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도 영어 배우듯이 해야 한다
김준철(김준철 와인스쿨원장)
동양은 서양에 비해 나라별 교류가 활발하지 않아 고유의 풍습에 많은 차이가 난다. 서양은 기독교 문화나 그리스·로마 문화에 바탕을 둔 공통된 뿌리를 갖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그들의 전통 문화권에 접근하기가 더 쉬울 수 있다. 그래서 서양을 잘 이해하려면 성경과 그리스·로마 신화를 잘 알아두는 것이 좋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사교적인 모임에서까지 성경이나 그리스·로마 신화를 얘기하라는 것은 아니다. 가장 실질적이고 재미있는 방법은 기독교와 그리스·로마 문화에 뿌리를 둔 와인에 대해 얘기하고 마시면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서양 술의 원조인 와인에 대해 잘 알고 있다면 사교 모임에서 가장 좋은 매개체가 될 수 있다.
보통 와인에 대한 지식이라면 언뜻 와인 잔을 잡을 때는 어떻게 하고, 따를 때는 어떻게 하는 식의 와인 매너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 와인 매너는 사교적인 모임에서 오히려 더 딱딱한 인상을 줄 수 있다. 자연스럽게 얘기를 해가며 즐거운 마음으로 마시는 것이 상대에게 더 친근감을 준다. 또 먼저 색깔을 보고 잔을 흔들어서 향을 맡고, 입에 넣어 오물거리면서 맛을 본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이 방법은 와인을 감정하거나 아주 비싼 와인을 만났을 때 하는 일이다. 비싸지도 않은 평범한 와인인데도 색깔을 보고 냄새를 맡으면 와인을 접대한 사람의 입장에서 “내가 접대한 와인에 문제가 있나?”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와인 에티켓은 기본적인 상식에서, 상대에게 실례가 안 되는 범위 내에서 융통성을 발휘하면 된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와인 한 병을 손에 들었을 때 이것이 어느 지방에서 만들어졌으며,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는지 가려낼 수 있는 분별력이며, 그 와인에 얽힌 배경에 대해 재밌는 얘기를 풀어갈 수 있는 실력이 진정한 매너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 김치의 종류가 지방별로 여럿 있듯이 와인도 세계 여러 나라 각 지방에서 수천 가지가 생산되고 있다. 이렇듯 많은 와인 중에서 한 병을 손에 들고 이것이 어떤 맛이며, 어떤 지역에서 만들어졌는지 알기란 쉽지 않기 때문에 공부가 필요하다. 공부를 하다보면 세계 각국의 역사와 지리, 문화도 익히게 된다.
프랑스에서 몇 년간 근무한 현역군인 중 한 분이 미국에 갔을 때의 얘기다. 구매자 입장에서 미국인을 상대하는데도 그 미국인들의 태도는 건방지기 짝이 없었다. 우연히 상담하는 장소 가까이에 프랑스 식당이 있어서 그 사람들을 프랑스 식당으로 초대했다. 그리곤 불어로 와인과 음식을 주문하고 가져온 와인에 대해 설명해주니, 그때부터 태도가 확 달라지면서 상담이 쉽게 풀렸다고 한다. 유럽인에겐 와인이 대체로 생활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지만 미국인에겐 와인에 대한 동경심, 바꿔 말하면 유럽문화에 대한 열등감을 갖고 있기 때문에 미국인을 기죽이는데 와인만큼 좋은 것이 없다는 얘기다. 와인은 서구 상류사회의 고급 지식이며 품위 있는 사교 모임에 꼭 등장하는 필수품이기 때문에, 와인 지식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국제사회에서 가장 좋은 사교수단이 될 수 있다.
국민소득이 올라가고 여가생활로 동호회 등 취미생활이나 사교적인 모임이 많아지면서 사교의 술로 서서히 고개를 내미는 것이 와인이다. 이 와인이 뒤늦게 우리에게 다가온 이유는, 와인은 그 무대가 갖춰져야 자리를 잡기 때문이다. 즉, 사람과 사람이 모이고 얘기해가면서 건전하고 여유 있는 생활이 조성됐고, 외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그들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분위기 역시 조성됐기 때문이다. 이제는 와인도 영어를 배우듯이 알아야 한다. 영어가 국제무대에서 필수적인 도구임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와인도 마찬가지다. 어떤 모임이든 항상 와인이 나오기 때문에 이 와인을 매개로 얘기를 풀어나갈 수 있는 소양 정도는 갖춰야 한다.
이제는 친한 사람끼리의 단란한 모임이나 품위 있는 사교 모임에서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고 대화의 물꼬를 트는 와인을 한두 잔 가볍게 즐기는 습관이 형성될 것이며, 그렇게 돼야 우리의 생활도 여유를 갖고 풍부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