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술

술의 차고 빔, 그 속에서 天地의 永久한 작용을 다 관찰할 수 있어

 

술의 차고 빔, 그 속에서 天地의 永久한 작용을 다 관찰할 수 있어

물고기는 물과 싸우지 않고 주객은 술과 싸우지 않는다

 

 


대저 술의 법도는 그 엄하기가 궁중의 법도와도 같으니 그 속에는 모두 사람을 사랑하는 뜻이 있고 힘을 합한다는 뜻이 있다. 그런 까닭에 학인이 처음 술을 마시는 법을 배울 때 먼저 그 엄한 격을 몸에 익히도록 해야 하며 조용한 상태에서 술을 마셔야 한다. 대체로 말이 많고 생각이 번거로우면 술의 도리를 익히지 못하고 취기를 오래 견디지 못한다.

술이란 그것을 마셔서 몸에 그 기운이 퍼지는 것을 마치 사계절이 변화하는 것처럼 해야 한다. 처음부터 갑작스레 마셔서는 안 되고 이미 마신 술의 기운이 마음까지 와 닿을 때 다음 잔을 마시는 것이고 서서히 취해 가는 것이 좋다.

사계절의 운행은 쉬지 않고 점차 흘러가는 것이고 술의 취함도 이와 같이 흘러가는 것이다.

술자리는 그 흐름이 음악과 같아서 그 곡이 끊어지지 않고 바르게 흐르면 몸의 기운이 상하지 않고 흥을 높여서 술을 오래 마실 수 있게 된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술을 힘으로 마시는 자는 마침내 패하게 되고 곡을 잘 타는 사람은 그 힘이 장구(長久)하다고 했다. 그런 까닭에 군자는 술에 있어서 그 곡을 중히 여기고 곡화(曲化)가 이룩되지 않으면 그 술자리는 피한다.

술의 곡(曲)은 마음이 잠잠하고 몸이 조용하고 서둘지 않으면 서서히 일어난다. 일부러 지어대면 곡은 끊기게 되며 참고 기다리면 곡은 일어난다. 또 욕심을 참으면 곡은 일어나고 법도를 지키면 곡은 일어나고 자연스러우면 곡은 일어난다.

술자리에서는 술이 모든 것에 우선이므로 술에 마음을 향하고 다른 일은 지나치게 많아서는 안 된다. 술 마심을 위한 일이 아닌 것이 지나치게 많으면 곡은 끓기고 흥이 다하게 되면 몸이 상하게 된다.

술이란 이어서 마셔야 하는 것이고 오래 쉬면 오히려 곡이 끊겨 술을 마시기 힘들게 된다. 그런 까닭에 술자리에서는 말을 지나치게 많이 해서는 안 되고 노래나 춤도 너무 오래 해서는 안 된다. 술 마시는 일 외에 어떠한 일도 쉬지 않고 계속하면 술을 쉬게 하므로 그 간격을 지켜야 한다.

술이란 살아 있는 물건이므로 그 자신의 성품을 알지 못하면 그 곡을 잡지 못하고, 억지로 그 곡을 움직이려 하면 더욱 더 혼란하게 된다. 술의 곡을 타는 일은 연이 바람을 타듯 때에 따라 진퇴를 격정하고 흐름에 순행해야 하는 것이다.

취함에 있어서도 두려워서 나아가지 못하면 오히려 취기가 나를 잡는 것이고, 내가 오히려 취함에 들어간 즉 그 기운을 제압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술을 마심에 있어서도 용기가 필요한 것이고 위험을 싫어한 즉 큰 이익은 없다. 그러나 무조건 나아가기만 한즉 이 또한 어리석은 일로서 몸의 내부의 곡을 정밀히 파악해야 한다. 만일 작인이 취기의 흐름을 잘 살필 수 있으면 그 흐름을 제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옛 말에 고기가 물을 떠날 수 없음은 물, 그것이 부드럽기 때문이라고 했다. 취기의 흐름도 이와 같이 부드러운 것이므로 그것을 제압하는 데는 극히 부드러워야 한다.

