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술

남성의 양기와 여성의 음기 보호 효과에 탁월하 연엽주

 

 

남성의 양기와 여성의 음기 보호 효과에 탁월하 연엽주

‘아산 연엽주’는 예안 이씨(禮安 李氏) 가문에서 대를 잇고 있는 술

 

연엽주, 그리고 외암민속마을

 

 


연엽주(蓮葉酒)는 말 그대로 연잎을 넣어 빚은 술이다. 이 술을 담근 항아리에 다른 술을 부어도 향이 여전할 정도로 성질이 온순한 듯 강하다. 약주(藥酒)인 만큼 탁한 피를 맑게 하고 혈관을 넓혀주는 효능이 있다. 특히, 남성의 양기(陽氣)와 여성의 음기(陰氣)를 보호해주는 효과가 탁월하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마시고 취해도 소변 한 번이면 숙취가 어느 정도 해소된다.

‘아산 연엽주’는 예안 이씨(禮安 李氏) 가문에서 지금까지 잇고 있는 술이다. 현재 충남 아산 외암민속마을 내 연엽주가(家)의 이득선(李得善)씨 내외가 빚고 있다. 기능전수자는 이씨의 부인 최황규(崔晃圭)씨다. 여느 술이 그렇듯 시어머니에게서 며느리로 양조기술이 계속 이어져 내려왔다. 이씨 내외의 첫째, 둘째 며느리가 이수자로 선정됐고, 앞으로 심사를 거쳐 전수자 한 명을 뽑는다.

이득선 씨의 집은 ‘참판댁’으로 불린다. 그의 할아버지 이정열(李貞烈)이 구한말 때 규장각 직학사(直學士)와 참판(參判)직을 지냈기 때문에 그 택호(宅號)가 붙었다. 지금의 집은 직언극간(直言極諫)으로 유명한 이정열의 기개를 높이 산 고종황제가 하사한 것이다. 가만히 보면 창덕궁(昌德宮)의 낙선재(樂善齋)와 비슷한 구조다. 애초 이 집을 지을 때 사랑채 두 채를 빼고 낙선재를 본떠 만든 것이다. 거창하게 지으면 이정열이 거절할 게 뻔해 적당한 크기로 줄인 것이다.

이득선 씨의 5대조인 이원집(李原集)이 쓴《치농(治農)》에는 연엽주 제조방법이 자세하게 기록돼 있는데, 지금도 이 방법에 따라 빚는다.

연엽주는 궁중술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원집이 조선 25대 왕인 철종(哲宗)의 비서 감승(지금의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있었을 때 3년간 이어진 가뭄으로 인해 민심이 흉흉했다. 그런 탓에 궁에는 “나라가 이 지경인데 사대문 안 사대부들은 호의호식하고 있다”는 상소가 빗발쳤다. 생각다 못해 이원집은 삼정승을 불러 모아 대책을 논의했다. 이에 삼정승은 “어차피 다 알고 있는 얘기이니 임금님 심기가 불편하지 않을 때에 한 번 말씀드리라”고 조언했다. 상황을 전해들은 임금은 당장 구첩반상을 오첩반상으로 줄이고 잡곡을 섞어 먹되 간식은 줄이라는 명을 내렸다. 당연히 수라상엔 술은 물론 식혜나 수정과, 떡도 올리지 못했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신하들은 반주(飯酒)조차 들지 못하는 임금에게 죄스러운 마음을 갖게 됐다. 해서 생각해낸 것이 바로 ‘약주(藥酒)’였다. 곧 몸에 이로운 술, 도수가 낮아 음료에 가까운 술을 개발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그렇게 만든 수십 가지 술 가운데 선택된 것이 바로 연엽주다.

충남무형문화제 제11호인 아산 연엽주는 근래에까지 이씨 가문의 제주(祭酒)로 사용했다. 또는 귀한 손님 대접용으로 썼다. 그러다 10여년 전 국세청에서 주류제조면허를 받은 후부터는 집에서 조금씩 빚어 800㎖ 병에 담아 팔고 있다.

연엽주의 주원료는 멥쌀, 찹쌀, 연잎, 누룩이다. 먼저 멥쌀 7.2㎏과 찹쌀 1.8㎏을 섞어 고두밥을 만들고, 이를 식힌 후 누룩 4.5㎏을 넣고 버무린다. 술 항아리는 불길로 바싹 말린 후 그 안에 연잎 500g을 넣은 다음, 버무린 고두밥을 넣고 깨끗한 지하수 18ℓ를 붓는다. 술을 만든 지 30일이 지난 후 용수를 박아 술을 뜬다. 알코올 도수는 14%.

내비게이션 충남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 88번지(참판댁) ☎ 041․543․3967

 

“시든, 떫든 5代째 잇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

연엽주家 이득선 선생

 

넉넉잡고 서울에서 2시간 반이면 도착하는 충남 아산 외암민속마을 내에 연엽주가(蓮葉酒家)가 있다.

장맛비가 한창이던 날, 집 앞에서 이득선 씨의 둘째 아들이 우산을 쓰고 마중 나와 있었다. 연엽주가 사람들과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다.

 

이득선 씨와 집안 얘기부터 나눴다. 민속학자인 이 씨에게 어릴 적 많은 가르침을 줬던 할아버지와의 추억이 내용의 절반을 차지했다. 그렇게 두어 시간을 얘기하다 자연스럽게 연엽주 얘기로 옮아갔다. 그는 연엽주 얘기를 시작하면서 “시거나 혹은 달거나, 또는 떫거나 5대째 끊임없이 이어져 온 사실이 중요하다”고 했다.

