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돈의 酒馬看山14
불의 노래, 수양버들처럼 늘어진 수양제
그것이 술이다. 불의 발견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경이로운 일 중의 하나다. 물속에 불을 담을 수 있게 된 것도 그에 못지않은 지혜의 산물이다. 이로써 단조로운 삶에 또 다른 변화가 시작된 것이다. 사람의 기운을 승(乘)하게도 하고 강(降)하게도 한다. 그렇기에 물과 불이 힘의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사달이 난다. 술로 인한 삶의 성패도 이와 같다. 불의 기운을 물로써 다스리지 못하여 패망한 이들의 불의 노래는 위진 남북조 시대를 거쳐 수나라로 이어진다.
분열된 중국을 300년 만에 재통일한 수문제(隋文帝) 양견(楊堅). 문제는 개혁과 개방정치로 나라의 기틀을 다진 이른바 개황(開皇)의 치(治)를 이룬다. 그러나 그의 뒤를 이은 수양제(隋煬帝, 569년~618년)는 천하의 패륜이자 걸주(桀紂)를 능가하는 폭군이다. 문제(文帝)의 차남으로 부친과 형을 살해한 뒤, 604년 제위에 올랐다.
수양제는 주색에 탐닉하면서도 건축광(建築狂)으로 일컬어질 정도로, 즉위하자마자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전개하게 된다. 수도를 장안에서 낙양으로 옮기면서 화려하기 그지없는 서원(西苑)을 만들고 매일 밤 미녀들과 호화로운 연회를 베푸는 한편, 장장 2천km에 달하는 대운하(大運河) 건설에 1억5천만 명에 달하는 노동력을 쏟아 붓는다. 거기에 더해 운하 주변에 40여개의 별궁(別宮)을 만들고, 운하를 따라 건설된 대로에 버드나무를 심었다. 운하를 유람하다가 얕은 지대가 발견되자, 마숙모(麻叔謀)라는 관리 책임자와 인부 5만 명을 강가에 생매장하는 극악무도함까지 나타낸다.
또한 유람을 위해 길이 2백 척에 높이 4층이나 되는 용주(龍舟)를 만든다. 황후와 후궁 등을 태우고 뱃놀이를 하면, 인근에 사는 백성들은 수양제에게 진귀한 술과 음식을 갖다 바쳐야 했다. 뱃놀이로 백성들의 곳간이 텅텅 비게 되는 것이다. 용주는 백성들이 끌고 다녔는데, 그 행렬만도 자그마치 2백 여리에 이르고 배를 끄는 인부들이 무려 8만 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의 무모함은 세 차례의 고구려원정으로 절정을 이룬다. 백만이 넘는 대군으로 고구려를 침공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으로 수나라의 흥망이 기로에 서게 된 것이다. 민심의 이반과 각지 군벌의 발호를 가져오고 결국 태원 유수 이연(李淵)에게 나라를 넘기게 된다. 이연이 장안을 쳐들어 왔을 때 15살 난 손자 양유(楊侑) 만이 도성을 지키고 있었고, 그는 남쪽 수도 강도(江都)에서 주색에 빠져있었다.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 수양제에 대해 이르기를 “운하를 따라 지어진 별궁에는 백여 개의 방이 있어 각기 화려한 진상품으로 호화롭게 장식되어 있고, 각 방마다 미녀들을 채워놓고 날마다 다른 방의 주인이 되었다”고 한다. 또 이르기를 “술이 입에서 떠날 새가 없었고, 천여 명의 첩들에 둘러싸여 항상 취해 있었다”고도 한다.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자 그는 소(蕭)황후에게 이렇게 말한다. “세상 사람들이 모의하여 나를 죽이려 하고 있으나 나는 잃어보았자 장성공(長城公, 진숙보) 쯤은 될 수 있을 것이고 그대도 심황후(沈皇后) 정도는 될 테니, 즐겁게 술이나 마십시다(外間大有人圖儂. 然儂不失爲長城公, 卿不失爲沈后, 且共樂飮耳).” 이어서 “귀함과 천함, 고통과 즐거움은 바뀌기 마련이니 어찌 상심하겠소(貴賤苦樂更迭爲之, 亦復何傷).”
당시 한 어의가 수양제를 진찰한 뒤 물이 부족하여 불이 상승한 상태라고 진단하였다 하니, 불을 물로 다스리지 못한 후과가 이렇듯 뼈아픈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글쓴이 김상돈 : 물과 불을 넘나들면서 명정(酩酊) 40년을 살았고, 언론계와 국회 당, 공기업 임원 등을 두루 거친 뒤 지금은 사단법인 4월회 사무총장과 KAIMA 전무이사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