酬酌은 사람과 사람을 정신적으로 결속시키는 숭고한 수단
나라별 음주문화 유형
합리주의의 서양인들은 獨酌문화
중국인들은 잔을 맞대는 對酌문화
서로 술잔 주고받는 우린 酬酌문화
단일민족인 우리는 예부터 서로를 신뢰하고 하나 됨을 강조해왔다. 본래 마음이란 빛깔도 냄새도 형체도 없으며, 따라서 보이지도 않고 잡히지도 않는다. 이러한 마음을 주고받거나 하나로 해서 약속할 때 어떤 형태로든 그 무와 유를 보고 싶어 한다. 그러한 정신적 표출이 술 마실 때 술잔을 돌려가며 더불어 마시는 형태로 나타난 것이리라. 이 같은 일심동체를 다지는 공음(共飮․飮福)은 살아있는 사람뿐 아니라 신이나 죽고 없는 조상과의 사이에서도 이뤄졌다. 제사 때 올렸던 음식과 술을 나눠 먹는 음복(飮福) 절차가 바로 조상과 후손을 잇는 결속행위인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술잔을 주고받으며 마시는 음주문화를 ‘수작(酬酌)문화’라 하고, 중국이나 러시아 동구 사람들처럼 잔을 맞대고 마시는 것을 ‘대작(對酌)문화’라고 한다. 요즘 술자리에서 술잔을 돌린다든지 술을 다 마신 뒤에 자신의 빈 잔을 건네고 따라주는 걸 예의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우리 고유의 주도(酒道)에 어긋나는 일이다.
◇ 독작(獨酌)․자작(自酌)문화
자기 술잔에 제 술을 따라 마시고 싶은 만큼 따라 마시는 문화. 이러한 음주문화는 개인주의와 합리주의가 일찍부터 발달한 서양인들이 즐겨 찾는 술집에서 마시는 주법이다. 이 자작문화는 오랫동안 유럽에서 꽃피워온 술 문화다. ‘월하독작(月下獨酌)’을 비롯해 주선(酒仙) 이백(李白․이태백․701~762)이 지은 주시(酒詩)의 거의가 독작이고, 이백보다 주시의 분량은 적지만 백거이(白居易․백낙천․772~846)도 역시 거의가 독작시다.
◇ 대작문화(對酌文化)
◇ 수작문화(酬酌文化)
서로 술잔을 주고받으며 마시는 한국 특유의 주법. 술잔 터놓고, 마음 터놓고 함께 마시는 우리만의 주법이다.
상을 푸짐하게 차려 손님 대접하는 것을 빈례(賓禮)의 제일로 치던 시기에, 당시 석학자로 칭송받은 우암 송시열(尤菴 宋時烈․1607~1689)은 ‘손 대접하는 도리라’는 ‘계여서(誡女書)’의 1장에서 다음과 같이 훈계하고 있다.
손 대하는 도리라. 내 집에 오는 손님이 원래 친척이 아니면 지아비 벗이요, 시족의 벗이라. 음식 잘하여 대접하고 실과나 술이나 있는 대로 대접하되 손이 잘 먹지 못하여도 박대요 지아비 나간 때는 종 시켜 만류치 아니함도 박대니 일가를 청하여 주인노릇 하고 일가 사람이 없으면 마을 손도 아니 오리니, 손이 아니 오면 가문이 자연 무시하고 지아비와 자식이 나가서 주인 할 일 없을 것이니 부디 손 대접 극진히 하라. 옛 부인은 달우를 팔아 손을 대접하고 자리를 썰어 밥을 먹었으니 요사이 어디 가서 잘 먹었다 하면 그는 기뻐하니 부디 명심 경계하여 잘 대접하되 인심이 부실한 손이 오면 조심하여 잘 대접하고 빈천인 손님이 오면 헐후히 대접하니 이는 부덕한 행실이라. 노소는 분간하여 대접하려니와 귀천과 빈부는 분별치 마라.