알려질 만큼 알려진 술이라 번듯한 양조시설을 갖춰놓고 대량생산이라도 할 법 한데, 그는 여전히 가양주(家釀酒)를 고집한다. 선비의 고집이다. 내놓고 술장사 하는 곳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 까닭에 해마다 빚는 술의 양은 그리 많지 않다. 실제 연엽주를 판매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이 술은 그 숱한 세월동안 가문의 제주(祭酒)로만 사용했기 때문이다.

술을 빚을 때 가장 중요한 재료 중 하나가 바로 물이다. 물론 연엽주를 빚을 때에도 아무 물이나 쓰지 않는다. 오래 전에는 근처 산기슭의 물을 가져와 사용했다. 그 물도 흐르는 방향대로 떠야지 거슬러 뜨면 안 됐다.

“20년 전인가, 집 주위를 둘러보니 마당 중간쯤에 샘이 솟아날 곳이 보이더라고요. 물길을 찾은 거죠. 인부를 사서 한 10일 정도 뚫었습니다. 지표면에서 27m 정도 들어가 암반을 1m20㎝쯤 뚫으니 샘이 솟더군요. 정혈(正穴)을 제대로 뚫은 거죠. 식수검사를 의뢰했는데, 최고급수랍디다.”

연엽주로 인해 인연을 맺은 주한 프랑스대사 네부만과의 추억은 이씨에게 아직도 새롭다. 30여년 전, 그에게 한 지인이 부탁을 해왔다. 프랑스대사의 어머니가 곧 백수(白壽)인데, 그 잔치에 올릴 술이 필요하다는 얘기였다. 5대째 연엽주를 빚고 있는 집이 있는데 만나보겠느냐고 했더니 그러겠다는 대답까지 받아놨다는 말과 함께였다. 그게 인연이 돼 이 씨와 대사의 만남이 시작됐고, 둘은 서로의 거처로 틈틈이 왕래했다.

한 번은 대사가 고마움의 표시로 귀한 와인 한 병을 선물했다. 이 씨는 이를 마셔보곤 “술맛이 왜이래, 난 싫다”고 했다. 이 말을 전해들은 대사는 다른 와인 한 병을 보냈다. 벨벳 쌈지 안에 담겨있는 와인이었다. 이번엔 “60% 정도는 만족한다”고 했다. 훗날 가죽 쌈지 안에 담긴 와인까지 보내왔다. 그제야 황홀경에 빠졌다. 그때의 기억에 “하늘과 땅, 사람 모두를 통치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내가 술을 잘 다스리는 사람인데, 그 와인을 마시고 정말 놀랐습니다. 석 잔을 내리 마시고는 넉 잔, 다섯 잔은 조금씩 나눠 마셨어요. 그 맛은 정말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둘의 만남은 네부만 대사가 본국으로 귀향할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이 씨에게서 얘기를 듣다가 문득 “그 와인들, 당시엔 얼마쯤 했을까요” 하고 물었더니 “아닌 게 아니라 그때 나도 궁금해서 비서에게 살짝 물었는데 ‘굳이 알려 하지 말라’고 하더라”며 껄껄 웃었다.

사실 이 씨는 서울서 대학원까지 마치고 서울시청 토목국장까지 지냈던 ‘인재’였다. 그런 그가 아버지의 사망 소식에 내려와 3년간 시묘(侍墓)하다 아예 고향에 눌러앉았다. 그때부터 연엽주 빚는 일을 도우며 민속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우리 가문에선 연엽주 외에도 장(醬)이나 김치, 초(醋) 등이 유명해요. 만드는 방법이나 맛 등이 일반적인 상식 수준이 아녜요. 언젠가 이들을 세상에 알릴 날도 오겠죠.”

들리는 얘기로 이 씨는 슬리퍼를 신거나 반바지 차림인 사람들에겐 절대 술을 내주지 않는다고 한다. 만드는 사람이 정성과 예(禮)를 다하는 만큼 마시는 쪽 역시 몸가짐과 마음가짐이 단정해야 한다고 믿는 까닭이다. 그런 선비정신이 부럽고 자랑스러울 뿐이다.

 

아산 외암민속마을

 

충남 아산 시내에서 남쪽으로 약 8㎞ 떨어진 설화산 동남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중요민속자료 제236호.

외암마을은 500여년 전 강씨(氏)와 목씨 등이 정착해 이룬 마을이다. 지금의 외암마을은 조선 선조 때 예안 이씨 가문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집성촌(集姓村)이 됐고, 그 후 예안 이씨 후손들이 번창해 많은 인재를 배출하면서 양반촌의 면모를 갖추게 됐다. 성리학의 대가 외암(巍巖) 이간(李柬) 선생이 이 마을에 살면서 더 많이 알려졌다. 그의 호인 외암도 마을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외암마을에는 충청지방 고유의 격식을 갖춘 반가(班家․양반의 집안)의 고택과 초가, 돌담, 정원이 옛 모습 그대로 보존돼 있고, 다량의 민구(民具)와 민속품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가옥 주인의 관직명이나 출신지명을 따서 참판댁, 감찰댁, 참봉댁, 종손댁, 송화댁, 건재고택(영암댁) 등의 택호가 정해져 있다. 마을 뒷산인 설화산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시냇물을 끌어들여 연못 정원수로 이용하는 등 특색 있게 꾸민 정원도 유명하다. 마을 내에는 6000m가 넘는 자연석 돌담장이 보존 중이며, 돌담으로 연결된 골목길과 주변의 울창한 수림(樹林)이 마을 경관을 더욱 고풍스럽게 한다.

Exit mobile ver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