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돈의 酒馬看山(7)
취음선생 백거이, 북창삼우와 노닐다
대시인 백거이는 중당(中唐) 때 사람으로 자가 낙천(樂天)이고 취음선생(醉吟先生), 향산거사(香山居士)를 호(號)로 삼았다. 낙천(樂天)은 하늘의 이치를 따른다는 뜻이고, 거이(居易)’는 편히 산다는 것이니, 자(字)와 명(名)에 걸맞게 하늘의 이치를 따라 편하게 살아간 셈이다. 시선 이백(李白)이 죽은 지 10년, 시성두보(杜甫)가 죽은 지 2년 후에 태어났는데, 동 시대의 한유(韓愈)와 더불어 ‘이두한백(李杜韓白)’으로도 불린다.
어려서부터 문재가 뛰어났고, 800여수의 음주시를 남길 만큼 술과 함께한 삶을 기꺼이 노래했다. ‘술로써 온전함을 얻는다(得全於酒)’고 스스로 취음선생(醉吟先生)이라 부르며, 술과 시(詩), 거문고와 벗을 해 북창삼우(北窓三友)라는 고사를 낳기도 했다. “…거문고를 뜯다가 술을 마시고(琴罷輒擧酒) 술을 마시다 시를 읊네(酒罷輒吟詩). 세 친구가 번갈아 이끌어주니(三友遞相引) 돌고 돎이 끝이 없구나(循環無已時).”
또한 아침에도 홀로 취해 시를 읊고(朝亦獨醉歌) 저녁에도 술에 취하여 시를 읊을(暮亦獨醉歌) 정도로 삶과 술이 다르지 않았다. 젊어서 과거시험을 준비할 때 친구와 옷을 잡히고 술을 마셨고, 그의 묘시주(卯時酒), 묘음(卯飮)등의 시에는 이른 아침부터 술이 등장한다.
그는 관직에 있으면서도 곤궁했던 백성들 편에 서서 당시의 사회상을 비판하고, 조정의 부패를 폭로하는 풍유시를 많이 썼다. 정의를 바탕으로 현실 개혁에 힘쓰면서 백성의 삶의 질 향상과 사회 부조리를 바로 잡는데도 소홀히 하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시를 써도 임금과 신하, 백성, 사물, 사건을 위해 시를 지었지, 시 자체를 위해 시를 짓지 않았다.(爲君, 爲臣, 爲民, 爲物, 爲事而作, 不爲文而作也.)
그는 시를 어렵게 쓰지 않았고, 서민들과 소탈하게 지내면서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면 시를 다시 고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신분을 떠나 백거이의 시를 따라 불렀고, 그의 시를 베껴 돈과 술, 차 등으로 교환했으며 가기(歌妓)들은 장한가를 통창하는 것을 큰 자랑으로 여겼다고. 당 헌종이 “어린 동자도 장한가(長恨歌)를 읊을 수 있고, 호족의 아이들도 비파행(琵琶行)을 노래한다”고 했을 정도로 그 인기를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벼슬자리에서 물러난 뒤에는 낙양의 용문 향산사에 은거하여 참선에 열중하면서 향산거사라 자칭한다, 허무도 숙취도 없고, 술도 없는 참선에 취해 “첫째는 참선만 한 것이 없고 둘째는 술에 취함만 한 것이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취음선생다운 발상이다.
그는 이백이나 두보와 달리 관직에 오래 머물렀지만, 세월과 세상사에는 초탈함을 잃지 않았다. 그러면서 달팽이 뿔 위에서 무엇을 다투는가(蝸牛角上爭何事)라며 덧없는 삶 속에서 아옹다옹하는 인심을 흘겨보기도 한다.
취음선생 백거이는 백성을 향한 마음을 술에 담아 시로 뽑아내었다. 그가 치열하게 일구어 낸 삶의 성찰과 주어진 삶에 만족하면서 빈 배처럼 달관한 물의 노래는 그래서 지금도 이어져 오는 것이다.
글쓴이 김상돈 : 물과 불을 넘나들면서 명정(酩酊) 40년을 살았고, 언론계와 국회 당, 공기업 임원 등을 두루 거친 뒤 지금은 사단법인 4월회 사무총장과 전국자동차검사정비사업조합연합회 전무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