音酒동행
가을편지, 지란지교에게
문 경 훈 교사(지혜학교)
가을은 남자를 감성적으로 만든다. 해진 트렌치코트의 깃을 추켜세우고 낙엽 쌓인 길을 걸을 때나 혹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베니 마닐로우의 ‘when october goes’나 에릭 클랩튼의 목소리로 ‘autumn leaves’를 들을 때면 벅차오르는 감정에 눈시울이 붉어지고 하염없는 상념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도 적당히 서늘한 공기와 푸른 하늘, 쨍한 햇살이 금세 마음을 다독여 주니 이래저래 가을은 마성의 계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추야장에 책 넘기는 재미가 그만이라지만 뜻 통하는 친구와 술잔 기울이는 재미만 할까. 옛 성현들은 인생의 즐거움을 논할 때 하나같이 친구와 술잔 기울이는 것을 빼놓지 않았다. 상상해보라, 붉은 물든 숲을 병풍처럼 두른 누정에 올라 벗님과 나누는 술잔의 풍경을. 절로 흐뭇해지지 않는가.
유붕이자원방래라, 느닷없이 찾아온 친구가 더 반갑겠지만, 놀러오라고 먼저 청한다고 해서 반가움이 덜할 리도 없을 테다. 물론 요즘에야 전화 한 통이면 친구를 부를 수 있지만 이전에는 꼭 편지를 썼을 것이다. 그런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가요 속에도 가을과 편지는 심심찮게 등장한다.
동물원 2집에 수록된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는 그 자체로도 유명하지만 후에 김광석이 다시 부르기 1집에서 리메이크-원곡의 보컬도 김광석이기에 리메이크란 표현이 어색하긴 하지만-하여 더욱 유명한 곳이다.
책을 접어놓으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쓴다는 낭만적인 행위의 뒤에는 ‘안일한 만족’과 ‘허위의 길’같은 인간 개인의 고뇌가 숨어져있다. 가사와 어우러지는 김광석 특유의 절규하듯 내지르는 절창이 멋진 곡으로 이후 수많은 후배 가수들에 의해 리메이크되었다.
김광석의 노래도 훌륭하지만 사실 가을과 편지라는 주제로 빼놓을 수 없는 불후의 명곡은 김민기의 ‘가을편지’다. 시인 고은이 쓰고 김민기가 곡을 붙인 이 노래는 가을의 쓸쓸한 정취와 외로운 남자의 마음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초판은 최양숙에 의해 불렸지만 93년 김민기의 목소리로 담담히 풀어낸 곡이 훨씬 더 짙게 다가온다.
김민기라고 하면 요즘 젊은 세대는 거의 모르겠지만 민중가요로 유명한 ‘아침이슬’이나,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 광고 속에서 직접 불렀던 ‘상록수’ 작사·작곡가이다. 민가로 유명한 두 곡이지만 김민기도 처음부터 저항의 의미로 이 곡을 쓰진 않았다고 한다.
심지어 ‘아침이슬’같은 경우 처음엔 아름다운 가사로 상도 받았었다. 후일 양희은의 발언에 의하면 포크 동아리 ‘청개구리’에서 김민기가 썼다가 마음에 안 들어서 버려둔 곡을 부르고 싶다고 설득하여 양희은의 앨범에 수록했다. 그러나 엄혹했던 유신 시절 청년들이 이 노래를 투쟁의 현장에서 부르기 시작하여 금지곡 판정을 받고 결국 오늘날 대표적인 민가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2016년 촛불집회 당시에도 양희은이 무대에 올라 이 노래를 불렀으니 아마 요즘 어린 친구들도 알 것이다.-
‘상록수’의 경우도 비슷한데 원래는 노동자들의 결혼 축가로 만든 곡을 양희은이 ‘거치른 들판에 푸르른 솔잎처럼’이라는 노래로 발표했었다. 이후 전개는 ‘아침이슬’과 같다. 그 외에도 양희은이 부른 ‘백구’나 ‘작은 연못’, ‘늙은 군인의 노래’ 등도 본래 김민기의 노래다.
김민기는 학전의 뮤지컬 등 극 연출가로도 훌륭한데 필자 역시 보지는 못 했지만 시인 김지하의 극 ‘금관의 예수’에 삽입된 ‘주여, 이제는 여기에’는 자뭇 비장하기까지 한 명곡이며 노래극 ‘공장의 불빛’은 길이 남을 명작이라 전해진다.
이처럼 민중의 삶과 고난 바로 옆에서 호흡하는 김민기이기에 통속적인 대중가요를 부정적으로 바라보았을 것 같지만 의외로 조용필의 노래를 애창했다하며, 평론가 강헌의 주도로 조용필과 두 차례 만남을 가진 이야기가 전설처럼 내려온다.
다시 ‘가을편지’로 돌아와, 누정에 올라 친구와 술을 마시는데 그냥 소주도 좋지만 기왕지사 특별한 술이면 좋지 않을까. 지금은 판매하지 않는 듯하지만 10여 년 전에 심심찮게 볼 수 있었던 대나무 통 모양의 ‘죽마고우’는 이름부터가 미덥다. 담양 추성고을에서 나오는 ‘대통대잎술’에 비한다면 그저 약간 단술에 불과하지만 이름이 가지는 상징성이 힘을 발휘한 경우다.
맛도 좋고 뜻도 좋은 술이라면 망설이지 않고 순창의 ‘지란지교’를 말하고 싶다. 지란지교(芝蘭之交)는 지초와 난초의 사귐이라는 뜻으로 밝고 깨끗한 벗과의 사귐을 의미하는 사자성어에서 따왔는데, 양조장 이름 역시 ‘친구들의좋은술지란지교’이니 정체성이 확고한 술이다.
지란지교는 대표인 임숙주 선생님 내외가 직접 띄운 누룩과 순창의 쌀, 그리고 좋은 지하수로 만들어진 명주다. 원래 탁주와 약주가 판매되다가 직접 지은 무화과 농사로 수확한 무화과를 이용한 무화과 탁주도 추가되었다. 혹 양조장에 직접 방문한다면 소줏고리로 내린 진짜 전통 소주도 시음해 볼 수 있으며 대표님 내외 두 분의 아낌없는 인심도 느낄 수 있다. 맛과 향은 잘 만든 탁주의 전형인데 달큰하게 기분 좋은 여름 과일 향과 무게감, 산미, 감미의 적당한 균형감이 일품인 술이다. 먼데서 친구를 불렀다면 이만 한 술은 내놓아야 할 것이다.
이제 가을을 즐길 수 있는 날들이 얼마 남지 않았다. 원래 노래를 들으며 조용히 한잔하는 것을 선호하지만 요즘 같은 날엔 바람소리, 새소리 그리고 벗의 소리와 함께 한 잔 기울이는 것이 더 좋다. 조만간 집에 ‘지란지교’마련해 놓고 편지로 ‘지란지교’를 부르련다. 그리고 한껏 취할 요량이다.
◇ 필자 문경훈
▴1990년 출생 ▴동국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과 졸업▴한국전통주연구소 가양주반 수료
▴한국가양주연구소 전통주소믈리에 자격 취득 ▴한국가양주연구소 명인반 수료▴(현) 지혜학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