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포에서 한바탕 벌인 노을 빛 술잔치
박정근(전 대진대교수, 황야문학 주간, 작가, 시인)
오랫동안 함께 노래한 엠마오 중창단 단원들이 필자의 귀농지에 가까운 격포로 엠티를 왔다. 멤버의 주류가 시니어로 구성된 중창단으로 사회공동체를 위해서 음악봉사를 하고 있다. 주로 크리스천이라서 사회적 소외자들이나 교인 장례식에서 위로의 음악이나 찬양을 한다. 멤버들이 여름 행사로 귀향하여 문화운동을 하는 필자를 위로 차원으로 방문한 것이다. 모두 교인들이지만 신앙은 진보적인 사고에 바탕을 두고 있어 때때로 함께 술도 기울인다. 음악인들이 휴가를 왔으니 술 한 잔은 필수적이지 않은가.
필자는 그들의 숙소를 격포 채석강 해수욕장 옆에 있는 호텔로 정했다. 그날 날씨가 너무 뜨거워 외부에서 오래 걷는 활동은 쉽지 않았다. 오후에 바닷가에서 간단한 수영을 하면서 보내도록 일정을 만들었다. 그들이 수영을 즐기는 동안 차를 몰아 격포 수산시장에서 횟감을 예약하였다. 격포는 항구라서 생산회가 그리 비싸지 않다. 마침 성수기가 지나 한가한 항구는 나름 매력이 있다. 북적대던 시장이 철이 지나 정적이 감도는 분위기는 시니어들에게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전성기가 지나버린 시니어들에게 한적해진 해수욕장은 그들의 인생의 이미지에도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다시 해변으로 돌아와 보니 문득 해변 광고판에 포스터가 눈에 보인다. 생맥주집에서 붙인 치킨과 생맥주를 배달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는 해변에서 맥주의 맛은 얼마나 강력한가. 입안마저 갈수기의 논바닥처럼 갈라지듯 목말라 오는데 맥주 한잔은 그야말로 차디찬 생수에 대한 갈증을 해결할 생약이다.
우리는 총무에게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어 빨리 배달을 시키라고 부탁한다. 십 분이면 도착한다는 말과는 달리 좀처럼 배달 오토바이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갈증으로 헉헉대는 우리들의 맥주에 대한 욕망을 지나치게 고문한 후에야 생맥주가 도착한다. 늦은 배달이 원망스럽지만 이제라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한 조끼의 생맥주야 일인당 겨우 맥주 두어 잔으로 끝나리라. 하지만 오늘 밤에 있을 생선회 파티를 위한 맛보기로 만족하기로 한다.
해가 뉘엿뉘엿 서쪽을 향하여 가라앉는다. 뜨겁던 태양볕도 상당히 수그러진 느낌이다. 조금만 있으면 어스름이 오고 술시가 점점 다가온다. 더위 때문에 수산시장까지 걷기에는 무리이다. 내 차로 두 번 나누어 횟집으로 가기로 한다. 그런데 전체 인원이 십여 명이 되어 실어나를 교통편이 문제이다. 별 수 없이 내 승용차를 이용해서 두 번 왕복하기로 한다. 첫 번째 팀을 먼저 실어다주고 횟감 구경을 하도록 하고 두 번째 팀을 태워 도착했다.
첫 번째 팀은 벌써 횟감을 구경하고 어종을 결정한 모양이다. 초대한 손님 구미에 맞아야 하니 잘 되었다 싶다. 광어회에 펄펄 뛰는 바닷장어를 하기로 했단다. 오랜만에 정력에 좋은 바다장어에 소주를 마시면 좋으리라.
