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빛 라거맥주의 원조, 필스너 우르켈을 찾아가다
허시명 교장(막걸리학교)의 술 기행
필스너 우르켈 제조장은 경이로웠다.
필스너 우르켈 제조장을 찾아갔을 때가 볕 좋은 가을 오후 5시 무렵이었다. 충분한 시간을 갖고 찾아가고 싶었지만, 관광객들에게 그렇게 화려한 공간은 아니었는지 체코 현지 여행사는 늦은 오후에 견학 시간을 잡아놓았다. 보헤미아 지방의 아름다운 온천 휴양지로 쇼팽, 괴테, 베토벤이 요양차 머문 적이 있다는 카를로비 바리를 거치지 않았어야 했는데, 여행의 욕심 때문에 그렇게 하질 못했다. 카를로비 바리의 남쪽으로 자동차로 1시간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체코 플젠(체코어로 플젠 Plzeň, 독일어로 필젠 pilsen)은 중공업이 발달한 체코에서 다섯 번째로 큰 도시다. 양조장 근처에 왔을 때 긴 공장 담장이 눈에 띄었는데, 인상적인 것은 양조장 입구였다. 입구와 출구가 분리되어 있긴 하지만, 독립문처럼 생긴 성문이 양조장 정문이었다. 필스너 우르켈의 50주년을 맞이하여 1892년에 지은 것으로 이제는 필스너 우르켈의 상징물이 되었다.
잠시 기다리는 시간이 아까워서, 기념품 판매장을 찾아가 유니폼이며 모자며 시기별로 달리 제작한 맥주잔을 살펴보고, 기념품장 지하에 있는 맥주바에서 맥주까지 맛보았다. 필스너는 황금색 라거 맥주의 효시로 그 탄생의 순간이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1842년 11월 11일 보헤미아 서쪽에 자리잡은 맥주집에 이 맥주가 처음 배달되었다. 이 맥주는 뮌헨 지방에서 양조기술자의 아들로 태어나, 성격은 괴팍하고 막돼먹었지만 맥주 맛의 개선에 심혈을 기울였던 요세프 그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지금의 필스너 우르켈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플젠의 필스너는 독일로 돌아가 필스라는 이름으로 재구성되었다. 필스너는 지금 한국에서 마시고 있는 라거 맥주의 원조라는 점에서도 우리 또한 그 영향권 아래 있다.
오후 6시가 다 되어서야 견학을 하기 위해 양조장 마당을 지나 철망 출입문을 열고 높은 굴뚝이 있는 건물로 들어갔다. 견학장을 오르내리는 엘리베이터는 단체 손님을 받기 알맞게 전세 버스처럼 넓었다. 견학장에 들어서니 보리의 이미지가 물결치고, 플젠의 부드러운 물을 설명하는 지층 단면도가 있고, 홉이 나고 자라고 꽃을 피우는 동영상이 나왔다. 천문대를 견학했을 때처럼 어둠 속에서 맥주와 내가 소통할 수 있게 구성되어 있었다. 맥주 발효조가 있는 방을 지나, 구리로 만든 당화솥이 있는 방으로 안내되었다.
필스너 우르켈에서 감동한 것은 옛 양조 건물로 들어서고 나서였다. 오래된 양조동은 지하로 완만하게 이어진 통로를 따라 들어서는데, 마치 탄광의 갱도를 들어서는 느낌이었다. 천정은 낮고 통로는 좁았지만, 벽과 천정이 흰색으로 처리되어 있어서 상쾌한 느낌을 주었다. 통로 양편으로 발효실이 있는데, 그중 한곳으로 들어서니 큰 나무 발효통이 있고 시음대 위에 시음잔이 놓여 있고, 중년 여성이 맥주를 직접 따라 내주었다. 흰 거품에 황금빛 맥주의 맛이란, 서늘한 기운 때문인지 향기로운 고드름을 먹는 것처럼 인상적이었다. 한잔 더, 한잔 더 그 맛을 기억하기 위해서 시음을 했다. 그 맛은 부드러우면서도 날카로웠고, 경쾌하면서도 가볍지 않고, 향
그 맛에 감동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21세기에서 여행온 우리에게 19세기 필스너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서늘한 지하 통로 안의 거대한 오크통 안에서 맥주가 거품 가득 발효되고 있는데 그게 옛날 모습을 방불케했다. 수고로운 옛 모습을 지켜온 것도 대단하지만, 이를 관광객들에게 보여주는 것도 대단했다. 우르켈은 원조라는 뜻으로, 필스너 스타일을 따라한 양조장들이 많이 생겨나면서 차별화를 위해 필스너에 붙인 수식어다. 그런데 그냥 문서로만 남은 원조가 아니라, 원조였던 시절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원조의 권위를 뽐내고 있었다. 맥주를 통해서 지나온 세월을 보여주고, 보헤미안의 자부심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필스너 우르켈 양조장은 매력적이었다.
우리에게는 지난 삶을 보여줄 수 있는 양조장이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할 양조장을 찾기란 쉽지 않다. 우리 문화는 술로 혼백을 불러와 엄숙한 제사를 지내지만, 술이 우리를 욕된 수렁에 빠지게 한다하여 술을 원망하기 바쁘다. 술을 상품으로서, 기호식품으로서, 문화코드로서 평정심을 잃지 않고 바라볼 수 있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필스너 우르켈 견학장은 맥주의 지난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잘 구성해놓아 좋았는데, 좋았다는 말보다는 장엄하고 경이로웠다는 표현이 더 값하는 공간이었다. 알코올 4도의 맥주, 보리와 홉과 물이 들어간 그 단순한 맥주를 가지고, 체코 보헤미아인들은 인류 문명의 한 페이지가 되는 필스너를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