 

물고기는 물과 싸우지 않는다. 군자가 술을 마시는 법은 물고기가 물에서 노는 것을 본뜬다면 가(可)할 것이다. 물고기는 물의 흐름에 따라야 할 때는 따르고 어떤 때는 힘차게 역행한다.

술이란 술이 하자는 대로 해서도 안 되고 그 반대로만 해서도 안 된다. 그러므로 천하에 술 마시는 일처럼 어려운 것은 드물다.

혹자는 말한다. 술이란 취하면 그것을 다스릴 수 없는 것이므로, 취하지 않도독 조심해야 한다. 이는 지극히 어리석은 말이다. 술이란 취하기 위해서 마시는 것이고 또한 술을 마시고 취하지 않으려고 제자리에서 버틴 즉 취기는 파도처럼 넘어오고 마침내 몸과 마음을 상한다. 이는 어리석은 물고기가 물의 흐름에 대항하여 마침내 자신의 命을 다함과도 같다.

그렇다면 술이란 어떻게 대하여만 하는 것일까? 도인이 말하기를 취기의 운행은 여인의 마음과도 같아서 그 진퇴를 알 수가 없다고 했다. 또 선인이 말하기를 취기의 운행은 미리 정해진 것이 없다. 작인의 마음먹기에 따라 그 공격이 오묘하다.

 

대저 취기의 운행은 노자의 유현(幽玄)과도 같다. 천지만물은 태어난즉 그 뜻이 있으나 유현은 뜻이 없다. 혼돈하고 황홀하다. 취기의 운행은 그 정해진 방향이 없다. 아직 결정되지 않은 상태 이것은 노자의 천하모(天下母)와 같다. 이런 까닭에 군자가 주도를 귀히 여기는 것이다.

성인도 주도에 능통할 수 없다. 미정(未定)과 혼돈(混沌), 이것은 성도(聖道)의 극의(極意)이다.

술 마시는 일이 한가하고 무사(無事)하여 아무것도 성취하는 일이 없건만 천자의 운행에 참가하는 것이다.

술에는 정지와 흐름이 있다. 정지할 때는 혼돈하고 흐를 때는 만물의 정(情)과 合친다. 그 기운의 오고감이 자재(自在)하여 작인이 그 덕을 성취하기 어렵다.

군자가 학문하는 일은 어려움에 부딪쳐 싸우는 것이고 작인이 닦는 도리도 어려움에 부딪쳐 싸우는 것이다. 대체로 큰 이익이란 큰 어려움 속에 있는 것이다.

술 마시는 일의 어려움은 예로부터 수많은 도인이 얘기하였지만 어려움을 두려워하고 피하고자 하는 것은 주도뿐만 아니라 일생을 사는 뜻에도 크게 어긋나는 것이 된다. 어려움이란 그것을 쉽게 하는 것도 이로울 수 있으나 때로는 어려움에 부딪쳐 체득하여야 하는 것이다.

혹자는 말한다. 술을 마시기 전에 음식을 많이 먹어 두어야 한다고. 이 또한 어리석다. 술의 기운이 음식에 숨어 있은 즉 그 흐름을 더욱 예측하기 어렵다. 어려움이란 드러낼수록 쉬운 것이 된다. 또한 어려움이란 부딪쳐서 그것을 풀어야 하는 것이다.

천도(天道)는 빈곳으로 흐른다. 물도 빈곳으로 흘러 낮은 곳에서 안정(安定)한다. 술의 기운도

빈곳으로 가서 안정한다. 술을 마시기 전에 음식을 먹어서 술의 기운을 지연시키면 그 힘은 더욱 축적되고 술의 성품이 천의 성품이므로 차 있는 것을 파하고 비어 있는 곳을 이롭게 한다. 술을 마시기 전에 음식은 술을 거부하게 되고 취기의 흐름을 부자연스럽게 하므로 이는 크게 위험하다.

