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술

《歲寒圖》에 나온 그 소나무를 보신 적이 있나요

《歲寒圖》에 나온 그 소나무를 보신 적이 있나요

 

추사가 제주도 유배시 자주 찾았던 대정향교의 소나무를 보고 그린 소나무가 세한도에 그려진 소나무다. 세한도에 나오는 소나무 방향은 건물이 있어 반대 방향에서 촬영했다.

 

과거부터 제주도를 가리켜 삼다삼무(三多三無)라고 했다. 삼다는 돌 많고(石多), 바람 많고(風多), 여자 많고(女多), 삼무는 도둑 없고(盜無), 거지 없고(乞無), 대문 없다(大門無)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기자가 최근 돌아본 제주는 일부는 맞고, 일부는 아닌 것 같다.

제주도관광협회의 도움으로 제주도의 속살을 돌아본 결과 아직도 제주에는 제주도민도 잘 모르는 비경이 천지에 숨어 있다.

세한도

삼다에서 돌이 많은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인데 대부분 화산 폭발 때에 형성된 화산석이어서 이색적이다. 이 돌들을 활용하여 예술품을 만드는 재료로 활용하고 있어 어찌 보면 고마운 존재가 되고 있다.

바람도 그렇다. 과거 유달리 어려웠던 제주 환경에서 바람은 막아내기 힘들었겠지만 최근에는 이 바람으로 전기를 일으키는 풍력발전기의 날개를 돌리고 있다. 모르긴 해도 해녀들이 많아서 제주엔 여자들이 많다고 했는지는 지금은 아니다.

삼무 역시 재해석해야 할 대목이다. 도둑과 거지가 없는 것은 확실한 것 같지만 대문은 집집마다 설치되어 있다.

 

《세한도》에 그려진 소나무를 보셨나요?

대정향교

수없이 제주를 다녀온 사람들에게 물었다. “혹 제주에서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그린《세한도(歲寒圖》에 그려진 소나무를 본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 소나무 추사의 상상력으로 그린 것 아닌가요” 제주의 천지연 폭포나 정방폭포는 가봤어도 세한도에 그려진 소나무를 찾아 본 사람들은 극히 드물다.

자료를 찾아보면 이렇다.

추사는 1840년(헌종 6)에 윤상도 옥사와 관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1848년까지 이곳에 유배되어 있으면서 이곳에서 제주의 유생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쳤으며 많은 서화를 남겼다고 한다. 특히 여기서 추사체(秋史體)를 완성하게 되는데 학문적, 예술적 고립은 추사는 이를 창작의 원동력으로 삼았을 것이다. 유배지에서 그는 학문적 의리를 다하며 도움을 준 인물 이상적(李尙迪, 1804~1865)을 떠올리며《세한도》를 그렸다고 전해진다.

이상적은 조선 후기 역관으로, 김정희와 학문적 교류를 이어온 인물이다. 그는 북경을 두 차례 방문하며 귀한 책들을 구해 김정희에게 보내는 등 사제 간의 의리를 지켰다. 김정희는 그러한 이상적의 변함없는 품성을 공자의 송백 정신에 비유하여 소나무와 잣나무가 그려진 《세한도》를 헌정했다.

논어에「세한연후지 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 松柏之後凋:한 겨울 추위가 지난 후에야 송백이 시들지 않음을 알게 된다)」라는 말은《세한도》를 감상하다보면 이해가 빠르다.

추사는 유배지에서 가까운 대정향교(大靜鄕校:제주 서귀포시 안덕면 향교로 165-17)를 자주 찾아 외로움을 달랬을 것이다.

대정향교는 조선시대 공자를 비롯한 중국과 우리나라 성현들의 위패를 봉안하여 제사를 올리는 제향기능과 지역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사회교화 기능을 담당했던 교육기관이다.

1420년(세종 2년) 대정선 내 북쪽에 처음 건립된 후, 여러 차례 옮겨지다가 1653년(효종 4년)제주목사 이원진 재임 시 단산(바굼지오름) 기슭의 현 위치로 옮겨 지어졌다.

대정향교는 2단으로 정지된 부지위에 상단부에는 제향공간인 대성전(大成殿)이, 하단부에는 강학공간인 명륜당(明倫堂)이 배치되어 전학후묘(前學後廟)의 전형적인 향교배치를 하고 있다.

대정향교의 대성전과 명륜당은 조선시대 그 어느 지역보다 척박했던 대정지역의 향토성과 역사성을 투영시켜 소박하고 절제된 양식으로 표현해 낸 유교 건축물인 동시에 19세기 제주로 유배 온 추사 김정희의 역사적 자취가 서려 있다.

대정향교의 대성전.

바로 이곳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서 있었는데 현재는 잣나무는 없고 소나무만 자리를 지키고 서있다.

향교를 지키는 관리인에게 물었더니 세한도에 그려진 소나무가 맞는다고 했다. 2백여 년의 세월이 흘러 소나무는 무성하게 자랐지만 나무의 큰 줄기는 세한도의 소나무와 닮아 있었다.

세한도에는 소나무 가지가 오른쪽으로 뻗어 있는데 이 각도로 사진을 찍으려니 향교 건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반대방향에서 촬영을 했다.

한 여름이라 모두가 푸르러 세한연후지는 실감할 수는 없었지만 마음속으로만 느낄 수 있었다.

▴《세한도》의 전승과 귀환:《세한도》는 이후 이상적의 가문을 떠나 여러 소장자를 거쳤고, 1930년대 중반 일본의 경성제대 교수 후지쓰카 지카시의 손에 들어갔다. 일제강점기 말기,《세한도》는 일본으로 반출되었으나, 서예가 소전 손재형의 노력으로 국내로 돌아오게 된다. 이는 한국 문화재 반환의 중요한 사례로,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제주도 현지에서 글․사진 김원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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