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철의 와인교실(12)
수도원과 와인
김준철 원장 (김준철와인스쿨)
와인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수도원의 와인 양조라고 할 수 있다. 중세시대 시들어가는 와인산업을 유지하고 발전시킨 수도원은 와인 뿐 아니라 과학과 신학, 농업까지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는데 큰 공을 세웠다고 볼 수 있다. 수도승들은 자급자족으로 수도원에서 사용하는 물품을 조달해야 했고, 성찬식에 꼭 필요한 와인은 특별한 노력의 산물이었다.
◇ 수도승의 활약
로마제국이 멸망으로 유럽에 뚜렷한 강자가 사라지면서, 북쪽에서 온 게르만 족이 설치고 있을 때, 이슬람 제국이 유럽의 남부지방을 몽땅 차지하게 된다. 그래도 유럽 남부의 이베리아 반도를 차지한 이슬람교도들은 포도를 좋아하고 와인을 간혹 즐기기도 해서 소아시아 포도 품종을 새로 소개하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포도밭이 감소되면서 와인거래도 주춤하기 시작한다. 로마를 대신하여 북유럽의 새로운 주인이 된 게르만 족의 와인에 대한 집착은 대단했다. 이들은 맥주를 대신하여 와인을 마시기 시작하였고, 이를 세련된 문화로 생각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교회의식에 필요한 와인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긴 동면에서 십자군 원정과 수도원의 활발한 움직임으로 와인산업이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십자군은 중동지방에서 포도나무를 들여와 오늘날 유럽포도의 주종을 이루게 하였고, 수도승들은 풍부한 노동력과 안정된 조직력을 바탕으로 포도를 재배하고, 와인을 만들기 시작했다.
당시 유럽에는 황무지가 많았고, 수도원은 세금이 면제되었기 때문에, 이들이 만든 와인은 교회의식에 필요한 수요를 충당하고, 판매수입원으로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관리방법을 도입하여 근대 와인제조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로마제국 붕괴 이후 와인 수요를 폭발적으로 늘린 것은 바로 교회였다. 교회는 대규모의 포도밭을 소유했으며, 와인생산과 소비의 중심이 되었다.
◇ 수도원은 두뇌 집단인 국립연구소
수도승은 포교보다는 자신의 도를 닦는 사람으로 볼 수 있다. 이들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기도하고 성경을 읽지만, 하루 종일 각자 맡은 일에 충실하게 종사하는 사람이다. 와인을 만드는 수도승이 있는가 하면, 치즈를 만드는 수도승도 있으며, 구두를 만드는 수도승도 있었다. 이렇게 전문적인 일을 하면서 자기 일에 대해서 연구하고 기록하여, 후배 수도승에게 물려주는 자세로 일을 하니까, 그 일은 세월을 거듭하면서 발전할 수밖에 없다.
당시 수도승은 현대로 보면 두뇌집단으로, 수도원은 국립연구소라고 할 수 있다. 국민 대다수가 글을 모르던 시절에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이다. 이들 중에는 글은 아는 정도가 아니고, 히브리어, 그리스어를 번역할 수 있는 실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많았다. 게다가 잔소리하는 마누라도 없고 부양할 가족도 없이 수도원이라는 울타리에 갇혀 있으니, 모든 정보를 흡수하여 천문학, 의학에 이르기까지 폭 넓은 지식을 쌓을 수 있었다. 당시에 글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정보력에는 차이는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카르투지오(Carthusians)’ 수도회는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의 ‘프리오라토(Priorato)’, ‘베네딕트(Benedictine)’ 수도회는 부르고뉴의 ‘제브레 샹베르탱’, 루아르의 ‘앙주’, 론의 ‘코르나스’, 샹파뉴의 ‘랭스(동페리뇽)’를, ‘프란치스코(Franciscan)’ 수도회는 멕시코와 캘리포니아 와인을 개척했고, ‘시토(Cistercian)’ 수도회는 부르고뉴의 ‘클로드 부조’, 독일 라인가우의 ‘하텐하임’, 옛 동독의 ‘자알레 운스트루트’, 오스트리아 니더외스트라이히의 ‘캄프탈(Kamptal)’ 등을 개척하였다.
