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알의 밀알이 죽지 않으면
한알의 밀알은 죽어 맥주가 됩니다
하늘은 동업자
술도 그러합니다. 물론 근현대에 들어 주정과 맥아 등을 수입하여 만든 소주와 맥주가 우리나라 술 소비량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지만 우리 농업이 있는 술들에게 하늘은 동업자일 뿐입니다.
쌀로 술을 만드는 전통이 강한 우리나라에서 쌀은 가장 으뜸의 농작물이었습니다. 거기다가 가을이면 쌀을 거둔 들판에 다시 밀을 심어 누룩을 딛지요. 쌀을 재배하지 못하는 제주도는 조를 심었고 충북 북부와 강원도에서는 옥수수 등을 엿기름으로 발효시킨 엿술을 만들었습니다. 쌀이든 조든 보리든 이렇게 농사지은 곡식으로 술을 빚었고 그 술로 제사를 지내고 손님을 접대했지요. 그러한 문화를 가양주문화라고 합니다.
2014년 10월말부터 이 글을 쓰는 11월 2일까지 계속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맥류는 파종시기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계속 비가 내리면 제 때 파종을 못하여 냉해의 피해를 입습니다. 이는 수확량의 급감으로 연결되지요.
보통 이 곳 전북 지역은 10월말부터 11월초까지 맥류를 파종합니다. 너무 일찍 파종하면 웃자라서 냉해를 입으며 반대로 너무 늦어도 유아기의 맥류가 추위를 견디지 못합니다.
올해는 동업자이신 하늘께서 조금 무심하신 것 같습니다. 이 비가 내일이나 모레 사이에 어서 끝나야 저 들에 보리를 심을 수 있겠죠. 물론 조금 늦고 비 온 후 배수와 추위 문제로 평상시보다 더 많은 보리씨앗을 파종해야 합니다.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발을 멈추고 돌아보면 어린 시절 제가 살던 전주시 삼천동 인근은 복숭아밭이 많았습니다. 보리를 수확하고 조금 있으면 복숭아를 따는 철이 왔습니다. 지금이야 종이박스에 복숭아를 흠집 안 나게 소포장까지 해서 넣지만 그때는 나무판자에 보릿대를 썰어서 충진재로 썼습니다. 개가 새끼를 낳으면 푹신하게 보릿대를 깔아주기도 했지요.
봄부터 복사꽃이 피었다 지고 날이 따스해지면 베기 직전 보리밭에 들어가 말 짓을 했지요. 쌈치기도 하고 보리서리 해다가 구워먹기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재배했던 보리는 쌀보리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가운데 검은 띠가 있고 알곡이 쌀보다 훨씬 큰 쌀보리를 도시락에 섞었는지 검사하는 시절이었지요. 그 검은 띠가 소화를 촉진한다는 선생님의 가르침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쌀보리의 집안은 크게 보리와 밀, 호밀, 귀리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이 가운데 보리는 쌀보리와 겉보리로 나눌 수 있지요. 쌀보리는 알맹이와 껍질이 잘 벗겨지는 특성이 있고 겉보리는 접착물질이 있어 껍질과 알맹이가 분리가 되지 않습니다. 겉보리 가운데 두줄보리는 맥주용으로 재배됩니다. 여섯줄 겉보리는 알맹이가 조금 작습니다. 이 녀석들은 엿기름을 만들거나 음료용으로 가공되지요.
맥주용 보리는 알맹이가 크고 쌀보리보다는 내한성이 강하지만 여섯줄 겉보리보다는 내한성이 떨어집니다.
밀 또한 우리 조상들이 많이 재배하던 농작물이었습니다.
약 15년 전 대학을 막 졸업하고 저는 전국을 떠돌며 노가다를 하고 다녔습니다. 동탄에 있는 도로공사의 건물을 신축하는 공사장에서 저와 같은 방을 쓰던 내몽고 조선족 아저씨가 있었습니다. 당시 막노동판은 저처럼 젊은 20대가 어쩌다 가뭄에 콩 나듯 있었고 전부가 40대를 훌쩍 넘긴 분들뿐이었습니다. 그 조선족 아저씨도 40대가 훌쩍 넘어서 외동딸을 중국에 남기고 온 분이었습니다. 그분이 한국에서 잘 이해가 안가는 말이 두 개가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라는 것입니다. 내몽고에서는 개가 풀 뜯어 먹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밀가루 음식 먹으면 소화가 안 된다는 말이랍니다. 오히려 내몽고 지역에서는 쌀가루 음식 먹으면 소화가 안 된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쌀이 떨어진 보릿고개에는 맥류인 보리와 밀이 주식이었을 것입니다. 우리 어머니 말씀대로 밀가루로 머고 없어서 못 먹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식량사정이 좀 좋아져서 쌀밥을 세끼 먹을 수 있게 됨에 따라 밀가루음식 먹으면 소화가 안 된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최근 전주 한옥마을의 최대 관광상품은 초코파이입니다. 모 제과에서는 국산밀인 고소를 사용하여 초코파이를 만들더군요. 물론 제가 하는 맥주 양조장 ‘시’에서도 고소를 사용하여 밀맥주를 만들고 있습니다. 이렇게 만든 밀맥주로 전라북도 농업기술원에서 주최한 제 4회 농식품가공콘테스트에서 우수상을 수상했습니다.
밀은 쌀보리처럼 껍질이 없고 단백질 성분이 많아서 맥주를 탁하게 만들며 여과 과정에서 무척 많은 어려움이 따릅니다. 그러나 풍부한 거품과 부드러움으로 여성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 맥주이기도 하지요. 바이젠이나 바이스 등으로 불리기도 하며 제일 잘 알려진 호가든이 바로 밀맥주입니다.
한알의 밀알이 죽지 않으면
맥류는 수확 후 잠자리에 듭니다. 맥주를 한다는 사람이 그 사실을 모르고 올 여름 갓 수확한 보리를 발아시키려고 했습니다. 물론 갓 수확한 맥류는 싹이 나지 않습니다. 여름의 염천 속에서 맥류는 잠을 잡니다. 그렇게 잠자리를 잘 봐주어야 맥류의 발아율이 높아져 좋은 엿기름과 식혜 그리고 맥주를 만들 수 있습니다.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기고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깁니다. 그리고 한알의 밀알은 죽어 맥주가 됩니다. 맥주의 부드러운 거품과 풍부한 맛은 하늘과 농부가 동업한 아름다운 선물입니다.
저 한알의 밀알을 위하여 오늘밤은 우리 농산물로 만든 맥주 혹은 막걸리로 한잔 하시는 것은 어떨는지요?
이 글을 쓴 유상우는 전주에서 우리 농산물을 활용해 맥주를 만들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술문화공간 ‘술로시티’를 만들어서 우리 술과 문화를 교육하고 나누는 일에 매진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