님의 출입이 잦은 곳에선 방문주(方文酒) 등 고급술을 준비해 뒀다가 그들에게 팔기도 했다. 주막에선 술을 한 잔, 두 잔씩 잔술로 마시는 경우가 많았는데, 술 한 잔에 무료 안주 한 점씩 주어졌다. 주막 복판에는 육포, 어포 등 마른안주와 삶은 쇠고기, 돼지고기, 빈대떡, 떡산적, 생선구이 등이 목판 위에 진열돼 있었다. 식사류는 장국밥이 주종을 이뤘는데, 이는 양지머리로 국물을 뽑기 때문에 영양가도 좋았다.

나그네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술을 파는 역할을 한 것은 대처의 번화한 거리에 있는 주막뿐만이 아니었다. 시골에는 마을 근처 외딴 곳에 작은 주막이 있었는데, 이 주막 역시 나그네의 지친 몸과 향수를 달래주는 곳이었다. 이런 곳은 거의 서민들이 이용했는데, 길가는 나그네는 물론이고 5일장, 7일장을 따라다니는 장사꾼들도 많이 이용했다.

주막의 기능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첫째, 손님에게 술을 팔면서 요기를 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며 둘째, 해가 저물어 더 이상 길을 갈 수 없는 나그네에게 숙박처를 제공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주막의 이 같은 기능적 특징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데,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정보를 주고받는 장(場)이 되기도 했다. 또 각 지방에서 온 사람들이 만나는 곳이기 때문에 정보 교환과 문화교류의 중심적 역할도 했다.

옛날 시골 주막에선 술과 밥을 사 먹으면 대체로 잠은 그냥 재워주는 것이 관례였다. 잠자는 손님은 대개 도착순으로 먼저 온 사람이 따뜻한 아랫목을 차지하게 마련이었다. 한성에서 과거라도 있으면 올라가는 각 도(道)의 길목에 있는 주막은 과거 보러가는 선비들로 만원이 됐다. 이때에는 돈과 권세 있는 지방 양반댁 자제들이 주막을 이용하므로 그들이 든 주막에선 선착자가 좋은 자리를 차지하는 풍습이 깨진다. 지위나 권세가 낮으면 천금을 낸다 해도 양반댁 자제를 밀어내고 좋은 방을 차지하거나 상석을 차지하지 못했다. 주막에선 양반이 판을 치고, 양반 중에서도 권세 있는 양반이 좋은 방을 차지하거나 상석에 앉아 거드름을 피웠다. 간혹 양반 손님끼리 거드름을 피우다 시비가 붙으면 따라온 종들이 서로 자기 주인이 더 양반이라고 우기다가 육박전을 벌이는 희한한 일이 일어나는 곳도 이 주막이었다.

〈전통주조백년사〉에서

Exit mobile ver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