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술

삶의 변화, 그리고

삶의 변화, 그리고

 

임재철 칼럼니스트

 

나이 들고 노년기를 코앞에 두면서 점점 감정이나 기분에 따라 사는 게 아니라 몸의 신호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낀다.

젊은 시절에는 거의 잠들지 않고 시험공부를 하거나, 지인들과 골프 치고 친구들과 술도 마시고 놀면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도 가능했다. 몸이 일단 의지나 감정에 따라주었고, 견뎌 주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몸과 마음이 크게 달라지고 가끔은 착각하는 일이 허다한 지경이다.

 

그러니까 해가 바뀔 때마다 심신이 달라짐을 느낀다. 가만히 있어도 몸이 변하고 있다. 물론 필자는 몸과 마음이 분리되어 있거나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더욱이 현실에선 다른 몸이 되었음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고 아직도 펄펄 끓는 젊은이로 생각하며 살아가는 일면도 있다. 마음은 늘 과거의 빛나는 경험을 쉽게 잊지 못하기 때문일까. 아무튼 몸을 충분히 받쳐주는 에너지가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세상 또한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제 갈 길을 간다. 시계가 없어도 시간은 흐르고 만물은 제자리에 있는 것 같아도 끊임없이 변한다. 인간의 체세포는 25~30일 살고 1년이면 몸에 있던 체세포는 전부 교체된다고 한다. 적혈구는 3개월, 위장 내벽 세포는 2시간 반 정도 살다가 새로운 세포에 자리를 내준다는 거다. 인간의 세포는 70번 정도 분열하면 더 분열하지 못하는데 이를 ‘헤이플릭 한계(Hayflick Limit)’라고 한다.

 

노화를 거스를 수 없고 자연의 순리를 생각하며, 식탁에 놓인 식은 커피 한 모금 을 마시면서 흘러가는 세상 풍경을 무심히 바라본다. 지나온 세월의 굴레가 저만큼 있다. 마주하는 세상사, 시시비비 가리는 것에 지쳐서 생각을 닫아버리고 싶을 때가 종종 있지만, 그래도 그러면 안 될 것 같아 귀 한쪽, 눈 한쪽을 뜨고 귀동냥 눈동냥을 한다. 한동안 보지 않던 뉴스를 보며 그래서 어떠냐고? 자문도 해본다. 커피를 그냥 마실 순 없듯,

‘2024년 12월 3일’은 역사의 순간이 되어 버렸다. 그저 평범한 여러 날 중 하나로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렇고 그런 날일 수 있는데, 모든 이의 기억에 새겨졌다. 필자 역시 나름대로 안정적인 시스템을 구축한 나라가 됐다고 믿고 살았는데… 그날 이후 잠을 잃어버렸다. 그자의 배뱅이굿에 자다, 깨다, 자다, 깨다… 오늘은, 또 오늘은… 이렇게 힘든 날이 흐르고 있다. 소설속의 한 이야기처럼 ‘몽유’에 빠졌다. 맛있는 와인을 들이켜도 마찬가지다. 분명 깨어 있는데 자고 있고, 자고 있는데 깨어 있다. 세상사, 그렇고 그런 거라지만 아프고 힘들다.

이제는 자고 싶다. 비루한 물건 때문에 새벽마다 뉴스를 확인하기 위해 눈을 뜨는 일이 더 이상 없었으면 좋겠다. 깊은 잠, 깨어나면서 평온한 일상, 사람들의 근심이 사라진 평온한 모습을 보고 싶다. 세상이 순리,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지 않고 ‘소소한 행복’을 즐기며 사는… 말하자면 평범한 하루의 삶 속으로 마음을 옮기며 살고 싶다.

그러면서 보다 경건한 마음으로 1년 동안 함께할 일련의 루틴을 떠올려 본다. 핸드폰 다이어리에 적어 놓은 것을 비롯, 한해 계획들을 보니 그저 그렇고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어딘가 한 단계 개선할 여지가 있는지를 찾아보고 싶다. 세상 만물은 자연의 순리대로 흐른다. 광대무변한 우주의 시각에서 보면 인간이 사는 세상은 티끌 같은 거겠지만 건설적 습관과 의지력으로 심지 있는 삶의 여정이 돼야 한다는 마음이다.

 

몸은 변하고 있지만, 세상을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걸으며, 중요한 일에 시간을 투자하고, 내 자신이 마음속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는 묵상이다. 최대한 공부하고, 최대한 경험하고, 최대한 여행하고, 최대한 좋은 음식을 먹고, 인생을 더 아름답게 말이다. 내 자신이 좋아져야만 주변 사람도 돌보고 모든 것이 좋아질 것이다.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슬금슬금 세상이 바뀌고, 또 어느 순간 벼락 치듯 세상이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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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중국에 노벨문학상의 영광을 안겨준 중국의 문호 모옌(莫言)은 “사람은 일단 깨달음을 얻으면 매우 침묵하게 된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능력이 없어진 게 아니라 사람들과 어울리고 연기하는 취미가 없어진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연극 같은 인생을 끊임없이 바쁘게 뛰어다니며, 아귀다툼하고, 저마다 욕망을 좇으며 외적인 명성과 물질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하지만 인생을 깊이 반성하고 진정한 가치와 의미를 깨달았을 때, 우리는 걸음을 늦추고 허울뿐인 것들을 버리며 내면의 충실함과 정신적 만족을 추구하기 시작한다는 것으로 모옌의 말을 해석할 수 있겠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세상이 바뀌고 있다. 추위와 어둠 속에서도 동백이 붉은 꽃을 피워내듯 시국이 풀리고, 우리가 평범한 삶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평온한 힘을 느끼며, 시간의 주인이 되어 잘 먹고, 잘 자고, 이따금 낯설고 먼 곳으로 여행할 수 있는 건강을 유지하면 좋겠다. 우리에게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가 생겼기에 더 책을 읽고, 음악을 들으며, 한잔의 커피와 와인이 선사하는 정서를 느끼고, 생각의 회로를 돌리며 다시 치열하게 걸어가는 것이 너무 큰 욕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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