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기 좋은 때에
임재철 칼럼니스트
‘삼국지’는 중국에선 말할 것도 없고, 동양 각국에서 남녀노소, 또 어떤 민족이냐를 따질 필요 없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생에 한번쯤은 읽게 되는 책이라고 할 만하다. 우리나라에서도 예로부터 ‘삼국지’는 다른 어떤 책보다도 광범위한 독자층을 가진 베스트셀러로 군림해 왔다. ‘삼국지’가 그처럼 영원한 베스트셀러로 애독되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무궁무진한 그 읽는 재미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중국 역사의 큰 고비 때마다 항상 천하대세를 좌우하고, 역사의 큰 강줄기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 있어 삼국지적 책략은 빠짐없이 등장한다. 중국 후한 말(後漢末)의 위(魏), 촉(蜀), 오(吳)의 삼국이 정립하던 시대에 군웅이 할거하며 파란만장의 지모와 무용을 겨루는 대하역사소설인 ‘삼국지’는 재미있는 읽을거리 이상으로 그 안에 담긴 삶의 지혜와 역사의 교훈이 시공을 초월한 진리로 빛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날부터 ‘삼국지를 세 번 읽은 사람과는 다투지 말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우리의 일상생활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삼국지’는 한번 읽게 되면 방대한 양을 일거에 독파하게 되고, 한번 읽고 나면 또 한두 번쯤은 더 읽게 되는 마력이 있는 책이다. 필자 역시 두 번을 읽었다. 어디 그뿐인가. 우리 곁에는 주저 없이 권할 수 있는 양서가 가득하다.
하지만 요즘 스마트폰, ‘숏폼’, 챗GPT, 딥시크, 유튜브 세대의 현대인들은 인식이 좀 다른 것 같다. 이를테면 ‘삼국지’는 너무 복잡하게 사건이 중첩하고 분량이 방대해 경원시하는 현상이 뚜렷해 보인다.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을 많게 하는 일에만 올인 하는 것이 오늘의 세태여서인지 모르겠지만, 긴 글을 읽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 되어버렸다.
흔히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 불린다. 가을 바람 속에서 독서에 몰입하기 좋은 때라서 이상적인 계절일지 모르지만, 누구나 독서는 어렵다. 마음에 드는 책을 고르고, SNS와 미디어의 유혹을 이겨내고 책 읽는 시간을 내야 하기에 그렇다. 이런 고난을 이겨내고 책을 읽기 시작해도 오래도록 집중하기 쉽지 않다.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바뀌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저마다 아쉬움이 크지만, 때로는 책을 통한 다양한 생각과 삶의 향상, 인간 가치의 실현에 마음을 기울이는 일이 관성처럼 절실한 게 인간의 삶 아닐까. 말하자면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 가장 고귀한 투자가 독서라는 생각이다. 쾌청한 하늘과 함께 가을의 깊이가 더해가는 때에 우리가 독서에 푸욱 젖어서 ‘책으로 채우는 가을’이 되었으면 좋겠다.
독서가 늘 숙제처럼 따라다니는 필자이지만 이맘때면 릴케의 ‘가을날(Herbsttag)’이 떠오른다. 방황과 고독, 갈구가 절실히 담긴 삶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필자가 경험하고 체득한 가장 명료한 답은 ‘독서를 통한 지혜의 축적’이다. 항상 지적 능력 부족을 자책하며 살아온 필자로서는 독서만 한 빽이 없다고 본다. 특히 글을 쓸 때, 마감 시간이 임박해 올 때 실증적 독서 체력의 비축을 실감한다.
여하튼 책읽기 딱 좋은 때이다. 책은 쌓아두고 제목만 닳도록 바라보고 있어도 피가 되고 살이 된다. 책마다 사연이 있고 소중한 가치가 있다.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는 시대에 변방의 미아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책을 읽어야 한다. 오디오북이든 페이퍼 북이든 세상을 통찰하는 저자의 머리와 가슴이 담긴 책은 마음이 단단해진다.
옛날의 어른들 말씀에 “아들이나 손자의 글 읽는 소리를 들으면 아픈 병도 나아진다”라는 말이 전해진다. 더욱이 이제는 한권의 책이 선사하는 행복을 표현하기 위해 더 이상 외국 서적이나 인물을 찾아 헤매지 않아도 될 성싶다.
우리에게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가 생겼으니, 가령 한강 작가는 노벨문학상 수상을 기념해 자신의 이름을 딴 문학관 등을 짓는 대신 ‘책을 많이 읽는 도시’를 만들어 줄 것을 광주광역시에 요청했다는 후문이다.
우리를 기다리는 이 좋은 가을에 온종일을 독서에 바치는 삼매경에 빠져보면 어떨까요. 독서가 가장 평화로운 소풍이 되는 ‘책으로 떠나는 새로운 가을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