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돈의 酒馬看山(13)
술과 삼각황음(三閣荒淫)으로 사직은 무너지고…
세종(世宗)은 술을 경계하는 ‘계주교서(誡酒敎書)’에서 은(殷), 주(周)의 유주망국(有酒亡國)을 먼저 지적한다. 이어 “정(鄭)나라 대부(大夫) 백유(伯有)는 땅굴 집에서 밤새 마시다가, 자석(子晳)이 지른 불에 타서 죽었고, 전한(前漢)의 교위(校尉) 진준(陳遵)은 술 마시기를 좋아하여 손님이 오면 문을 잠그고 그의 수레바퀴 비녀장을 우물에 버려 떠나지 못하도록 하였는데, 흉노(匈奴)에 사신으로 갔다가 술에 취하여 살해됐다. 후한(後漢)의 사예교위(司隸校尉) 정충(丁冲)은 장수들과 술을 자주 마시다가 창자가 썩어 죽었고, 진(晉)나라의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주의(周顗)는 능히 한 섬의 술을 마셨는데, 옛 술친구와 함께 마시고 대취하였다가 술이 깨어서 보니, 그 친구는 이미 옆구리가 썩어 죽어 있었다”고 덧붙인다.
이렇듯 술과 더불어 생을 마감한 이들의 삿된 발자취는 끊임없이 이어지고, 불의 노래 또한 그쳐지지 않는다. 사학자들은 술로 인해 사직을 무너뜨린 여러 침통한 역사적 교훈에 주목하기도 했으나, 뼈아픈 역사의 반복을 명쾌하게 진단해 내지 못한다. 차라리 마음속의 사특(邪慝)함에서 비롯된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지 모를 일이다.
중국 남북조 시대, 남조 진(陳)나라의 마지막 황제 진숙보(陳叔寶, 이하 後主)도 또 그렇게 불의 노래를 이어간다. 태자 시절 문장에 능했고, 예술적 감흥이 풍부하여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리기도 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뒤를 이어 582년 제위에 오르고 나서 정사(政事)는 뒷전이었다. 높이 수십 장, 수십 칸의 임춘각(臨春閣), 결기각(結綺閣), 망선각(望仙閣)이라는 세 각을 지었는데, 문이나 난간은 단향목을 쓰고 금, 은, 옥, 비취로 장식해 그 화려함이 극을 달할 정도였다. 자신은 임춘각에, 그의 비 장여화(張麗華, 장귀비)는 결기각, 비빈들은 망선각에 거처하게 하여 주색으로 나날을 보내게 된다. 이른바 삼각황음(三閣荒淫)에 젖어 가무성색(歌舞聲色)을 탐닉했다. 총애한 장귀비의 아름다움을 기려 ‘옥수후정화(玉樹後庭花)’라는 시까지 지어 바치면서 조정에서 회의를 할 때도 장귀비를 무릎에 앉히고, 문인들과는 밤새워 술 놀이에 빠져 들곤 했다.
이에 따른 국정문란은 당연한 귀결이리라. 환관과 측근들이 서로 결탁하여 거침없이 불법행위를 하고 매관매직과 뇌물이 횡행하며 백성들에게는 세금을 마구 쥐어짠다. 결국 재위 7년도 채 안되어 북조(北朝)를 통일한 수(隨)나라 양견(楊堅, 후에 文帝)에게 진(陳)나라를 내어 주게 된다. 수나라가 쳐들어온다는 보고를 받고도 큰소리치다가 다급해지자 밤낮으로 울기만 했다. 장귀비와 함께 우물 속에 숨었다가 수(隨)나라의 포로가 될 때까지 술에 취해 있었다 하니, 후주(後主) 진숙보의 어리석음을 무엇으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조선 전기의 문신 조위(曺偉)는 ‘포석정(鮑石亭)’이란 시에서 주색잡기로 망국의 길을 걸은 후주를 힐난한다. “그대 보지 못했는가? 임춘각에서 술에 취해 문밖에 韓장군(수나라의 장군 韓擒虎)이 온 것을 알지 못하고, 옥수 벽월의 노래 끝나기도 전에 강남 왕업이 연기 따라 사라지는 것을.(君不見臨春閣中醉醺醺 不知門外韓將軍 玉樹璧月歌未闋 江南王業隨烟滅)”
이로써 남북조 시대를 통일한 수나라의 양견 또한 “이 모든 것이 술 때문이 아닌가? 시를 짓는 것으로 성공했다 여기고, 현실에 만족함이 어떠한가?”라며, 후주를 타이른다.
후주처럼 술이 물이 아니라 불이 되어 자신을 망치게 될 때까지 사람들은 깨닫지 못한다. 미리 알아챘으면 그토록 아픈 길을 걷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의 어리석음은 늘 지나고 나서야 안다는데 있다. 그래서 불의 노래는 끝도 없이 계속 이어지는가 보다.
글쓴이 김상돈 : 물과 불을 넘나들면서 명정(酩酊) 40년을 살았고, 언론계와 국회 당, 공기업 임원 등을 두루 거친 뒤 지금은 사단법인 4월회 사무총장과 KAIMA 전무이사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