◇ 프레스(Press)
수도승들이 가장 공들여 한 해야 할 일은 성경을 옮겨 적는 일이었다. 인쇄술이 없던 시절에는 성경을 써서 그 내용을 전파할 수밖에 없었다. 이 수고를 덜어준 사람이 금속활자와 인쇄술을 개발한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 1397-1468)’다.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지난 천 년 간 최고의 인물로 선발된 구텐베르크는 주형으로 제작한 금속활자를 나무틀에 하나씩 심어서 조판하는 방법을 고안했다. 기존의 목판인쇄는 나무에 글씨를 하나씩 새겨 넣어야 하지만, 금속활자는 금속 펀치를 사용하여 구리로 만든 막대기에 활자를 새겨 모형을 만든 다음에 여기에 금속을 녹여서 붓고, 식으면 모형을 들어내고 활자를 떼어내는 방법이었으니까 동일한 금속활자를 여러 개 만들 수 있었다. 게다가 목판인쇄는 두꺼운 유럽 종이에 찍어내는 데 상당한 압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수명이 짧았고, 글씨도 선명하지 않았다.
구텐베르크가 고안한 자유롭게 배치가 가능한 금속활자는 매우 신속하고 경제적인 방법이었다. 이렇게 만든 활판을 인쇄기에 놓고 압착해서 종이에 찍어냈다. 오늘날 ‘인쇄기’를 가리키는 ‘프레스(Press)’란 단어는 와인을 만들 때 포도를 으깨어 즙을 짜는 ‘포도 압착기(Press)’나 올리브유 압착기와 동일한 원리로 활자에 잉크를 묻혀 종이에 압착한다고 해서 그렇게 부른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인쇄술이 발달하면서 생긴 신문이나 잡지, 기자 그리고 언론계를 ‘프레스(The Press)’라고 부르게 된다. 이렇게 ‘프레스’는 와인에서 나온 말이다.
◇ 수녀원에서도 와인을
수녀원에서도 포도재배와 와인양조에 큰 공헌을 했다. ‘지공다스(Gigondas)’는 프로방스 생탕드레(Saint-André)의 베네딕트 수녀원에서 만든 것이고, 쥐라 지방의 ‘뱅 드 파이으(Vin de Paille)’와 ‘뱅 존(Vin Jaune)’은 샤토 샬롱(Château-Chalon)의 수녀들이 만들었다. 당시 가장 넓은 토지를 가지고 있었던 로렌 지방의 르미르몽(Remiremont) 수녀들은 알자스 지방에서 가장 좋은 포도원과 운송수단을 가지고 있었다. 작은 수도원에서는 수녀들이 직접 포도밭에서 일을 했지만, 큰 수녀원에서는 노동자를 고용하여 포도를 재배하고 와인을 담그기도 했다.
◇ 적자생존
글을 아는 수도승은 포도를 재배하고, 와인을 만들면서 자세한 기록을 남겨 후배에게 물려주고, 그 후배 수도승은 문제가 있을 때 선배 수도승의 기록을 찾아보고, 자신도 일하면서 기록을 몇 장 더 남겨 다음 수도승한테 물려주었을 것이다. 이렇게 기록을 남겨 계속 전달되면 노하우가 쌓여 지속적인 발전이 가능하다. 글을 모르는 사람들은 아버지에게 어깨너머 배우다 보면 말 그대로 ‘답습’이 되어 제자리걸음을 할 수박에 없으며, 아버지가 일찍 죽으면 그 기술은 대가 끊기에 된다. 그래서 이렇게 기록을 전하는 방식만이 살아남는다고 해서 “적는 자만이 살아남는다.”라는 말이 생긴 것이고, 이를 ‘적자생존’이라고 한다(?).
◇ 가장 좋은 와인과 여자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며, 와인 애호가인 철수가 무인도에 표류되었으나, 다행이 먹을 것은 많아서 잘 먹고 잘 지내고 있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나서 무료하고 적적하여 하느님께 기도를 하였습니다. “주여! 가장 좋은 와인과 여자를 보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음 날 철수 옆에는 ‘빈 산토’와 ‘테레사 수녀’가 있었다.
필자:▴김준철와인스쿨(원장)▴한국와인협회(회장)▴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프레즈노캠퍼스 와인양조학 수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