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술

문인들의 술

문인들의 술

 


옛 성인(聖人)이나 문인(文人)들은 술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진로(眞露)가 1988년 2월 펴낸 〈술의 세계〉(비매품)에 실린 글을 보면 과거 문인들이 얼마나 술을 사랑하고 즐겨 마셨는지를 짐작케 한다. 요즘 사람들에게 귀감이 될 만한 글들을 추려서 몇 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국선생전(麴先生傳)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서

 

이규보(李圭報)

 

국성(麴聖·맑은 술)의 자(字)는 중지(中之·곤드레)이고, 주천(酒泉) 고을 사람이다. 어려서 서막(徐邈)에게 사랑을 받아, 막(邈)이 이름과 자를 지어주었다. 먼 조상은 본시 온(溫)땅 사람으로 항상 힘써 농사지어 자급(自給)하더니, 정(鄭)나라가 주(周)나라를 칠 때에 잡아 데려왔으므로 그 자손이 혹 정나라에 널려 있기도 하다.

증조(曾祖)는 역사에 그 이름을 잃었고, 조부 모(牟)가 주천(酒泉)으로 이사하여 거기서 눌러 살아 드디어 주천 고을 사람이 되었다. 아비 차(?·흰 술)에 이르러 비로소 벼슬하여 평원독우(平原督郵)가 되고, 사농경(司農卿) 곡(穀)씨의 딸과 결혼하여 성(聖)을 낳았다.

성이 어려서부터 이미 깊숙한 국량(局量)이 있어, 손님이 아비를 보러 왔다가 눈여겨보고 사랑스러워서 말하기를 “이 애의 마음과 그릇이 출렁출렁 넘실넘실 만경(萬頃)의 물결과 같아 맑혀도 맑지 않고, 뒤흔들어도 흐리지 않으니 그대와 더불어 이야기함이 성(聖)과 즐겨함만 못하이” 하였다.

자라나자 중산(中山) 유영(劉伶)과 심양(?陽) 도잠(陶潛)과 더불어 벗이 되었다. 두 사람이 일찍이 말하기를 “하루만 이 친구를 보지 못하면 비루함과 인색함이 싹돋는다” 하며 서로 만날 때마다 며칠이 가도 기쁨을 잊고 문득 마음에 취(醉)하고야 돌아왔다. 고을에서 조구연(槽丘椽)을 시켰으나 미처 나아가지 못하였고, 또 나라에서 청주종사(淸州從事)로 불러 공경(公卿)이 번갈아가며 천거하니, 위에서 명하여 조서(詔書)를 공거(公車)에서 기다리라 하였다. 이윽고 불러 보시고 목송(目送)하며 말하기를 “저 군이 주천(酒泉)의 국생(麴生)인가, 짐(朕)이 향기로운 이름을 들은 지 오래였노라” 하였다.

이보다 앞서 태사(太史)가 아뢰기를 주기성(酒旗星)이 크게 빛을 낸다 하더니 얼마 안 되어 성(聖)이 이른지라, 임금이 또한 이로써 더욱 기특히 여기였다. 곧 주객낭중(主客郎中) 벼슬을 시키고, 이윽고 국자제주(國子祭酒)로 올리어 예의사(禮儀使)를 겸하니 무릇 조회(朝會)의 잔치와 종조(宗祖)의 제사·천식(薦食)·진작(進酌)의 예에 임금의 뜻에 맞지 않음이 없는지라, 위에서 기국이 듬직하다 하여 올려서 후설(喉舌)의 직에 두고, 우예(優禮)로 대접하여 매양 들어와 뵐 적에 교자(轎子)를 탄 채로 전(殿)에 오르라 명하며, 국선생(麴先生)이라 하고 이름을 부르지 않으며, 임금의 마음이 불쾌함이 있어도 성(聖)이 들어와 뵈면 임금은 비로소 크게 웃으니, 무릇 사랑받음이 모두 이와 같았다.

성질이 흐뭇하고 구수하여 날로 친근하며 임금과 더불어 조금도 거스림이 없으니, 이런 까닭으로 더욱 사랑을 받아 임금을 좇아 함부로 잔치에 노닐었다. 아들 혹(酷)과 폭과 역(?·쓴술)이 아비의 총애를 믿고 자못 방자하니 중서령(中書令) 모영(毛潁·붓)이 상소(上疏)하여 탄핵(彈劾)하기를, “행신(倖臣)이 총애를 독차지함은 천하가 병통으로 여기는 바이온데, 이제 국성(麴聖)이 말 되의 쓰임으로써 요행히 조정의 벼슬 등급에 올라 위(位)가 3품(品·술에 3품이 있다)에 열(列)하고, 깊은 도둑을 안에 끌어들이고 사람을 휘감아 상해(傷害)하기를 좋아하는 고로, 만(萬) 사삼이 외치고 소리 지르며 머리를 앓고 가슴이 아파하오니, 이는 나라의 병을 고치는 충신(忠信)이 아니요 실은 백성에게 독(毒)을 끼치는 적부(賊夫)로소이다.

