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에겐 무서운 필록세라菌, 위스키에겐 고마운 존재
세계 각국의 술, 그 이면의 역사
테킬라, 1873년 멕시코 할리스코에 鐵道 깔리며 美에 수출
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 특수로 미국 맥주업계 폭풍 성장
1689년 英서 와인·브랜디를 대신해 진이 고개 들다
진(Gin)은 네덜란드에 주둔했던 영국군에 의해 영국 본토로 들어오게 됐다. 이 술이 사랑받게 된 건 1689년 네덜란드 총독 출신의 윌리엄 3세가 영국의 왕이 되면서부터다. 그는 프랑스의 와인과 브랜디의 주세(酒稅)를 높게 책정해, 가격경쟁력을 갖춘 네덜란드 진의 영국 내 보급을 장려했다. 스카치위스키가 유행하기 전의 당시 영국에선 맥주를 증류한 무덤덤한 알코올이 주류(主流)였는데, 주니퍼베리의 산뜻한 향은 굉장한 효과를 나타냈다. 값이 싸고 기분 좋게 취하는 이 술에 대해 영국 노동자들도 “거지도 진을 마시고 취하면 왕이 된 기분”이라며 즐겼다. 이후 18세기 영국은 진의 고향인 네덜란드의 생산량을 능가했고, 그 후 미국으로 건너가 칵테일 베이스로 사용되면서 전 세계로 퍼졌다. 진 브랜드의 대표주자는 영국 런던에서 생산하는 유일한 런던드라이진 ‘비피터(Beefeater)’다. 현재 마티니, 진토닉, 롱 아일랜드 아이스티 등의 칵테일 베이스로 쓰이고 있다. 최근에는 콜라나 크렌베리주스 등의 음료와 믹스해서 즐기는 방법이 유행하고 있다.
1968년 멕시코올림픽 계기로 테킬라 세상에 알려져
16세기경 멕시코 원주민들의 토속주인 ‘뿔케(Pulque)’에 스페인에서 도입한 증류기술을 적용해 현재의 테킬라(Tequila)가 탄생했다. 1873년 테킬라의 성지인 멕시코 할리스코(Jalisco) 지역에 철도 시스템이 들어와 미국으로 수출하기 시작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즐기게 됐고, 이후 1968년 멕시코올림픽을 계기로 전 세계에 알려졌다. 대표 브랜드로는 ‘호세 쿠엘보’, ‘사우자’ 등이 있다. 호세 쿠엘보는 1758년 설립자인 돈 호세 안토니오 디 쿠엘보(Don Jose Antonio de Cuervo)가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4세로부터 할리스코에 있는 토지를 하사받으면서 본격적인 생산을 시작했다. 이곳은 테킬라의 주원료인 블루 아가베(blue agave)를 키우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다. 호세 쿠엘보는 특히 상업적으로 테킬라를 생산할 수 있는 최초의 허가권을 인정받았다.
1864년 全 유럽에 필록세라菌 확산…위스키에 열광
1860년 이전만 해도 프랑스의 코냑?브랜디가 잉글랜드 상류사회의 사교술로 쓰였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여행이 잦았던 상류 인사들은 스카치위스키를 점점 선호하게 됐다. 이후 1864년 미국에서 수입한 묘목에 붙어 들어온 필록세라(phylloxera)균은 프랑스를 비롯한 전 유럽의 포도나무를 황폐화시켰다. 그 여파로 와인?브랜디?포트?셰리의 공급이 위기를 맞게 됐고, 대체품을 찾던 와인 애호가들이 스카치위스키로 눈을 돌리면서 고급 입맛을 갖춘 새로운 고객층이 생기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스카치위스키 ‘시바스 리갈’은 스코틀랜드 에버딘의 시바스 형제가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로열 워런티(royal warranty)를 받은 1843년 이후 성장을 거듭했다. 시바스사(社)는 1909년 정식 브랜드로 시바스 리갈을 런칭했다. 당시 시바스 리갈은 미국 동부 부유층의 요구에 맞춘 고급 스카치위스키를 선보이며 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했고, 이를 계기로 전 세계적인 프리미엄위스키 브랜드가 됐다.
미국의 禁酒法으로 인해 칵테일, 전 세계로 퍼지다
칵테일의 역사는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실질적으로 미국을 시초로 해 계승?발전돼 왔다. 미국의 금주법(禁酒法)이 시행됐던 1920년, 미국의 바텐더 대다수가 실직한 후 유럽으로 건너가 칵테일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이 칵테일은 서서히 유럽에서 유행하기 시작했다. 같은 시기의 미국 본토 내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주스류(類)나 크림탄산수 등을 혼합한, 시각적으로 술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칵테일을 만들어 마시면서 널리 보급됐다. 훗날 금주법 해제가 도화선이 돼 칵테일은 범세계적인 전성기를 맞는다.
제2차 세계대전, 美 맥주시장의 巨大성장 시초 되다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심한 노동으로 인한 피로를 달래기 위해 맥주를 즐겼는데, 대부분 자가(自家) 양조 맥주를 마셨다. 이 자가 양조 문화는 19세기 이후부터 시카고, 밀워키, 세인트루이스, 필라델피아 등에 수천 개의 양조장이 생겨나면서 사라졌으며, 그 덕에 미국의 양조산업은 거대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1920년대의 금주령(禁酒令)으로 미국의 주류업계는 파산에 이른다. 1933년 금주령은 폐지됐지만 1930년대의 미국 맥주산업은 여전히 형편없었다. 그 이유는 30년대의 대공황 때문이었다. 거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뜻밖의 사건이 찾아왔는데, 바로 제2차 세계대전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전쟁은 미국의 맥주업계가 다시 소생하는 원동력이 됐다. 미국 정부가 징병된 젊은이들을 위해 영내(營內) 맥주 유통을 허용한 것이다. 군부대 내에서 맥주를 판매할 수 있게 되자 미국의 맥주회사들은 저마다 생산량의 15%를 군납용으로 별도 관리하게 됐고, 맥주는 졸지에 전쟁 특수를 타게 됐다. 결국 2차 대전 이후 미국의 맥주업계는 폭발적인 성장과 소비가 이어졌다. 특히 ‘버드와이저’는 저온 살균법과 냉각기술을 통해 유통기한을 110일까지 늘려 양조장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까지 판매망을 확보했다. 그 결과 미국을 대표하는 맥주 브랜드로 자리 잡았고, 현재 전 세계에서 초당 373병이 팔리는 맥주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