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집에서 술잔을 들다
이 화 선(사단법인 우리술문화원장)
우리에게 미인도로 잘 알려진 혜원의 그림은 인물과 풍경화 외에도 양반의 위선이나, 남녀 간 사랑, 기생이나 무당 등을 소재로 한 해학 넘치는 풍속화가 많다. 오늘 <삶과 술> 지면에서 만나는 ‘주사거배(酒肆擧盃)’는 18세기 후반~ 19세기 초반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700년대 말은 정조가 신해통공(정조15년, 1791)을 단행하여 객주 또는 여각으로 불리는 여객들이 다양한 도고 활동을 하는 주도 세력으로 부상하는 때이다. 서울과 지방은 포구를 중심으로 객주가 들어서고, 선창가로 색주가들이 늘어섰을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밤마다 술집들이 불야성을 이루며. 장시 발달로 양조는 더욱 촉진되어 급기야 정조7년(1783)에 좌의정 유의양이 서울 미곡 소비량을 연 100만 석, 이중 양조에 소비되는 양을 절반 가까이로 추정하면서 강력한 금주 상소를 올린다.
그러나 금주령을 어긴 관료를 참수하는 등 가혹할 정도로 주계를 엄중하게 집행했던 영조와는 달리 정조는 술에 대해 관대했다. 아마도 실효성이 없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고, 그만큼 백성들 살림살이가 먹고 살만해졌을 수도 있다. 그보다는 단속을 해야 할 관료들이 속전(贖錢)을 받고 이를 소홀히 했기 때문이 더 컸을 듯하다.
그리고 트레머리를 한 여인이 국자를 들어 술을 떠 주고 있는데, 국자 생김새가 직각으로 꺾인 것으로 보아 탕을 떠주는 국자가 아니라, 술을 뜰 때 쓰는 술국자로 보인다. 술을 떠주는 여인이 입은 잘록한 저고리는 팔을 들어 올리자 옆구리로 속치마도 슬쩍 보일 듯하고, 약간 트는 듯 허리 모양새와 붉은 입술, 예쁜 눈썹 등이 묘한 느낌을 준다. 여염집 부인은 아니어 보이지만 남 끝동, 자주 고름, 남색 치마를 잘 차려 입었다. 여인만 묘한 느낌을 주는 것이 아니라, 배경이 되는 집도 색주가 같은 느낌이 들지 않고, 정갈한 여염집 안마당 같다. 그렇다면 사대부가 모여 사는 동네 가운데에도 술집이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흥미로운 기사가 하나 실려 있다.
‘정조 16년(1792) 판윤 김문순이 금주법을 청하나 윤허하지 않다.’
판윤 김문순이 후주(酗酒)에 대한 금지령을 다시 내릴 것을 청하였다. 판중추부사 박종악이 아뢰기를, “곡식 소비는 술을 빚는 것보다 더 심한 것이 없으니 금주령은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 하니,
정조는 즉위 직후 금주령을 해제하는 등, 선왕 영조에 비해 술에 관대하였다고는 하나, 아주 그랬던 것은 아니고, ‘크게 술을 빚는 것과 가정에서 술을 파는 것’은 금단시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다시 그림으로 돌아가면, 모두 서성대며 잔술을 마시는 것을 보아 일명 ‘선 술집’일진대, 사내들의 옷차림새는 양반들과 함께 중인들도 섞여 있지만 제법 세도가 있어 보인다. 젓가락을 들고 방금 술을 한 잔하고, 안주를 집어 올리려는 듯 하는 붉은 옷에 노란 갓을 쓴 사람이 보인다. 이 붉은 도포에 노란 갓을 쓴 사람은 별감이다. 별감은 양반 관직이 아닌 잡직이지만, 양반 아닌 축들 중에서 최고 출세 직으로 신분은 낮지만 실제는 왕명을 전달하거나, 왕의 일상용품 관리를 담당하며, 대전과, 중궁전, 세자궁에 배속되기도 하고, 왕의 신변 호위를 맡는 근위무사로서 권세를 부리는 자리였다. 또 그림 맨 오른 쪽에 고깔모자를 쓴 이는 나장이다. 나장은 문서에 관련된 일을 하는 동반서리직과 육체노동에 가까운 일을 하는 서반서리직(西班書吏職)으로 나뉜다. 서반서리직 중 예외적으로 왕을 모시며 일하는 승정원 사령과 함께 국사범(國事犯)을 다루는 의금부 나장은 권세가 있던 집단이다. 그림에서는 1명의 여인과 6명의 남자가 등장하는데, 풍속을 단속해야 할 포도부장으로 보이는 붉은 옷의 별감, 같은 하급관리이지만 권세 있는 의금부 나장, 행전을 치고 가죽신을 신은 양반들이다.
