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술

‘막걸리 한잔 나누는 정

‘막걸리 한잔 나누는 정’

 

임 재철 칼럼니스트

 

임재철

얼마 전 지인이 보내준 글이 내내 머릿속을 맴돈다. 시절이 하 수상(殊常)하니 가까운 사람들과 술 한 잔 하기도 어려운데, ‘막걸리 한잔을 나누는 친구가 그립다’라는 제목의 펌 글이다. 좋은 책은 곁에 두어야 하고 좋은 술은 나눠야 한다고 배운 필자이지만 여러모로 교차되는 마음이다. 글의 내용은 그저 그런 거였지만 제목 때문에 가슴 찡한 울렁임이 있었던 이유다.

 

얼핏 조금 웃기거나 깊이 없는 일로 보일지 모르지만 누구에게나 술친구에 대한 옛 추억은 그만큼 소중한 것이다. 필자의 경우 피마골 등지에서 막걸리를 보통 10병 가까이 마시다 먼 길을 가버린 애주가 친구를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술잔을 나누었던 이들이 그립다. 최근 몇 해에 걸쳐 관성처럼 옆구리에 늘 바이주(마유주) 술동이를 끼고 뚜벅뚜벅 나그네 길을 무사히 걸어가고 있으니 더욱 그런지도 모르겠다.

 

더욱이 나그네길 위에 인생이 있고, 얘기가 있고, 세계 어느 곳에 가든 맛볼 만 한 술이 많고, 또한 가장 ‘맛있는 음식’은 그 지역 ‘술’이라고 믿고 있는 필자다. 그렇다고 술이라면 자다 가도 깨는 애주가는 아니다. 다만 우리가 술을 통해 얽힌 세상 사람들의 문화와 사상을 이해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말하자면 술 있는 곳 주변에 늘 인간의 다정한 벗이 있다. 한마디로 존재감 없는 한 나그네인 필자가 서 있는 세상이 진정 살아 있는 것인지, 허상인지 모르면서 술꾼인 양하는 것 같다.

아무러면 어쩌랴! 하고 많은 복잡한 세상일도 술 한잔 마시고 웃고 나면 그만 아닌가. 그러고 보니 중국의 술친구들도 떠오르고 어찌 할꼬. 중국인들은 대개 신의를 위해서 밤새워 마신다고 하지만, 그들과의 술자리도 주름이 깊어지고 흰 머리카락이 더 많아지니 강물처럼 밀려온다. 실로 머물러 있을 것만 같았던 세월이 야속하다. 그러니까 술 한 잔이 여러 관계에서의 우정을 그렇게 정답게 개인적 감상과 추억을 느끼도록 해주는 걸 보면 술을 가슴으로 마시지 머리로 마시지 않는다고 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렇게 마냥 그리운 감정과 잘 익은 술 냄새에만 젖어 있을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유명 페친 시인 한 분은 슬픈 글을 이렇게 남겼다.

“나랑 술 마셔주던 선배들은 이제 딱 두 부류만 남았다. 죽었거나 병들었거나…. 그들과 술 마시는 일은 나날이 평화로웠다. 더 갈 데 없이 평화로워서 우리는 아무 때나 울었다. 죽거나 병든 선배들과 다시 술을 마실 수는 없는 거니까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죽었거나 병들었으므로 진정 아름다웠네라!”

참, 슬프다. 그 뿐이었을까? 필자가 알 수 없는 분명 엄청난 스토리가 있을 거다. 이 지구상에 인간이 살아가는 한 술을 마실 것이고 사람들은 아름다운 술을 마시는 마음으로 친구를 그리워할 것이다. 여기에서 인간의 역사와 궤를 같이하는 술의 역사를 논하기는 어렵지만, 결국 술이 있는 곳에 늘 친구가 있었고 선후배가 있었다고 본다. 이렇게 술은 술이듯이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우리의 미디어로 살아 있다. 더구나 세상이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실로 막걸리 한잔을 나누는 친구가 어딘 가에서 홀연 불러 준다고 한다면 얼마나 반가울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사실 날씨와 마찬가지로 흐리고, 맑고, 바람이 불고, 가끔 비가 오기도 한다. 이를테면 며칠 전에도 멀쩡하게 아침마다 명언 집을 카톡 보내던 친구가 연락이 없고, 핸드폰의 소천 소식은 일상이고, 산티아고 순례길을 여러 번 다녀왔다고 자랑하던 선배도 깜쪽 같이 소식 끊겨 수소문해보니 항암 치료 중이고… 그렇다. 세월은 흔적이 없고, 청춘은 이미 지나갔으며, 달력은 점점 얇아지고 있다. 오직 따뜻하고 선량한 시간 속에서 소탈하게 살아가면서 그래도 막걸리 한 잔 나누는 좋은 친구 정이 그립고 그리운 것이다.

 

역설적으로 보면 암울한 시대에 한가하게 이러고 있을 때인가? 라고 반문할 수도 있을 거다. 맞다. 필자 역시 모든 것을 다 말할 수 없지만 어떻게 보면 쓰는 돈이 술값에서 약값으로 변하는 나이다. 즉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없는 시절이다. 하지만 애써 일어나지 않을 일을 상상할 필요는 없다. 그냥 단순하게 언제 어디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인생을 사는 것이고, 사는 것은 마음가짐이니 그런 마음으로 술도 잘 다스리면 좋겠다. 어떤 것 보다 유용한 것은 좋은 사람들과 나누는 술이 세상을 치유하는 좋은 약이니 말이다.

정호승 시인은술 한 잔이란 시(詩)에서 이렇게 썼다.

 

인생은 나에게/ 술 한 잔 사주지 않았다/ 가을밤 막다른 골목 끝 포장마차에서/ 빈 호주머니를 털털 털어/ 나는 몇 번이나 인생에게 술을 사주었으나/ 인생은 나를 위해 단 한번도/ 술 한 잔 사주지 않았다/ 눈이 내리는 날에도/ 돌연꽃 소리없이 피었다/ 지는 날에도

 

이 시의 깊은 뜻을 잘 모르겠지만, 사람이 평생을 살며 인생이 나에게 ‘술 한 잔’ 사주지 않았더라도 우리가 인생을 사랑한다면, 사는 곳 어디든 사랑이지 않을까.

가령 사람은 살아 있는 그 자체를 위해 사는 것이지, 살아 있는 것 이외의 어떤 것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기에 그렇다. 우리가 감사하면 도처에서 감사하듯,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다 관련이 있다고 볼 때 평생 앞에 놓인 술 한 잔을 잘 돌봐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런 삶으로 말미암아 막걸리 한잔을 나누는 그리운 친구를 경험하고, 진정한 인생의 승자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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