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상우의 에세이
다시 문제는 감동이다.
이세돌과 알파고
대학시절에 나는 취업공부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무슨 직장을 잡아야겠다는 생각도 없었고 무슨 일을 하겠다는 구체적인 계획이 전혀 없었다.
술 마시거나 책을 읽거나 하며 하루하루를 소일했다. 물론 여러 잡기도 좋아했는데 바둑도 그 하나였다. 당시에는 이창호가 부동의 1인자였다. 그리고 서봉수와 조훈현, 유창혁 등의 프로기사가 각축을 벌였다. 맑은 날은 덕진연못에 나가 하루 종일 친구들과 바둑을 두었다. 그리고 술 한 잔하며 바둑이야기를 나누었다. 조훈현의 스승이었던 세고에 겐사쿠의 외로움에 울적하기도 했고 된장바둑 서봉수의 집념을 도마에 올리기도 했다. 신산(神算) 이창호의 형세판단과 계산 능력은 늘 우리를 압도했다. 특히나 돌부처라는 별명처럼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그에게서는 어떤 경외감 같은 것이 있었다.
절친했던 지인은 후배인 나에게 백제 개로왕의 고사를 이야기하며 젊은 날 시간을 아껴쓰라고 당부를 하기도 했다. 고마웠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십대 초반에는 바둑에 열광했으며 이십대 중후반에는 스타크래프트라는 오락에 또한 많은 시간을 할애했었다.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결이 어제(3월 13일)로 4번기가 끝났다. 그동안 3전 전패를 했던 이세돌 9단이 4번기에서 기어이 한판을 이겼다. 경기가 시작되는 오후 1시부터 몇 시간동안 모니터에서 눈길을 뗄 수 없을 정도로 흥미진진한 바둑이 펼쳐진다. 알파고는 모양이나 정석을 때로는 무시하며 가장 실리적인 바둑을 둔다. 특히나 포석과 형세가 굳어지면 기계 특유의 정밀한 계산으로 바둑을 승리로 이끌어 간다.
가장 안타까운 장면은 바둑이 끝나고 이세돌이 습관적으로 복기를 하려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기계는 복기를 할 줄 모른다. 이세돌 9단은 패착을 묻고 싶었겠지만 기계에게는 그저 모든 것이 순서이자 계산에 의해 나온 결과일 뿐이다.
알사범에게는 이세돌 뿐만 아니라 국내외의 수많은 일류기사들의 기보가 저장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한 자체 학습을 통해 계속 진화해나가는데 알사범의 하루는 인간의 수십 년에 해당할 정도로 진화의 속도가 빠르다. 알사범은 바둑을 둔다는 생각 자체를 못한다고 한다. 그저 집을 계산하며 상대보다 더 많은 집을 확보하는 바둑의 승리요건을 갖출 수 있도록 끊임없이 연산하며 최적의 수를 찾는다.
맥주의 알고리즘
수많은 자가양조자들은 이러한 레시피 사이트를 돌려보며 자신의 맥주를 더욱 특성 있게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는 마치 내가 어떤 집을 지어야겠다는 설계도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 그리고 어떤 이유로 인해 맥주 맛이 달라졌다면 레시피 분석을 통해 설계를 변경하거나 새로운 집을 다시 설계한다. 내가 만든 모든 맥주레시피는 바둑의 기보처럼 레시피 사이트에 저장되어 언제든지 꺼내서 복기를 할 수 있으며 새로운 맥주를 설계하는데 참고자료로 쓸 수 있다.
이는 기계의 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농업의 힘이다. 먼저 보리나 밀농사를 통해 얻은 맥아가 일률적인 품질을 가지고 있다. 같은 무게의 맥아를 발효하면 똑같은 양의 술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호프의 쓴맛을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알파엑시드라는 쓴맛의 세기를 수치화하였다. 이러한 표준화된 농업을 다시 과학을 입혀서 수치화한 것이 맥주다.
그리하여 거대한 맥주제조의 알고리즘을 만들어낸 것이다.
지금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맥주의 알고리즘은 표준화된 농업과 수치화시킨 과학의 힘이 그 기반을 이루고 있다.
맥주는 바둑만큼 수많은 경우의 수를 만들어낼 수 있다. 보리, 밀, 귀리, 옥수수 등 각종 곡물이라는 경우의 수를 어떻게 가공하느냐에 따라 수십 가지 경우의 수를 만들어낸다. 살짝 혹은 중간 불에 혹은 바짝 태우는가에 따라 수십 혹은 수백 가지 경우의 수가 만들어진다. 호프 또한 수백 가지 경우의 수를 만들어낸다. 흙맛, 소나무맛, 시트러스한 느낌 등과 그 해 농사에 따라 달라지는 알파엑시드 값에 따라 엄청난 경우의 수가 만들어진다. 여기에 하면발효를 하느냐 상면발효를 하느냐 혹은 온도는 얼마에서 발효시키느냐에 따라 또 다른 맥주의 맛이 탄생한다. 뿐만 아니라 물은 어떤 것을 쓰느냐에 따라 혹은 과일이나 식물 재료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제각각 다른 수많은 맥주가 탄생한다. 제조법 또한 변화의 수를 줄 수 있는 것이 다양하다.
이러한 것들을 기반으로 다양하게 변화와 조합을 줄 수 있다. 이러한 엄청난 경우의 수로 인해 맥주는 엄청난 다양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전 세계가 맥주에 열광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감동은 어디에서 오는가?
한판의 바둑을 두는 이세돌을 보며 나는 경외를 느꼈다. 그가 느꼈을 절망과 혹은 외로움들이 그대로 표출이 된다. 특히나 바둑이 끝나고 습관적으로 복기하려는 그를 보며 심한 슬픔을 느꼈다.
결국 바둑이나 술이나 타인과 교감하는 것이다. 타인과 교감하지 못하는 완벽한 바둑 혹은 기계적인 완벽한 연주 등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
비록 완벽한 계산이 들어 있지는 않지만 그 술을 만드는 사람의 진한 이야기가 배어 있는 것이 더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술이다.
또한 그 고장의 농업과 자연이 그 술 안에 녹아 있는 것이 그곳을 찾는 사람에게는 훨씬 신선한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지역의 농산물을 사용해서 새로운 술을 만드는 일은 외롭고도 고독한 일이다. 시간을 견디는 일이 문득 아득하다.
그러나 술은 시간을 견뎌야 하는 음식이다. 어느 누구도 그 세월을 견디지 않고는 좋은 술을 마실 수 없다.
네가 있어서 내가 있는 것이다.
자연과 사람 그리고 그를 담은 한잔의 술을 잇는 것은 바로 감동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