예로부터 군자가 첫잔에 안주를 들지 않는 것도 술의 성품을 빈곳에서 드러나게 하자는 뜻이 있는 것이다. 음식으로 이를 숨겨주는 것은 술의 독성를 도와주는 것이 되고(爆性) 반드시 몸을 상한다. 음식은 반드시 술에 뒤 따르는 것이다. 이는 천지의 운행을 본뜬 것으로 먼저 천의(天意)가 정해지고 다음에 그 기운이 오고 마지막에 형질이 차게 되는 것을 뜻한다.

비어 있는 것은 참으로 위대(偉大)하다. 이곳에서 모든 것이 계획된다. 술도 비어 있는 곳에서 큰 뜻이 시작된다. 따라진 술을 마심으로써 지난일의 결말이 되고 비어진 잔은 새로운 일의 시작이 된다. 음식을 먹지 않고 술자리에 임해서 먹는 음식은 몸에 크게 이롭게 마음도 즐겁다. 몸을 비우고 술과 가까이 하는 것은 술의 성품을 접하는 좋은 방법이 된다. 이는 또한 몸을 크게 활동하게 하여 백병을 치료한다.

만물의 이치는 차 있는 곳에서는 쉬고자 하고 비어 있는 곳에서는 크게 일어나려고 한다. 음식을 많이 먹고 술자리에 임하는 것을 쉬고자 하는 뜻이다. 술자리는 쉬는 곳이 아니고 빈 곳에서 크게 일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묻건대 술을 마시기 전에 색(色)을 접(接)하는 것은 어떤가? 답하되 이는 가(可)하다. 방사(房事)는 대체로 정기(精氣)를 소모하는 것이므로 몸을 비게 된다. 빈몸, 이것은 술을 마셔도 가(可)하다. 술을 마신 후에는 술의 氣運(기운)을 지켜야 하므로 방사는 극히 해(害)롭다.

술을 마시고 음식을 먹은 것은 몸을 보하는 것이므로 이는 가하다. 비고 차는 도리(道理)에 능통(能通)하면 주도에도 능통할 수 있다.

 

대저 만물의 유전(流轉)은 빈곳은 채워지고, 찬 곳은 흩어진다. 사람의 마음도 이와 같아서 빈 마음은 채우고자 하고 채워진 마음은 변화를 일으킨다.

술을 마심에 있어서도 빈곳은 채우고. 찬 잔은 마셔서 그것을 비운다. 빈 잔에는 훌륭한 술을 채우면 좋은 것이다. 인간의 빈 마음에는 무엇을 채울 것인가? 만물의 빈 곳에는 무엇이 채워 질 것인가?

작인(酌人)이 술을 마시면 하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만물은 그 기(氣)와 형(形)에 따라 작용(作用)을 갖고 사람은 마음에 채워진 념(念)에 따라 그 정(情)이 정해진다. 그릇이 크면 많이 담겨지고, 그 담겨진 것에 따라 정은 무수히 생길 수있다.

그러나 큰 그릇은 얼마나 큰 그릇인가? 아무리 큰 그릇도 그릇인 이상, 한계가 있다. 그릇이 없는 것, 이것은 실로 큰 것이다. 세상은 하나의 큰 그릇이다. 이 속에서 비워지고, 채워지고, 만물의 작용이 일어나고 천지화육(天地化育)은 성취되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속도 크기를 정하지 않는다면, 천지처럼 넓고 걸림이 없을 것이다. 마음속의 어떤 정도 다 일으키되 선악(善惡)을 가려 행동하고 또한 어떤 념정(念情)에도 주착(住着)하지 않는다면, 이는 곧 성인(聖人)의 마음인 것이다.

군자가 술을 마심에 있어 마음속이 細細한 情을 다 일으키고, 다시 그것을 흘러 보내고, 또 다른 마음을 일으키기를 계속한다.

술잔의 차고 빔, 그 속에서 천지의 영구(永久)한 작용(作用)을 다 관찰할 수 있다.

<마지막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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