성(聖)의 세 아들이 아비의 총애를 믿고 황행(橫行) 방자하여 사람들이 다 괴로워하오니, 청컨대 폐하께서 아울러 사형을 내리시와 뭇 사람들의 입을 막으시옵소서” 하니 아들 혹(酷) 등이 그 날로 독이 든(?) 술을 마시고 자살하였고, 성(聖)은 좌로 폐하여 서인(庶人)이 되고, 치이자(?夷子·가죽주머니)도 또한 일찍이 성(聖)과 친하였으므로 수레에서 떨어져 자살하였다.

처음 치이자가 골계(滑稽)로 임금의 사랑을 받아 국성(麴聖)과 서로 친한 벗이 되어 매양 임금이 출입할 때마다 속거(屬車)에 몸을 의탁하더니, 치이자가 일찍이 곤하여 누워 있는지라, 성이 희롱하여 말하기를 “자네 배가 비록 크나 속은 텅 비었으니 무엇이 있는고” 하니 대답하기를 “자네들 따위 수백은 넉넉히 용납하네”라고 하였으니 서로 화합함이 이와 같다. 성이 이미 벼슬을 면하자 제(齊)고을과 격(?)고을 사이에 뭇 도둑이 떼 지어 일어났다. 위에서 명하여 토벌하고자 하나 적당한 인물이 없어 다시 성을 일으켜 원수(元帥)로 삼았으니, 성이 군사를 통솔함이 엄하여 사졸(士卒)과 더불어 감고(甘苦)를 같이하여 수성(愁城)에 물을 대어 한 번 싸움에 그를 함락시키고, 장락판(長樂版)을 쌓고 돌아오니 임금이 공(功)으로 상동후(湘東候)를 봉하였다.

2년 뒤에 상소하여 물러가기를 빌어 아뢰기를 “신이 본시 독들창의 아들로 어려서 빈천하여 남에게 이리 저리 팔려 다니다가 우연히 성주(聖主)를 만나 허심(虛心)으로 저를 우납(優納)해 주시와, 잠겨 빠진 것을 건져 주시고 강호(江湖)와 같이 용납해 주셨사온데 크게 만드심에 더함이 있고, 나라 체면에 윤기를 더함이 없었사오며, 앞서 삼가지 못한 탓으로 향리에 물러가 편안히 있을 때에 비록 엷은 이슬이 거진 다하였사오나 요행 남은 이슬방울이 같이 있어 감히 해와 달의 밝음을 기뻐하고, 다시 찌꺼기와 티가 덮인 것을 열어젖히었나이다. 또 그릇이 차면 엎어지는 것은 물(物)의 상리(常理)이온데 이제 신이 소갈(消渴)의 병을 만나 목숨이 뜬 거품보다 급박하오니, 바라옵건데 한번 유음(兪音)을 토하시와 물러가 여생을 보존하게 하옵소서” 하니 임금께서 우소를 내려 불윤(不允)하시고, 중사(中使)를 보내어 송계(松桂)·창포(菖蒲) 등 약물을 가지고 그 집에 가 병을 살피게 하였다.

성이 여러 번 표를 올려 굳이 사양하니, 위에서 부득이 허락하고 마침내 고향에 귀로하여 천수로 세상을 마쳤다.

아우 현(賢·탁주)은 벼슬이 2천 석(石)에 이르고, 아들 익(색주)·두(?·중앙주)·앙(?·막걸리)·람(果酒)은 도화즙(桃花汁)을 마셔 신선(神仙)을 배웠고, 족자(族子)·주·미(골마지)·엄(신술)은 다 호적이 평(萍)씨에 속하였다.

사신(史臣)이 말하기를 “국씨(麴氏)는 대대로 본시 농가(農家)요, 성(聖)이 흐뭇한 덕과 맑은 재주로 임금의 심복이 되어 나라 정사를 짐작(斟酌)하고, 임금의 마음을 기름지게 함에 있어 거의 태평(太平) 얼근한 공을 이루었으니 장하도다. 그 총애가 극에 미쳐서는 거의 나라의 기강을 어지럽혀 비록 화(禍)가 아들에게 미쳤으나 유감이 없다 하겠다.

그러니 만절(晩節)이 족함을 알고 스스로 물러나 능히 천수로 세상을 마쳤다. 역(易)에 이르기를 ‘기미를 보아 나간다’ 하였으니 성(聖)에 거의 가깝도다 하였다.

 

국순전(麴醇傳)

동문선(東文選)

임춘(林春)

 

국순(麴醇·누룩술)의 자(字)는 자후(子厚·흐뭇)이니, 그 조상은 농서(?西) 사람이다. 90대(代) 조(祖) 모(牟·보리)가 후직(后稷)을 도와 뭇 백성들을 먹여 공이 있었으니, 《시경》에 이른 바 “내게 밀 보리를 주다” 한 것이 그것이다.

