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회의 축배가 이별주가 될 줄이야
박정근 (문학박사, 황야문학 주간, 작가, 시인)
서로 약간 다른 길을 걸었지만 문학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어 다시 만나고 싶었다. 나이 칠십이 넘어 사춘기에 가졌던 문학에 대한 열정을 다시 되살리면 서로에게 시너지 효과가 있겠다는 기대감을 가지고 전화를 걸었다. 그는 필자의 전화에 호응하여 곧 만나서 지난 공백에 대해 대화를 하고 싶어 했다. 마침 필자가 발행하는 황야문학 출판기념회를 준비하고 있었던 중이라서 종로 문화공간에서 만날 수 있었다. 언뜻 그가 당뇨병으로 오래 고생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그의 건강에 대해 다소 걱정이 되었다.
오랜만에 조 시인을 다시 만나는 순간 그가 아직 문학청년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기뻤다. 변산의 정기를 마시며 문학을 꿈꾸던 청년이 다시 돌아왔다는 느낌을 받고 신기한 느낌마저 들었다. 당뇨병을 어느 정도 극복한 것에 진심으로 축하를 해주었다. 그는 사과식초를 복용하고 신약실험에 참여하여 효과를 보고 있다고 건강에 어느 정도 자신감을 보였다. 몸이 호전되었다면 다시 창작에 몰두하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필자는 그에게 사춘기 청년 시절에 가졌던 문학의 꿈을 함께 만들어가자고 제안했다. 그는 쾌히 공감을 표시하고 다음 호에 작품을 싣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상호간의 깊은 신뢰를 확인하며 밤늦도록 통음을 하며 우의를 다졌다.
세월이 많이 흘러서 친구끼리의 재회를 위한 중요한 이벤트는 재회의 축배를 드는 것이다. 청소년 시절에 시인의 골방에서 몰래 소주와 막걸리를 마시던 기억은 달콤하기만 하다. 술이 두어 순배를 돌자 우리는 완전히 55년 전의 청소년으로 돌아갔다. 몸은 옛날과 같지 않지만 마음은 파릇파릇한 풀잎처럼 생기가 돌았다. 시인이 속물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세속의 때에 물들지 않은 순수성을 지키는 것이 아니겠는가. 자본주의 사회에 살다보니 남만큼 출세하고 돈도 모아야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다하니 세상의 흙탕물에 뛰어들었던 성인 시절이 부끄럽기만 하다.
이제 칠십이 넘어 노인세대로 구분되는 두 친구가 다시 청순한 문학청년으로 잠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일지 모른다. 우리의 영혼을 찬란하게 했던 시인과 소설가들을 거론하며 과연 우리는 그런 거작을 남겼는가를 고민했다. 남은 세월은 모든 거 다 물리치고 온힘을 다하여 글을 쓰자고 다짐했다. 다짐의 순간마다 술을 한잔 더 들이키며 창작에 대한 노년의 마지막 불꽃을 살리려고 몸부림을 쳤다. 만남의 시간은 밤의 심연 속으로 흘러가 지하철이 끊길 시간이 되었다. 우리는 결국 만취가 되어 다시 만날 것을 귀가를 서둘렀다.
필자는 그의 시를 여러 편 받아 초대시인 섹션을 만들어 재회의 선물로 개제하였다. 그는 감사의 의미로 양주를 한 병 가져와 문인들과 축하의 자리를 가졌다. 참 뿌듯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술을 마시며 그의 몸의 상태가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전처럼 술을 잘 마시지 못하고 기침을 약간 했다. 술을 한 차례 더 하자는 제안을 물리치고 무리하지 말라고 자제를 부탁했다. 결국 술자리를 조금 일찍 마치고 귀가하였지만 함께 술을 흠뻑 나누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헤어진 후 한 동안 그의 소식이 잠잠했다. 어느 날 휴대폰으로 들려온 그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천식 기운이 있어서 호흡도 곤란해지고 건강이 급격하게 악화되었다고 전해왔다. 그 후유증으로 문예지 모임에 회복할 때까지 당분간 나오기 힘들다고 하소연했다. 그 사이 필자는 고향에 문학농원을 만들어 고향 문인들의 작품을 전시하려는 작업을 했다. 물론 조찬용의 작품도 포함해서 좋은 시를 전시하여 문학운동을 하려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모임 후 이틀 후 황야문학 편집장에게서 급한 전화가 왔다. 조찬용 시인이 사망했다는 부고가 카톡에 떴다는 것이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가슴이 아프게 내려앉았다. 세월의 파도를 거슬러 청년 시절로 돌아가자는 약속은 어디에 두고 뭐가 급해서 서둘러 떠나버렸단 말인가. 가슴 속에 묻어두었던 시인의 순수한 표정이 환상으로 내게 다가왔다. 지난 모임에서 문학적 열정을 작은 불꽃으로 다시 피우고 싶었던 시인이었다.
불과 두 달 전에 오랜 병마에서 겨우 탈출했다고 안도의 숨을 쉬었다. 필자는 고향 부안으로 내려가 작은 농원을 가꾸며 글을 쓰자고 제안했다. 그는 몸을 좀 더 추스르고 좋아지면 가겠노라고 먼저 내려가라고 필자를 격려했다. 그리고 그는 여윈 얼굴에 사춘기 시절의 순수한 표정을 어렵게 지어보였다.
이제 필자는 그를 묻어야 할 부안군 변산면 마포리에 있는 선산의 무덤 앞에 서 있다. 그를 잃어버린 아내와 자식들은 슬픔으로 망연자실하고 있다. 그의 영정을 물끄러미 져다본다. 그 순간 옛날 그의 골방에서 나누었던 시어가 나즈막하게 들려왔다. 몸은 사라졌지만 그의 시가 영혼처럼 나타난 모양이다. 인간은 세월의 위력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 그의 몸이 재가 되어 고향에 왔지만 아무도 말이 없다. 세월이 몰고 온 운명에 거스를 수 없다는 아픈 인식을 할 뿐이다. 이제 망자인 시인에게 마지막 이별주 한잔을 드리고 있다.
주검으로 온 시인의 귀향
박정근
시인은 소리 없이 해풍을 타고
차가워진 몸을 감춘 채
마포 김제 조 씨 선산으로 슬며시 내려왔다
갑자기 맞이한 시인의 죽음에
고향 하늘도 슬펐나 보다
무덤을 바라보는 구름이 잔뜩 찌푸리며
때 이른 귀향을 나무라고 있다
저 건너 성천 바다에서
강풍이 달려와 소리를 내어 우는 까닭은
어린 시절 시인이 뛰어놀던 바다도
슬퍼서 조곡을 부르고 싶은 것이다
언젠가 고향 마포에 돌아와
시를 쓰고 싶던 시인의 오랜 무심함에
자상한 고향도 서운했었나 보다
황망한 주검으로 찾아온 사연을 모르고
그저 이방인처럼 입을 다물었다
아, 죽은 시인에게 술을 따른다
슬픈 이별주 한잔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