박두세(朴斗世․1650~1733)의 〈요로원야화기(要路院夜話記)〉에는 조선후기 충청도에서 있었던 손님 대접 풍속을 소개하고 있다. 이 수필집에 따르면 손님 대접의 식단을 3등급으로 만든 집안이 있었다. 이 집안에선 손으로 턱을 만지면 가장 조잡스러운 상차림을 내고, 코를 만지면 중간 상차림을, 이마를 만지면 가장 좋은 상차림을 냈다. 이를 눈치 챈 동네사람이 주인의 손을 자꾸 이마 부분으로 올리게 해 최고 대접을 받았다는 우스운 이야기가 있다.
〈해동가요(海東歌謠)〉에도 술대접의 풍속을 알려주는 시조가 있다.
술 익으면 벗이 없고 벗이 오면 술이 없더니
오늘은 무슨 날로 술이 익자 벗이 왔네
두어라 이난 병이니 종일 취를 하리라
19세기 판소리의 각색자로 유명한 신재효(申在孝․1812~1884)는 그의 향리(鄕里)인 전라도 고창에 14칸의 사랑채를 짓고, 각 도(道)의 사람들을 각 도에 해당하는 방에 재우면서 사귀었다고 한다.
◇ 술잔 돌리기
조선후기에 담배가 전래되면서 술과 담배는 한국인에게 없어선 안 될 기호품이 됐다. 술은 제천의식에 사용하는 제물이기도 하지만, 혼례(婚禮)·관례(冠禮)·상례(喪禮)에 쓰이는 요긴한 식품이기도 하다. 혼례 때에는 신랑이 든 술잔을 받아 신부가 마셨다. 제사 때 사용한 술은 나눠 마셔야 한다고 해서 참석자가 돌아가며 마시는 음복 풍속이 생겼다.
중국인들도 우리나라만큼 술을 좋아하긴 하지만 잔을 돌리는 일이 없고, 일본인들은 자작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렇게 술잔을 돌려 권하는 풍속은 무리를 낳기도 한다.
◇ 회음(回飮)
우리 조상들의 음주 예절은 두 가지가 있다. 향음주례(鄕飮酒禮)와 회음(술잔 돌리기)이다. 고려 인종 때 향음주례를 행하도록 규정지었고, 조선시대 성종 때 일반화됐다고 한다. 향음주례에서도 잔 주고받기가 있었다. 경주 포석정에는 곡수(曲水)를 흐르게 해 술잔을 돌려 마신 신라의 회음 유적이 있다. 또 조선시대 승무원(承文院)에서 임금에게 문서를 올리는 날에는 임금이 주식을 내리게 마련이었는데, 그 술을 ‘고령종(高靈鐘)’이라는 큰 술잔에 담아 돌려가면서 마셨다고 한다. 이 같은 관습에 의해 요즘에도 대폿잔을 돌리며 결속을 다지는 음주 행위가 남아있다.
술이란 강제로 권하는 게 아니었다. 기생이 권주가(勸酒歌)를 부르며 권하는 특별한 경우에는 술을 받았지만, 무작정 마주앉아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은 일본식이었다. 술을 마시는 데 있어 한국과 일본의 예법은 조금씩 다르다. 한국에선 ‘헌주(獻酒)’라고 해서 나이 어린 사람이 어른에게 술을 올리지만, 일본에선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술잔을 내려준다. 그래서 일본인 연회석에 가면 아랫사람들이 윗사람을 찾아가 술을 간청하는 광경을 볼 수 있다.