모가 처음 숨어 살며 벼슬하지 않고 말하기를 “나는 반드시 밭을 갈아 먹으리라” 하며 전묘에서 살았다. 위에서 그 자손이 있단 말을 듣고 조서를 내려 안거(安車)로 부르며, 군(郡)·현(縣)에 명하여 곳마다 후히 예물을 보내라 하고, 하신(下臣)을 시켜 친히 그 집에 나아가 드디어 방아와 절구 사이에서 교분을 정하고 빛에 화하며 티끌과 같이 하게 되니, 훈훈하게 찌는 기운이 점점 스며들어서 온자(?藉)한 맛이 있으므로 기뻐서 말하기를 “나를 이루어 주는 자는 벗이라 하더니 과연 그 말이 옳구나” 하였다.

드디어 맑은 덕으로써 들리니 위에서 그 집에 정문(旌門)을 표하였다. 임금을 좇아 원구(圓丘)에 제사한 공으로 중산후(中山侯)에 봉하니, 식읍(食邑) 일만 호 식실봉(食實封) 오천호요, 성을 국씨(麴氏)라 하였다. 5세손(世孫)이 성왕(成王)을 도와 사직을 제 책임으로 삼아 태평 얼근한 성대(盛代)를 이루었고, 강왕(康王)이 위에 오르자 점차로 소대를 받아 금고(禁錮)에 처하여 고령(誥令)에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므로 후세에 나타난 자가 없고, 다 민간에 숨어 살게 되었다. 위(魏)나라 초기에 이르러 순(醇)의 아비 주(酎·소주)가 세상에 이름이 알려져서, 상서랑(尙書郞) 서막(徐邈)과 더불어 서로 친하여 그를 조정에 끌어들여 말할 때마다 주가 입에서 떠나지 않았는데, 마침 어떤 사람이 위에 아뢰기를 “막(邈)이 주(酎)와 함께 사사로이 사귀어 점점 난리의 계단(階段)을 양성합니다”하므로 위에서 노하여 막을 불러 힐문하니, 막이 머리를 조아리며 사좌하기를 “신이 주를 좇는 것은 그가 성인(聖人)의 덕이 있삽기에 수시로 그 덕을 마시었습니다” 하니 위에서 그를 책망하였고, 그 후에 진(晉) 선(禪)을 받게 되자 세상이 어지러운 줄을 알고 다시 벼슬할 뜻이 없어 유영(劉伶)·완적(阮籍)의 무리와 더불어 대수풀(竹林)에 놀며 그 일생을 마쳤다.

순(醇)의 기국과 도량이 크고 깊어, 출렁대고 넘실거림이 만경(萬頃)의 물결과 같아 맑혀도 맑지 않고 뒤흔들어도 흐리지 않으며, 자못 기운을 사람에게 더해준다.

일찍이 섭법사(葉法師)에게 나아가 온종일 담론하였는데, 일좌(一座)가 모두 절도(絶倒)하게 되고 드디어 유명하게 되어 호를 국처사(麴處士)라 하였는데, 공경(公卿)·대부(大夫)·신선방사(方士)들로부터 머슴꾼·목동·오랑캐·외국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그 향기로운 이름을 맛보는 자는 모두 그를 흠모하며, 성한 모임이 있을 때마다 순(醇)이 오지 아니하면 모두 다 추연(?然)하여 말하기를 “국처사가 없으면 즐겁지 않다” 하니 그가 시속에 애중(愛重)됨이 이와 같았다.

… 대개 군신의 회의에는 반드시 순을 시켜 짐작(斟酌)하게 하나 그 진퇴와 수작(酬酌)이 조용히 뜻에 맞는지라, 위에서 깊이 받아들이고 이르기를 “경이야말로 이른바 곧음 그것이고, 오직 맑구나, 내 마음을 열어주고 내 마음을 질펀하게 하는 자로다” 하였다.

순이 권세를 얻고 일을 맡게 되자 어진 이와 사귀고 손님을 접함이며, 늙은이를 보양하여 술·고기를 줌이며, 귀신에게 고사하고 종묘에 제사함을 모두 순이 주장하였다.

위에서 일찍 잔치할 때도 오직 그와 궁인만이 모실 수 있었고, 아무리 근신(近臣)이라도 참예하지 못했다. 이로부터 위에서 곤드레만드레 취하여 정사를 폐하고, 순은 이에 제 입을 재갈 물려 말을 하지 못하므로 예법의 선비들은 그를 미워함이 원수 같았으나, 위에서 매양 그를 보호하였다. 순은 또 돈을 거둬들여 재산 모으기를 좋아하니, 시론(時論)이 그를 더럽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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