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하의 취중진담
영혼까지는 취하지 않게 해야 한다
우리가 제사를 지낼 때 반드시 술을 올리는 것 또한 술을 매개체로 하여 조상님들과 교신한다고 하는 믿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누구는 “술이 몸 안으로 들어오면 영혼이 몸 밖으로 빠져나간다”고 했고, “술은 육체와 영혼을 죽인다”고 했다.
탈무드에서는 “술이 머리로 들어가면 비밀이 밀려 나온다”면서 “악마가 인간을 찾아가기가 너무 바쁠 때는 대신 술을 보낸다”고 적고 있다.
이처럼 영혼에 나쁜 영향을 주고 있는 술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고 존재하고 이유는 술의 부정적인 면 보다는 긍정적인 면이 더 많기 때문은 아닐까.
술은 인간의 역사와 그 괘를 같이하고 있다는 것이 정설이다. 디오니소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술의 신이다. 제우스와 세멜레의 아들로 자연의 생성력 및 포도, 포도주를 다스린다고 한다. 로마 신화의 바쿠스(Bacchus)에 해당한다.
술을 신들만이 마실 수 있었던 시기에는 결코 술이 영혼을 지배하지 못했을 것이고, 신들 역시 영혼을 빼앗길 정도로 술을 먹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월이 흘러 인간들이 술을 빚어 먹기 시작하면서 술은 인간을 황폐하게 만들기도 하고 또는 마음을 윤택하게 만드는 요물이 되어 가고 있다. 새삼스럽게 지금에 와서 술의 양면성에 대해 논 하는 것은 적절치 않아 접어 두기로 하자.
조선 중종 때 윤선도, 박인로와 함께 3대 시인으로 꼽혔던 정철(鄭澈)은 그의 절친 이었던 율곡 이이가 죽자 낙향하여 술로 세월을 보내던 시절 권주가인 장진주사(將進酒辭)를 지은 것이라 한다. 때는 이 때쯤이었을 것 같다.
한 잔 먹세그려 또 한 잔 먹세그려 /꽃 꺾어 산(算) 놓고, 무진무진 먹세그려 /이 몸 죽은 후에 지게 위에 거적 덮어 졸라 메여 지고 가나….
이 시에서 보듯 슬픔에 겨워 술을 먹지만 무한정 마시지는 않았던 구절이 바로 ‘산(算) 놓고’라는 것이다. 술잔을 세어가며 마신다는 것은 정신을 잃을 때 까지 즉, 영혼이 취할 때까지는 먹지 않았던 것이 우리의 조상들의 지혜였던 것이다.
또 술을 마실 때도 고기를 씹는 것처럼 마시면 술에 대한 폐해는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조지훈 시인도 ‘술은 인정이라’에서 “제 돈 써가면서 제 술 안 먹어준다고 화내는 술문화”를 개탄 한 바 있다.
술을 부정적으로 보는 집단에서는 술을 원수취급하기 일쑤다. 이를테면 신라의 헌강왕은 적병과 싸우던 중 주연을 베풀던 포석정에서 패망했고, 일본의 장수도 진주 촉석루에서 주색에 빠졌다가 논개에 의해 죽었다는 것을 내세운다. 심지어는 이태백도 술 때문에 패가망신했다고 주장한다.
과연 술을 패가망신시키고 영혼을 취하게만 만드는 것일까.
슬픔에 젖었을 때 이를 잊게 해주고, 가끔 한 잔의 술은 내 안의 낯선 타인을 깨우는 영혼의 묘약이 될 때도 있지 않은가. 술은 사람들 사이의 벽을 허물어 술을 함께 한 사이와 그렇지 않은 사이에 소통은 확연히 다르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것이다.
과학자들이 많은 실험을 통해 측정한 영혼의 무게는 21그램이라고 한다. 이 영혼이 알코올에 취하지 않게 산 놓고 마시는 습관부터 길러야 할 때인 것 같다. 그래야만 때가 돼도 김학의 법무차관 같은 꼴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같은 소시민이야 언감생심(焉敢生心) 그런 처지도 그런 그릇도 되지 못하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