격포 수산시장 2층에 큰 식당이 있다. 여러 횟집에서 횟감을 가져오면 여기서 기본 반찬을 차려주고 매운탕까지 끓여준다. 저녁시간이 되니 창 너머 바다 수평선에 석양이 걸려있다. 석양이 바닷물을 핏빛으로 물들이고 있다. 젊은 시절 필자의 가슴 속에 저런 뜨거움이 있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은 애욕일 수도 있고 세상의 권력을 손아귀에 쥐고 싶은 속물적 출세욕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뜨거움도 세월이 가면 힘을 잃고 식어간다. 수평선에 걸친 석양도 한낮의 뜨거움을 잃어가고 있다. 시니어들은 그들의 전성기가 스러짐을 느끼면서 석양에 대해 동병상련의 심정을 느끼는 것이다.
상위에 횟감이 차려지자 식욕이 솟아오른다. 우리는 서울에서 공수해 온 고급 소주를 내놓고 본격적으로 술을 마시기 시작한다. 싱싱한 광어회를 쌈을 싸서 입에 넣으니 침이 감돈다. 술이 고팠던 차에 서둘러 건배하고 소주 한잔을 목에 털어 넣고 창 너머 수평선을 바라본다. 바닷물이 붉게 물들어 있다. 수평선 언저리 하늘이 노을이 되어 물들었던 붉은 빛이 바다로 스며들었나 보다. 온 바다가 붉은 잉크로 퍼져나가고 있는 모양이다. 누가 하늘과 바다가 둘로 나뉘었다고 했던가. 이 순간 격포 앞바다의 하늘과 바다는 분명 하나가 되어 포옹하고 있다. 필자는 언젠가 격포 앞바다를 보면서 〈석양을 바라보며〉라는 시를 한편 짓는다.
석양을 어둠 속으로 떠나보내며
이별을 서러워하는 바다여
물속으로 떠나는 임을 붙잡고
일렁이는 파도에 얼굴을 붉히며
짤싹짤싹 슬픈 노래를 하라
사랑은 영원하다고 누가 말했는가!
우리의 사랑은 뜨거울수록
이별의 시간이 가까워지는 운명이라
저 뜨거운 가슴을 안으면
내 몸조차 불처럼 타올라 재가 되리라
어둠이 짙어지면
떠나야 할 운명을 타고난 그대여
몸이 타올라 없어질지언정
온 힘을 다해 뜨겁게 사랑하다가
뜨거운 열정으로 임을 안고 잠들라
새벽이 올 때까지 임의 꿈을 꾸어라
석양을 안주 삼아 마시는 술맛을 무엇과 견주어 말할 수 있겠는가. 광어회와 바다장어회 뿐만 아니라 안주로 먹는다 해도 영혼의 안주인 석양을 술잔에 담아 술을 마시니 좀처럼 취하지 않는다. 여기에 온 중창단 단원들은 결코 잊지 못하리라. 광어와 바닷장어 횟감은 어디 가더라도 먹을 수 있지만 술잔에 붉게 담겨오는 격포 노을의 정기는 어디서 구할 수 있겠는가. 필자는 술을 천천이 마시며 수평선의 노을을 오래 응시한다. 노을의 정기를 가슴에 담기 위한 나만의 의식이다. 세 잔의 소주를 거의 마셨을 때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낀다. 격포항의 붉은 노을은 내 가슴 속에 영원히 남아 있으리라.
총무는 어둠이 내리는 항구의 정경을 보려는 듯 창문을 활짝 열어 제킨다. 어느덧 밤하늘에 보름달이 둥실 떠있다. 중창단 단원들이 모두 “와!”하며 탄상을 지른다. 모두 잔을 들어 보름달을 보며 건배를 한다. 순간 보름달이 술잔에 내려와 술 위에 떠있다. 오늘의 술자리는 여름밤 술잔치로 완전무결한 결정판이 된다. 노래를 통해 세상에 행복과 위로를 전하려는 엠마오중창단은 격포항구의 노을과 보름달의 축복을 받으며 술자리를 마무리했다. 그들의 목소리에 노을 정기가 스며들어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가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