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여, 우리에게 술은 과연 무엇인가
박정근 (문학박사, 전대진대교수, 황야문학주간, 작가, 시인)
금슬이 좋았던 그는 아내의 부재로 인해 심리적으로 균형을 잃고 말았다. 그는 외로움을 이기기 위해 확실하게 검증되지 않은 여인들과 어울려서 술을 마시곤 했다. 필자는 친구에게 탐정을 붙여서 여인의 정체를 확실하게 알아본 후 사귀라고 충언을 했다. 하필 사귄 여인이 꽃뱀이라는 것이 밝혀졌고 상당한 돈을 빼앗기기도 했다. 그래서 필자는 그를 심리적 위기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자주 만나 술을 마시며 위로하는 버릇이 생겼다.
사실 허심탄회하게 마음을 주고받는 친구와 술을 마시면 마음을 터놓는 대화가 가능하다. 그래서 체면을 지키기 위한 허위적 요소가 완전히 배제된 관계가 된다. 어쩌면 친구를 통해 자신의 약점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이것은 술에 취하여 친구와 심리적 일치감을 느낄 때 가능하다. 물론 대화하는 중에 함께 술을 마시는 제의가 펼쳐질 때 시너지 효과가 난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이 친구와 술을 마시면 막말에서 시작해서 막말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우선 서로 부르는 호칭부터 파격적이다. 지금부터 서로 솔직하게 의견을 주고받자는 신호이다. “야, 최가야 그동안 밥은 잘 처먹고 다니냐?” 류의 대화로 남이 들으면 시장바닥의 장사치 수준의 대화가 지속된다. 옆 사람들이 들으면 마치 시비를 거는 양아치로 알아들을 수 있으리라. 친구는 그런 대화가 가식이 없어 더 좋다고 강변한다. 필자도 그런 식의 대화로 대응할 수밖에 없게 된다.
술자리가 길어지면서 술기운이 얼큰하게 올라오기 마련이다. 이런 상황에서 친구끼리의 대화는 예의나 도덕적 가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막말과 비존칭 언어를 남발하는 대화가 자꾸 마음에 걸리기도 한다. 특히 가까운 좌석에 젊은이들이 술을 마시고 있으면 더욱 그렇다.
게다가 필자는 젊은이들을 가르치는 교육자가 아닌가. 사실 나이가 든 사람들이 서로 막말을 함부로 하는 모습은 그리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젊은 친구들이 들으면 연장자들이 그리 점잖치 못하다고 핀잔을 하리라. 그렇다고 술자리에서 도덕적인 말만 주고받으면 재미가 전혀 없다. 평소에 공자님 말씀만 하는 사람들이 술자리에 오면 영 다른 언어를 구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술친구끼리 주고받는 대화는 일종의 무의식의 발로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평소에 사회적 마스크를 쓰고 산다. 이것은 심리학적 용어로 페르소나라고 칭한다. 자신의 욕망대로 살아가지 못하고 타인이 기대하는 모습대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러한 삶은 범인들로 하여금 자연적 욕망을 억누르고 허위적 삶을 살아가게 한다. 그래서 억눌렸던 욕망에 대한 규제를 풀고 싶은 무의식적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이성과 같은 초자아(superego)는 마음대로 돌출하는 욕망의 불길을 막는데 급급해 진다.
이 순간 인간은 욕망의 분출과 억압 사이에서 갈등하면서 그로 인한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노장년층들은 성적 욕망이 존재하지만 여러 사정으로 억압을 하거나 포기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육체적 욕망에 대한 갈증이 도사리고 있다. 다만 사회적 마스크인 페르소나가 가식적인 표정을 지으며 마치 성욕에 대해 초월한 양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욕망과 이성의 이중적 길항작용은 필자를 포함한 노장 년들의 정신건강을 불안하게 만들 수 있다. 욕망의 분출은 자연스럽게 풀어주는 것이 좋으며 술자리는 인간 심리를 긍정적으로 다스리는 통로이다. 하지만 허위적 도덕의식은 욕망을 부정적으로 매도함으로써 억압상태에 방치를 하고 있다. 욕망을 너무 오래 억누르면 더 파괴적으로 폭발할 수 있다. 압력이 극단적으로 가해진 관은 터지고 만다. 결국 관이나 솥이 산산조각이 나서 고쳐 쓸 수가 없는 것처럼 인간의 심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이성의 억압을 풀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 중의 하나가 바로 술을 마시는 행위이다. 친구는 술을 마시며 젊은 시절에 즐겼던 성적 판타지를 불러내어 즐기고자 한다. 노장년도 취하면 환상이라 할지라도 젊은이가 되어 청춘의 욕망을 소환해서 현실화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는 의도적으로 야한 행위를 하는 양아치의 역할을 연출하고 있다. 술은 답답한 현실을 녹여내는 연금술사처럼 억압의 나사가 조여진 부분을 살짝 풀어서 욕망의 증기가 조금씩 빠져나오게 한다. 욕망의 증기는 공기 속으로 올라가면서 신기루를 만들어 낸다. 친구는 욕망이 이끄는 대로 스토리텔링에 열중한다. 마치 자신의 성적 판타지를 실제로 연기하는 양 실감나게 펼쳐나가는 것이다.
술에 취한 친구는 술집의 공간에 혼자 존재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여인들과 성적 행위를 실제로 벌이고 있다는 환상에 빠져있는 그가 흥미롭기도 하지만 안쓰럽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는 아내를 잃고 혼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어느 여인에게도 안착하지 못하는 것은 그가 아내를 무척 사랑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어쩌면 지금 벌이는 행각은 아내와 비교할 수 없는 여인에 대한 가학증적 심리를 나타낸다고 볼 수도 있다. 그는 술을 조금씩 절제하다가도 완전히 만취해버리는 순간 절제의 끈을 놓아버린다. 그는 이제 술에 강한 필자를 능가하는 주신처럼 행동한다. 그리고 드디어 고독에서 벗어났다는 제스처를 하며 술자리를 좌지우지하는 박쿠스의 수제자가 되어버린다.
필자를 의아하게 만든 사건은 그가 집에서 칩거하면서 술을 피하는 최근의 사태이다. 전화를 해도 받지 않거나 받아도 혼자 있고 싶다고 만남을 피한다. 물론 술을 마시고 건강에 적신호가 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거의 대인기피증에 가까운 그의 생활이 평소에 고통스럽게 생각했던 고독에 대한 그의 인식이라고 볼 수 있다. 친구들에 대한 반항적 토로는 자기는 아내가 없이 외롭고 살고 있으니 서로 형편이 다르지 않는가라는 반문이다. 그래서 병이 와도 누구도 자신을 보살펴줄 사람이 없다고 외치는 것이다.
이제 친구와의 술자리도 거의 기억에서 사라져간다. 그토록 흥미진진하게 즐기던 술자리가 그의 건강 염려증으로 인해 기피의 대상이 되어간다. 어렵게 전화를 하여 만나 술을 나누기로 했다. 하지만 그는 거의 술 한 잔을 제대로 마시지 않고 별로 흥을 보이지 않았다. 그가 즐기던 술을 마시지 않으니 대화가 제대로 될 리가 없다. 술을 마시지 않으니 옛날의 열정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면 이전에 우리가 마셨던 술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진지하게 나누었던 대화는 술을 마신 부산물에 불과했단 말인가. 그와 헤어지며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친구여! 우리에게 술은 무슨 의미였나. 지하철 입구로 사라져가는 친구에게 되묻고 싶었다.