영조 치세 음주문화는 억압받고 음성적이기까지 했으며, 제례 등 극히 예외적으로만 허용됐다. 이와는 달리 정조 치세에는 금난전권 폐지를 단행하는 등 강력한 개혁으로 상업이 융성했으며 문예는 조선의 르네상스라 불릴만한 자유분방함이 넘쳤던 때이다. 이를 반영하듯 색주가, 목로주점, 내외주점 등 여러 형태의 술집들이 번성했고 종사하는 사람의 숫자도 많았다. 이는 사간원 관료 이명연이 올린 상소를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는데, 포구 주변 선창가는 물론, 시전과 동네에까지 술집들이 번성했다는 기록이 있다.
정조 16년(1792) “정언 이명연이 쌀값 안정을 위해 금주법 시행을 청하다.”는 정조실록 기사를 보면,
정언(正言) 이명연(李明淵)이 아뢰기를, “지금 가을철에 쌀값이 매우 높으니 겨울과 봄에는 더욱 치솟을 것인데, 백성의 일이 진실로 염려스럽습니다. 달리 바로잡을 방책이 없다면 우선 낭비되는 구멍을 막아야 하는데 가장 낭비가 심한 것으로 논하자면 양호(釀戶)가 그 으뜸입니다. 도성 안에는 양호가 각 통(統)마다 2, 3호씩은 꼭 있으니 묘당으로 하여금 속히 금주법(禁酒法)을 강구하게 하여 날짜를 정해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이 아뢰기를, “대신(臺臣)이 아뢴 대양을 금지시키는 명령을 내자는 의론도 진실로 곡식을 넉넉히 하는 방책이기는 하나, 안주를 금지시키는 일도 백성의 생활과 큰 관련이 있습니다. 근래에 백성의 풍속이 점차 교묘해져서 푸줏간의 고기와 시장의 생선이 태반은 술안주로 쓰이고 있습니다. 진수성찬을 무절제하게 차리는 바람에 시장의 반찬값이 날마다 뛰고 있으니 일체 엄히 금지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처럼 정언(正言) 이명연이 “도성 안에는 양호가 각 통(統)마다 2, 3호씩은 꼭 있으니”라고 소를 올린 것을 보면, 혜원의 그림 배경이 조용하고 정갈한 동네 가운데 같은데 일명 선술집 풍경이 보이는 이유를 짐작하게 한다. 지금 아파트단지나 상가에 생맥주 집이 하나, 둘쯤 있는 분위기라고나 할까. 특히 “푸줏간의 고기와 생선 태반이 술안주로 쓰이고 있다.”는 채제공의 상소는 흥청거렸던 당시 술집 풍경을 자연스레 상상하게 한다. 신하들이 선왕과 같이 금주를 시행할 것을 주장하는 많은 상소에도 불구하고, “어찌 백성을 동요시킬 수 있겠는가.”, “명령만 내려놓고 시행하지 못하는 것보다 우선 신중히 할 것”이라고 정조는 말한다.
주사거배(酒肆擧盃). ‘술집에서 술잔을 들다’라는 뜻이다. 다시 그림을 보면 여러 계층 남자들이 서서 술을 마시고 있는데, 주모 곁에 붉은 옷을 입은 별감은 지금의 청와대 경호실 소속쯤이라고 비유해볼 수 있다. 별감이나 의금부 나장은 신분은 낮지만 세도도 부리며 술집 하나는 끼고, 젊은 주모 기부(기둥서방) 노릇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뒤에 회색 옷을 입은 양반은 허리춤에서 돈을 꺼내는 듯한 품이 별장의 전주(錢主)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림 왼편에 상투를 어설프게 틀고 있는 중노미는 주모가 시킨 허드렛일을 하다 나와 있는데, 표정이 사람들을 번갈아 보며 망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아마 사람들이 술을 몇 잔씩 먹었는지 셈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주사거배’가 영조 때 그림이라면, 혀를 찰 일이다. 풍속을 단속해야 할 관리가 오히려 어울려 술을 먹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자니 중노미는 망을 봐야할 일이고, 삼엄한 금주령 아래서 편하게 앉아서 먹지도 못하고 얼른 잔술이나 걸치고 내빼야 할 터이다. 술집도 내놓고 할 수 없는 일이니 동네로 숨어들어 조용히 몰래몰래, 알음알음해야 했을 게다. 그렇다면 혜원은 그림을 통해 단순한 풍속화를 넘어 당시 기득권 층, 세도가들 행태를 비판하고 고발하려 했던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상황은 조선의 르네상스기라고도 불리던 정조 치세이다. 이것이 그림의 해석이 180도 달라지는 이유이다.
* 참고문헌
이태호·양숙향, 「간송미술관 소장『혜원풍속화첩』을 통해 본 19세기(순조∼고종 연간) 민간 복식과 생활상」
강명관, 「조선 후기 서울의 중간 계층과 유흥의 발달」, 『민족문학사연구』2, 민족문학사학회·민족문학사연구소,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