◇ 수작문화, 최고의 정신적 교감
대포문화는 수작문화의 결정체다. 앞서 말했듯이 서양 사람들은 자기 술잔에 자기가 먹고 싶은 만큼 따라 마시며, 중국이나 러시아 동구 사람들은 잔을 맞대고 건배하면서 마시는 대작문화에 익숙하다. 그리고 한국은 술잔을 주고받으며 마시는 수작문화다. 일본도 어느 한 때에 잠깐 수작을 한 적이 있지만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없다. 현재 한국 외에 술잔을 주고받는 민족은 이름도 기억할 수 없는 아프리카의 한 종족밖에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수작문화의 기원을 소급해 보면 사람과 사람을 정신적으로 결속시키는 숭고한 수단이다. 죽음으로써 약속한 것을 보증할 필요가 있을 때 한 잔에 쏟아 부은 짐승의 피를 나눠 마시는 혈맹(血盟)을 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삼국지에서 혈맹지 형제를 맺을 때 그 징표로 피를 모아 술을 돌려가며 의형제를 맺었던 유비, 관우, 장비의 그림이 있다.
신라 화랑들이 그랬듯이 한 잔의 차를 나눠 마심으로써 공생공사(共生共死)를 다지는 차례로 진화했으며, 그것이 한 잔 술을 나눠 마시는 수작으로 다시 진화한 것이다.
경주 포석정(鮑石亭)의 술잔 띄어 돌려 마시는 곡수 현장을 신라를 패망시킨 환락의 현장이라고 매도하지만 그것은 한 쪽만 보는 우를 범한 것이다. 그 현장은 신라의 군신(君臣)이 빙 둘러앉아 한 잔 술을 곡수에 띄어 돌려 마심으로써 동심일체, 일심동체를 다졌던 거룩한 현장이요, 신라를 번성하게 했던 정신적 제장(祭場)이 바로 그곳이기 때문이다.
세조는 쿠데타 음모를 진행 중이던 시절부터 회심의 술자리에선 바지춤에 숨겨 갖고 다니던 표주박을 꺼내 한 잔 술을 나눠 마시면서 은밀히 뜻을 다지며 자기 사람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우리 옛 관청 풍습에는 한 말(斗)들이 커다란 술잔, 곧 대포(大匏)를 마련해두고 일정한 날을 잡아 상하 차별 없이 술을 돌려 마시면서 일심동체를 다지는 보편화된 의식이 있었다. 각 관청마다 그 대폿잔 이름이 달랐는데 사헌부(司憲府)는 ‘아난배(鵝卵杯)’, 예문관은 ‘색미배’, 성균관은 ‘벽송배(碧松杯)’라고 했다. 이 돌림 술의 규모를 줄인 것이 술잔을 주고받는 수작(酬酌)인 것이다.
혼례 때 합근례(合巹禮)라 해서 표주박 잔에 술을 따라 신랑신부가 입을 맞대고 마시는 절차가 있는데, 이는 정신과 육신이 하나 되는 징표로써 바로 수작의 상징적 의미다.
주시를 많이 남긴 조선 명종 때의 정승 상진(尙震)은 비록 달을 맞대고 혼자 술을 마시는 일이 있더라도,
달을 술잔 속에 담아 잔 기우니
달이 또한 나의 창자 속에 들어
안팎의 밝은 빛이 서로 오가니
그거 아니 좋은가
라고 읊음으로써 달과 나를 일체화, 동일화 하고 수작문화성 또는 대포문화성 음주를 하고 있다.
또 주호(酒豪)였던 선조 때 정승 신용개(申用漑․1463~1519)도 아홉 송이 국화 화분을 아홉 명의 손님으로 가상하고 꽃과 대작을 하는데, 꽃으로부터 술잔을 받을 때에는 국화 꽃잎을 띄어 받아마셨다고 한다. 이 역시 동일화라는 수작문화를 정서적으로 승화한, 지극히 한국적인 정서유형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예부터 전승돼 내려온 대포문화는 그 정신적, 정서적 여운과 더불어 이 세상에서 유일한 수작문화를 우리나라에 보존케 하는데 기여했다.
남태우 교수(중앙대)의 〈술술술 주당들의 풍류세계〉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