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술

부안 청호저수지와 진안 용담댐을 보며 도연명을 생각하다

부안 청호저수지와 진안 용담댐을 보며 도연명을 생각하다

 

박정근(문학박사, 칼럼니스트, 소설가, 드라마작가)

 

박정근 교수

세월의 시계가 빠르게 흘러 기나긴 겨울의 터널을 빠져나왔다. 드디어 기다리던 봄이 성큼 다가왔다. 무주와 진안에 살고 있는 친구들이 놀러오라는 전화를 여러 번 받은 터라 하루라도 산중의 적막한 분위기에 빠져들고 싶었다. 게다가 겨울 동안 겹겹이 쌓인 마음의 먼지를 털어내고 싶었다. 주말을 이용해서 부안과 무주, 진안에 다녀오자고 아내에게 제안했다. 그녀는 쾌히 동의하고 다음날 아침 간단히 여행준비를 하고 자동차로 출발하였다.

 

우리나라 산야는 가도 가도 산이 산을 꼬리를 물고 이어져 있어 동양화의 운치가 풍겨 나왔다. 지난 추석이나 설에도 부안 선산에 다녀오지 못해 껄적지근한 기분이었는데 이번 여행에 모두 돌아보자는 계산이었다. 부안 선산은 하서면에 있는 청호저수지 앞에 있어 전망이 탁 트이는 위치였다. 서울이라는 회색도시 속에 갇혀있던 몸과 마음을 시골의 맑은 공기 속에 푹 담갔다가 건져내면 한층 맑아질 것 같았다. 서해안 고속도로를 벗어나서 부안행 자동차 전용도로를 접어들자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얼마 안 걸려 선산에 도착해서 지난여름 저수지 수면 위로 가득했던 연꽃 줄기와 꽃들이 이미지로 떠올랐다. 발그레한 연꽃 위로 안개가 피어오르고 그 사이로 아름다운 아가씨들이 미소를 짓고 있는 듯 했다.

 

선산을 둘러본 후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는 무주와 진안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오늘의 마지막 행선지는 진안으로 정하는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했다. 두어 번 용담댐을 둘러보았지만 꼼꼼하게 감상하지 못했던 것이 못내 아쉬웠던 것이다. 무주에 사는 친구를 대동하고 진안을 향했다.

용담댐은 진안의 여러 산들을 한 덩어리의 거대한 호수로 만들어낸 형국이었다. 이것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주민들이 고향을 포기하고 떠나야 했으리라. 이전에 그들도 계절마다 아름다운 산천이 만들어내는 만화경 같은 경치에 넋을 놓고 쳐다보았으리라. 이제는 마을 사람들 대신 수많은 강태공들이 그들을 대신해서 세월을 낚고 있었다. 아마도 그들 옆에는 마시다 남은 소주가 한 병 놓여있으리라. 낚시를 하다 고기가 잡히지 않으면 무심한 물결의 파문을 바라보며 소주를 한 잔 들이키면 무료함이 덜어질 것이다.

용담댐이 만들어질 때 그곳에서 농사를 짓던 농부들은 정든 고향을 등지고 도회로 떠났다. 피땀으로 경작했던 농토를 떠나 타향으로 떠나면서 농부들은 만감이 교차했으리라. 어떤 이들은 고생스럽기만 했던 농사를 그만 둘 수 있어 속이 시원했을 수 있다. 평생을 땡볕에 고생을 했어도 겨우 입에 풀칠만 하고 살아왔던 시간들이 고통스럽게 다가왔다면 말이다. 살아남기 위해서 힘든 환경에 몸을 맡기는 농부의 삶이 달갑게 느끼지 못했지 않았겠는가.

 

어떤 이들은 농토와의 서운한 이별에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용담댐의 물속에 낚시를 담그고 있는 강태공들은 물속에 담겨있는 농부들의 눈물과 한숨을 느낄 수 있어야 진정한 낚시꾼이 될 수 있다고 본다. 필자는 강태공들의 한가로움이 결코 무료함을 이기기 위한 시간 보내기 게임이 아니라는 것을 비로소 느낀다. 어쩌면 낚싯줄은 수면 아래에 녹아있는 과거의 삶과 수면 위의 강태공들의 현재의 삶을 연결시켜주는 연결고리가 될 수 있다고 느껴졌다. 그가 낚는 물고기들은 그저 매운탕을 위한 재료가 아니라 농부들의 영과 넋이 잠재해있는 재현물이 아닐까. 강태공들의 시선은 그저 낚시를 던지는 허공에 머물지 않고 보이지 않는 수면 아래를 손끝으로 느끼는 듯 하나의 낚싯줄로 연결될 과거를 더듬는 것이다.

용담댐의 물에 담그고 있는 강태공들은 지금 계절과 시간의 한계를 넘어서 물고기와 게임을 하고 있다. 아마도 그들은 물고기를 잡느냐 마느냐다 아닌 시공간의 한계를 넘을 수 있느냐의 게임을 하고 있으리라. 그들은 주야의 변화, 날씨의 변화, 계절의 변화를 현상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변화를 넘어선 본질을 바라보고자 하는 득도의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승리는 손에 쥘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허무를 인식하는 순간에 올 수 있다. 그리고 득도의 순간에 도연명처럼 한 잔의 술을 마실 것이다. 도연명은 〈노래〉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寒暑有代謝, 추위와 더위는 오고가며 바뀌나니

人道每如玆. 인생의 도리도 언제나 이와 같고

達人解其會, 통달한 자는 그런 이치를 이해하므로

逝將不復疑. 결코 의심하지 않으리라

忽與一樽酒, 문득 한 단지 술을 가져와

日夕歡相持. 저녁마다 즐겁게 마실 뿐이다

진안 친구의 집에 도착해서 부안시장에 사온 회감과 매운탕 재료를 꺼내 술안주를 준비하니 그는 진안 홍삼 막걸리를 꺼내온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은 앞으로 멋진 문화운동을 벌일 수 있는 아이디어를 내놓으며 술을 기울이니 초봄의 밤은 깊어만 갔다. 강태공의 삶이 집안으로 옮겨온 듯 술잔을 우정을 가득 담아 따르는 기쁨보다 더 큰 것이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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